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TV에서 보육원이나 영아원 등에서 키우는 버려진 아이들의 입양문제에 대하여 주부들이 토론하는 것을 보았다. 거기에 참석한 주부들은 대부분이 고학력층인 것 같았고 대체로 안정된 생활을 하는 것 같이 보였다. 또 대개 기독교 신자인 듯 했다.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사회자의 말도 그러했고 입양하여 키우겠다는 주부들 역시 그들의 「사랑」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 프로그램에 참석한 보육원 입양담당자의 말대로 우리 사회는 그렇게 버려진 아이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버림」이 옛날과 같이 가난이라든가 질병 등의 어쩔 수 없는 사연에 의한 부모들의 친권 포기가 아니라. 철 없이 사랑하고 철 없이 헤어지는 젊은이들에게 그 원인이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아이들을 어찌 그들에게만 탓을 돌릴 것 인가. 미혼모라든가, 버려진 아이들의 문제는 그 당사자들만의 문제만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 모두에게 그 책임이 있는 것이다. 무지해서, 자신들이 엄청난 큰 일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행하는 그들, 잠시의 실수로 일생을 회한 속에서 보내고 있을 어느 이름 모를 젊은 남녀들, 그리고 고아원에서 아무 사실도 모르는 채 살아가고 있는 고아들, 이 모두는 이 사회가 배출해낸 병고인 것이다. 지난 세대가 사회를 잘못 이끌어가서 그리 되었고 지금 세대가 잘못 받아 들여서 그리 된 것이다.
그런데 이 날의 토론에서의 주부들의 모습을 보며, 아직도 우리는 사회의식이 낮은 국민이란 걸 새삼 느꼈다.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입양아를 찾을 때는 건강하지 않은 아이, 다른 아이보다 덜 똑똑해 보이는 아이들을 데려간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주부들은 사내아이를 먼저 고르고 여자 아이 중에서도 건강하고 예쁜 아이를 고른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나니 아이를 입양하는 부모 측에서는 아이를 맞는 것이 아니라 백화점에서 상품을 고르듯이 고르고 있다는 느낌까지 주는 것이었다,
사람이 어디 등급이 있겠는가? 미인 대회마냥 몸 각 부분의 치수를 재어 상품 내놓듯 내 자식을 택할 것인가? 내 배 속의 아이도 마음에 차면 취(取)하고 차지 않으면 사(捨)할 것인가?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나는 부처님 말씀을 생각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인연설이 생각난 것이다.
저 아이들이 비록 남의 몸에서 태어났지만 내가 그의 부모 된 마음을 갖고 그가 내게서 함께 자라게 된다면 이는 다만, 숙세의 긴 인연이 나의 몸을 빌 인연만 멀리 했을 뿐, 진실로 내게 찾아 오기 위해 어느 모를 사람들의 몸을 빌어 내게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나에게 오기 위하여 저 아기는 온갖 고생과 멸시와 생명의 위험까지 무릅쓰며 저 자리에 있는 것이다. 이런 생각, 이 절절한 인연이 입양하는 부모들에게 어떤 피상적이고 광범위한 「사랑」보다 더 가슴 울려주는 말씀이리라 생각한다. 나를 만나기 위해 찾아 온 아기, 그 아기를 어찌 쌍꺼풀이 있는가 없는 가로 구별 짖겠는가.
또한 그 아기들은 우리의 세대에 우리와 함께 인연 맺은 우리들의 아기인 것이다. 이 책임을 누가 회피할 것인가. 모두 함께 그들을 돌보고 내 자식처럼 아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부처님 말씀을 실제 구현하는 또 하나의 길일 것이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