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밀] 행복의 법칙 / 광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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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밀] 행복의 법칙 / 광덕
  • 광덕
  • 승인 2009.04.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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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밀

행복을 찾는 얼굴들. 부자도 권문세가도 강자도 약자도∙∙∙∙∙∙. 물질 획득으로 감각 추구로 행복을 찾아 헤맸지만 역시 커가기만 하는 가슴의 공동(空洞)을 어찌할까? 그것은 행복이 무엇인지를 몰랐기 때문이다. 행복에 이르는 길, 즉 「행복의 법칙」을 몰랐기 때문이다.

     [1] 행복을 찾는 얼굴들 

   사람은 누구나가 행복을 찾는다. 그러면서도 다들 행복하지는 않는 모양이다. 겉으로는 행복스러운 많은 여건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도 역시 행복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돈, 권세, 사업, 가족, 명예∙∙∙∙∙∙. 많은 것을 가진 이들이 역시 행복은 빠진 모양이다.
   저들이 행복을 찾는 것은 저들이 욕심이 많아서가 아니다. 행복이라는 구색을 마저 갖추자는 겉치레가 아니다. 재부(財富), 권세, 명예를 쓰고 다녀도 가슴 한 구석에는 싸늘한 바람이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어둠의 입김이, 불안의 구름이 그의 주변을 어루대고 있다. 그의 혼과 마음이 안식을 얻을 보금자리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그리고 행복에의 간절한 소망을 그들에게서 읽는다. 이루지 못한 상태에 사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참고 있는 인종가(忍從家)도 있다. 참고 살아가노라면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낙천가도 있다. 이렇게 하면 된다는 기대와 자신을 가지는 사람, 또 그 사이에서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헤매는 사람. 혹은 묵상(默想)으로, 혹은 수행으로, 혹은 좌충우돌 , 혹은 체념으로∙∙∙∙∙∙. 한결같이 현상에서 탈피를 기도한다. 그의 잔잔한 표정에서 또는 그의 흔들리는 눈망울 저 너머에서 우리는 인간의 진실하고 애절한 생명의 소망을 읽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2] 유물론적 행복관이 낳는 공동(空洞) 

   정말 많은 사람들이 행복스러워 보이지만 행복하지는 않았다. 거리를 메우는 사람의 물결, 총총걸음으로 제각기 방향을 찾아 흘러가지만 그의 가슴의 고백은 행복만은 아닌 것은 너무나 많이 보아 온다.
   그것은 웬일일까?「그것은 한마디로 행복의 법칙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행복을 구한다고 한다. 행복이 무엇이기에 어떤 것을 구한다고 하는 것일까.
   돈인가, 부귀인가, 권세인가, 아들 딸 많은 것인가, 건강인가, 아니면 욕구충족인가, 그 모두인가.
   만약 이것들이 행복이라면 돈 많으면 크게 행복할 것이다. 권세 잡으면 크게 행복할 것이다. 천자만손(千子萬孫)이면 행복할 것이다. 건강하면 행복할 것이다.
   과연 그러한가? 역대 돈환이 행복했으며, 천하무적 복서나 레슬러들이 행복했던가, 억만장자 재벌들이, 또한 권문세가들이 과연 행복했던가.
   대개 물질이나 형상 있는 것 감각적인 것을 행복의 표적으로 알고 찾아 헤매고서는 결코 행복은 잡히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 물질적인 것 형상이 있는 것, 감각적인 것들은 행복요소의 외형이요 겉치레요, 잔재(殘滓)이지 그것이 행복 자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림자이지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잡았다고 할 때는 이미 놓치고 없는 것이다. 아무리 물질적 감각적 여건을 완비해 보라. 거기에 행복의 신이 찾아드는가.
   거기에는 갈등과 대립과 갈증과 거친 인심과 기계적 잔인성이 인간의 가슴속에 깊숙이 공동(空洞)을 장만하고 뼈 속 깊이깊이 처참한 공허가 스며들 것이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유물론적 행복관이 난무하고 있다. 그래서 물질적 감각적 추구가 행복인줄 알고, 물질 획득을 행복 획득으로 알고 있다. 곧 이것을 가치로 알고 있다.
   과연 물질 획득이 곧 행복 획득이었던가? 부자가 된 분은 대답해 보라.

