방학이 되어 시간 여유라도 있을 땐、문득 예전에 즐겨 찾던 금강산(金剛山) 생각이 난다。눈 속에 파묻혀 죽은 일인(日人)의 유품(遺品)에 平生愛金剛 今日雪中死라는 종이쪽지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금강산 추억 속에는 살아 있다。十代、二十代 初에 거의 매년 찾던 금강산이다。
오늘날처럼 등산 장비를 갖춘 차비가 아니라 수건과 칫솔 정도를 가지고 무전여행처럼、어슬렁 어슬렁 계곡과 봉우리를 유명무명(有名無名) 가릴 것 없이 거닐듯 배회(徘徊)한 것이다。스무살 되던 여름에는 三주일은 좋히 걸렸었다。가섭곡(迦葉谷)을 거쳐 수미탑(須彌塔)을 보고 수미암(須彌庵)、선암(船庵)을 오르던 길의 호젓함은、상식적으로 기암괴석(奇岩怪石)을 찬미하는 경치와는 달리 선경(禪境)으로서의 아름다움을 가슴으로 느끼게 한 절경(絶境)이었다。특히 수미암 언저리의 반석(礬石)을 덮은 두터운 이끼 속에 파묻힌 옛날 탐승객(探勝客)의 각명(刻名)은 예술품 처럼 품격(品格)조차 지녔었다。
그러나 잊지 못할 일은、수미암에서 홀로 수도하는 老스님이다。서울 사람의 입에 맞을지 몰라 하면서 함께 먹은 조식(粗食)의 별미도 잊지 못하겠고、남은 밥을 손수 절 앞의 반석(礬石)에 갖다 놓는데 다람쥐가 여러 마리 쫓아와서 맛있게 먹던 광경이다。꼭 할아버지 따라 밤이라도 주워 먹는 그런 모습이었다。하도 신기해서 그 날 밤을 거기서 묵고 해돋이까지도 맞이 했다。
거의 말씀 없는 老스님이라 대화는 별로 없었지만、나 같은 속인조차 두려워 않고 눈을 반짝이며 쫓아다니던 다람쥐가 이야기해 준 것이 더 많았던 것 같다。이제도 여행 스케줄 속에 불사(佛寺)을 즐겨 넣는 습관은 혹 그 다람쥐가 그리운 마음에서 자란 것이나 아닐지。 (京織商業高等學校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