     [3] 물질적 감각적 행복은 물거품이다

   그러면「행복의 법칙」이란 무엇이란 말인가?「물질은 물질 아닌 것의, 형상 있는 것은 형상 아닌 것의 그림자」라는 사실을 알고 이 그림자를 넘어선 저 너머의 실자(實者)를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물질은 그림자이며 형상은 꿈이며 감각적인 것은 환(幻)인 것을 모르기 때문에 이 꿈이며 환이며 그림자가 아닌 실자에 착안하지 못하는 것이며 동시에 환이나 그림자나 물거품을 잡으려고 애쓰고 허덕인다.
   그리고 그와 같이 노력하고 기를 쓰고 진땀을 흘려서 얻은 행복이란 것을 잡았을 때는 이미 공허를 안겨준다. 그것은 실(實)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물질은 그림자라는 사실을 철저히 알아야겠다. 이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독자 여러분은 반야심경을 아실 것이다. 그리고 그 첫머리에「오온(五蘊)은 다 공(空)했다.」한 구절을 기억하실 것이다.
   이 반야심경은 진리에 들어 자재와 행복을 얻는 방법을 설한 경이라 해도 좋다. 그래서 짤막한 말씀 가운데 진리의 뜻이 풍성히 담겨 있다. 여기「오온이 공했다.」한 것은 대자재를 성취한 관세음보살이 대지혜로써 보니 오온은 공했다고 말씀하셨다.
   오온이란 무엇인가? 오온이라 함은「다섯 가지의 쌓임」또는「다섯 가지 구성요소」의 뜻인데 물질과 정신의 총체를 가리킨 말이 된다. 다섯 가지란 색(色)— 즉 물질계와, 수(受)— 감각, 상(想)— 표상, 행(行)— 의지, 식(識)— 의식 등의 정신현상을 말한다.
   다음에 공했다는 것은「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 원의(原意)다. 인도 수학에서는 영(零)을 의미한다. 그래서 오온은 있는 듯 하지만 그림자일 뿐 없다는 뜻이 된다.
   또 금강경에는「일체 현상계는 꿈이며 환이며 물거품이며 그림자이며 이슬과 같고 또한 번개와도 같으니 이와 같이 여길지니라.」라고 말씀하신다.
   위의 부처님 말씀에 의한다면 우리가 현상에 눈을 팔리고, 물질에 마음을 빼앗겨서 거기서 가치니 행복이니를 찾아 헤맨다는 것이 신기루에 현혹된 사막의 나그네와 무엇이 다른가. 그래서 그에게는 행복은 커녕 공허와 실의와 갈증이 엄습해 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현대인의 번뇌의 근원을 여실히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행복을 구한다면 마땅히 그림자 아닌 실자를 찾아야 한다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건강을 구하면서 건강을 얻지 못하고 세계의 평화를 바라면서 전쟁은 그칠 줄 모른다.
   우리는 마땅히 물질계와 현상은 이것이 그림자라는 사실을 철저히 조파하여야겠다.

     [4] 현상 너머 실자(實者)가 만능자(萬能者)다
 

   나는 앞서 그림자이며 환(幻)인 현상을 넘어서 실자를 파악할 것을 말했다. 그러면 이 현상 너머의 실자란 무엇인가. 그것은 진리다. 바꿔 말해서 참마음이요, 불심이다. 불심인 진리가 현상 너머에 있는 실자다.
   혹자는 필자의 이와 같은 표현을 탓하리라.「현상이 공이며 환일진대 어찌 내외가 있는 것이며 실자라는 것이 있을 것이며 득실이 있을 것인가? 만약 따로 있다면 그도 또한 망(妄)이다.」
   좋다. 혹시 독자 가운데 이와 같이 항의하는 분이 있다면 필자가 바랐던 바다. 실자란 말도 부득이한 표현인 것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이 실자, 불심인 진리가 행복의 근원이다. 행복을 구하는 자는 무엇보다 먼저 이 불심을 잡아서 제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 불심이 만능자다. 무엇이든 거기서 나온다. 불심은 무량한 지혜이고 끝없는 사랑이고 생명이고 보장(寶藏)이고 평화이고 조화이고 힘이고 광명이다. 
 「한마음 헌장」에는 불심을「한마음」이라 하고 다음 같이 말하고 있다.

「영원한 자재, 광명과 창조와 무한과 환희가
대해(大海)의 파도처럼
끝없이 너울치고 역동한다.」

「모든 것이 완전하게
모든 것이 원만하게
모든 것이 조화있게
이미 이루어졌고 구족하다.
대성취가 자족하다.」

「존재에 앞선 존재 이전 자,
모두의 모두이기에
모두는 이미
거기 있고 그의 것이다.
풍요, 자재, 광명, 생명, 평화
무한창조—.
행복, 지혜, 자비, 무한공덕장,
축복의 물결
행복의 대해(大海)」

     [5] 진리의 열쇠는 쥐어져 있다 

   이것은 진리의 근본 표현이며 불심의 본연 속성이다. 이것이 그림자이며 환인 현상 저 너머 실자의 본연동태다.
   이보다 더 큰 소망이 있을 수 있을까? 이 이상을 생각할 수 있을까?
   실로 이 이상은 없다. 이것이 마지막 가는 소망이며 다시 더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 진리를 잡아야 하고 이 불심을 나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혹자는 여기에 진리를 잡고 불심을 나의 것으로 만든다 할 때「그것은 어떻게 만들며, 만드는 일이 어려운 것이라면, 결국 하늘의 별을 따라는 식의 말이 아닌가」할 것이다.
   그러나 염려할 것은 없다. 이미 완전하게 생생하게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든 이 생명 이전부터 본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알고 보면 얻는다는 것이 망(妄)인 것이다. 천만 번 죄를 짓고 악을 저지르고 억만 번 지옥을 드나들었다 하더라도 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이 본래 있는 것이다. 참으로 있는 것이다. 다른 것은 있는 듯 하지만 실로는 없는 것이요, 우리의 지금 당장 현전(現前)된 현실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왜? 참으로 있는 것은 그것 뿐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현실이며 현존(現存)인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사리불이여, 마땅히 알라. 내 일찍이 서원을 세우기를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모두가 나와 꼭 같게 하고자 하였더니 내 이제 저 옛적에 세운 바 원을 이미 만족하였느니라」(법화경 방편품)
   이와 같이 하여 우리는 저 옛적부터 부처님의 위신력을 힘입어 이미 여래공덕인 불성진리를 완전히 얻어 마친 것이다.

     [6] 이 땅에 오기 전에 받은 여의주

   그런데도 이미 우리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자질구레한 소망을 찾아 헤매기 얼마였던가.
   사실 아무리 억만장자라는 전 세계의 재화가 몽땅 자기 명의로 등기되어 있더라도 그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다면 한 푼도 쓸 수 없는 가난뱅이와 무엇이 다른가. 자신에게 무량한 재화가 있는 것을 알 때 비로소 그에게는 부자의 권능을 갖추게 마련이다.
   우리가 불심진리의 무량공덕을 지니고 있더라도 이것을 알지 못하고 지낸다면 고난의 구렁으로 전락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다.
   경에는 이와 똑 같은 이야기가 보인다.
  「옛적에 가난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그의 친구 집에 와서 술에 취하여 드러누웠다. 그의 친구는 바쁜 일이 있어 그가 잠에서 깨기를 기다리지 않고 집을 나서면서 엄청난 값이 나가는 보배구슬을 술 취한 친구의 속옷 자락에 달아 주었다. 이 사람은 술에 취해서 이런 일을 도무지 깨닫지 못하였다. 술이 깨자 일어나 다른 고장으로 떠났다. 벌어 먹기가 역시 힘들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벌이가 되면 그것으로 만족을 삼고 지냈더니 하루는 다시 옛 친구를 만났다. 친구는 이 사람을 보고 이 못생긴 친구야, 어찌 이런 꼴이 되어 있는가. 내가 지난 번 자네를 편안히 하고 또한 마음껏 즐겁게 살게 하고자 무가보주(無價寶珠)를 자네 옷 속에 걸어 주었는데 지금도 바로 있지 않는가? 그런데도 자네는 이것을 모르고 고생하고 시달리며 푼돈 벌이에 바쁘니 어리석기 짝이 없구먼, 자네 그 보물을 소용대로 쓰게, 언제까지나 마음껏 쓰더라도 부족하지는 않을 것이네∙∙∙∙∙∙.」(법화경 오백제자 수기품)
   여기의 장자 친구는 부처님이시고 가난한 친구는 범부 중생이다. 저들 범부 중생은 이미 부처님 집에서 마음껏 마셨고 배부르게 먹고 다시 선물로 무가보주를 얻은 것이다. 쓰고 쓰고 언제까지라도 한없이 써도 한이 없는 큰 보물을 얻은 것이다. 이 보물이 자기 속옷에 간직되어 지금 당장도 변함없이 여전한데 가난한 친구 어리석게도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하루하루 밥벌이에 허둥거리는 셈이다.
   부처님께서는「여기 무가보주가 있다.」하고 거듭 일깨워 주신다. 그리고「마음대로 써라. 그리하여 행복하게 살아라.」하신다.
   무가보주, 무가보주, 이 무가보주, 이것이 진리이며 불심이며 본면목 불성이다. 만고에 변함없는 행복의 근원인 것이다. 우리는 이를 믿고 이 무가보주를 쓸 줄 알아야 하겠다. 하루하루 품팔이에 만족하지 말고 우리가 본래로 갖춘 무한가치를 발현하여야겠다.

     [7] 행복의 긍정이 행복을 부른다

   이래서 우리의 참 모습은 무한가치를 지닌 불성이며 불심이며 진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거짓인 자기를 살려고 하지 말고「참된 자아」로 살아야 하겠다.
   불성은 불(佛)의 본성이다. 형상인 불(佛)이 불(佛)이 아니라 불성이 진불(眞佛)이다. 그러므로 만인에게 부존(賦存)하는 불성이 즉시 진불이다. 김씨의 아들에게는 김씨의 피가 흐르고 박씨의 자손에게는 박씨의 피가 흐르고 불(佛)의 아손(兒孫)에는 불(佛)의 피가 흐르는 법이다.「불(佛)의 피」이것이 불성이다. 그러므로 만인은 바로 불자, 불(佛)이 그의 본 모양이요 생명이다.
   행복을 구하는 자는 먼저 이것을 믿어야 한다. 믿는 것이 나타나는 법이다.
   독자는 이제 그림자며 환인 현상을 넘어선 저 너머의 실자가 무엇인가를 알았으리라. 그리고 행복을 구하는 자는 이 실자를 잡아야 한다는 말이 하늘의 별을 따라는 말이 아니고 이미 있는 현실인 현존— 즉 불성진리를 믿어라 함을 이해했으리라 믿는다.
   그러면 이 만화(萬化)의 조화주(造化主)며 창조의 도깨비 방망이 같은 불성진리를 어떻게 하여 우리 현실 위에 구현시킬 것인가가 남는 문제이다. 그것은 현상을 보지 아니하고 진리본성을 믿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새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을 나투는 것이니 믿으면 믿는 대로 나타나는 법이다. 그래서 믿음이 창조라고 말한다.

     [8] 만인에게 합장하고 감사하는 자세 

   우리는 무엇보다 만인을 부처님으로 알고 존중하고 감사하고 섬기고 받들어야 한다. 이렇게 말하면 거짓을 꾸민다고 오해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현상을 보는 것이 아니고 그의 실상이며 본성을 보고 하는 말이니 조금도 거짓을 꾸며서 그렇게 믿어라는 것이 아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보고 믿어라는 것 뿐이다. 그러면 저는 중생이 아니게 된다.
   나에게 불(佛)도 나타나고 불(佛)의 자비와 위덕과 은혜가 나에게 내린다. 가까이는 부모님, 남편과 아내가, 형제와 자녀가, 그리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그 모두가 나에게 은혜를 내린다. 모두가 하나 같이 따뜻하게 은혜와 찬양으로 엉키게 된다.
   경에 말씀하신다.「일체 중생을 부모와 같이, 스승과 같이, 아라한과 같이, 내지 부처님과 똑같이 받들어 섬겨라. 그러면 부처님의 무량한 공덕을 갖추게 되느니라.」고 하셨다.

     [9] 자비는 행복을 실어 오는「파이프」 

   다시 중요한 것은 자기를 본원진리(本源眞理)에 연결시켜야 한다.「본원진리」라 함은 불성을 말한다. 「연결시킨다」함은 자신의 생명이 부처님 진리에서 온 것임을 믿고 부처님 마음다운 따뜻함, 윤택함, 부드러움을 행함을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믿고 따뜻함을 행할 때 우리의 내부 생명인 불성공덕은 현실 위에 나타나게 마련이다.
   어찌하여 자비를 행하면 우리의 내부 생명인 불성에서 온갖 공덕이 현실 위에 나타나는 것일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불성의 기본 체성(體性)이 자비인 까닭이다. 경에도 분명히「모든 부처님은 대자비로 체를  삼으신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비를 행하면 우리의 내부 생명인 부처님의 대자비 위신력이 우리의 현실에 연결되고 유도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만약에 자비를 행하지 않으면서 불신력(佛神力)을 누리고자 하는 것은 전원(電源)에 사기나 나무를 연결하면서 전기가 흘러 오기를 바라거나 또한 라디오에 전파 주파를 맞추지도 않고 방송을 들으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나무나 사기는 도체가 아니다. 전기가 흐를 리 없다. 방송을 듣고자 할 때 다이얼을 맞추지 않으면 방송국에서 아무리 강력한 전파를 발사하더라도 그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것과 같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입고자 하거든 자비를 행하라는 것이다.
   자비를 행하자. 자비가 부처님의 체온이며 방송주파다. 그러면 부처님 위신력은 우리의 것이 되고 불성공덕은 우리 생활에 구현할 것이다.

     [10] 대호쾌활(大好快活) 밝게 웃자

   끝으로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밝은 마음」을 갖는 것이다. 밝은 마음을 행하는 것이다.
   무엇이 밝은 마음인가? 그것은 무엇이 어두운 마음인가를 생각해 보면 명백하다. 도대체 이 세상에서 온당하지 않는 것, 떳떳하지 않는 것, 불평불만, 나쁜 것이란 모두가 마음을 어둡게 하고 마음을 우울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평불만, 부도덕, 질병, 불행, 재앙 예상, 공포 등 일체 마음을 어둡게 하는 것을 마음에서 몰아내야 한다. 어떻게 어두운 것을 마음에서 몰아낼까. 그것은 밝은 마음을 내는 것이다. 마음속으로 다만 감사하고 선량하고 성취하고 활기 넘치는 생각으로 가득 채우라. 답답하고 용렬하고 겁약한 생각이 들거든 자신의 불신력을 생각하고 용력으로 채우라.
   본래 이 생명, 이 마음은 부처님에게서 온 것 모두가 불성시현(佛性示現)이다. 그러니 어둠이니 우울이니 겁약이니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어둠은 바로 밝음의 부재를 의미한다. 독립적 존재가 아니다. 어둠이란 것은 망견(妄見)이다. 모름지기 항상 깨우쳐서 정견(正見)을 세우라. 그러면 언제나 밝음이 가득할 것이다. 이 밝음이 만인의 본면목이다. 대호쾌활이 그의 표정이다. 부처님은「비로자나」— 즉 광명이 두루 비춰 일체처에 가득하다는 뜻이 된다.「아미타불」을「진시방무애광여래(盡十方無礙光如來)」라 하는데「무한 세계에 걸림 없는 대광명」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우리는 알 것이다. 진리의 본신이「빛」이라는 사실을—. 진리의 본신이 곧 우리의 본신이다. 그러할진대 우리의 마음은 본래로 밝게 빛날 수밖에 없게 되어 있는 것이다. 
  「어둠은 없는 것, 밝음만이 있다.」 부처님의 광명이 나의 생명이다. 우리는 항상 이 생각을 잊지 말고 우리 마음에서 일체 어둠을 소탕하자. 그리고 건강, 행복, 지혜, 자비, 용기, 성취를 마음속에 가득히 채우자. 이것이 불광이다. 이것이 대성취의 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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