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실한담] 향가(鄕歌)와 정토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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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실한담] 향가(鄕歌)와 정토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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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9.04.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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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옛부터 한나라의 시가는 그 민족의 마음을 진심으로 대변해준다. 민족어로서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한 민족이 겪어내는 역사의 정신과 공동의 체험은 그 보편성과 필연성에서 이질적인 것일 수 없다. 즉 한 민족의 고도한 정신적 표현으로서의 시가의 필연성은 시가표현에 의해서 대표되며 상징되고 집약되어진다. 표현의 필연성을 통한 그 시인의 정신과 사상의 자기집중은 곧 민족사상으로서의 자기표현을 결과한다. 시가는 바로 민족언어로서 형상화되어진 열의 표상임에 더욱 그러하다.

이에 민족의 마음을 이해하려면 어떤 것보다 시가를 이해함만 같지못하다. 그럼에 시가의 의미를 꿰뚫는 자는 필연적으로 민족의 심리학자이다. 만일 신라의 향가를 이해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그 시가의 특질을 아는 것이 될 뿐만 아니라 그 표현을 통해서 그들이 무엇을 구하고 호소하려 했는가를 듣게 된다. 나 또한 그 마음을 통찰해내는 심리학자이고 싶다.

 

Ⅱ. 향가의 ‘향(鄕)’은 ‘사뇌(詞腦) · 시뇌(詩腦) · 사내(思內) · 신열(辛熱)’의 한 가지인 ‘동천(東川)’’ · ‘동토(東土)’를 뜻하는 ‘사뇌’로서 곧 동방고유의 노래, 좁게 신라의 가요를 뜻하며 사뇌놀애 또는 사뇌가로서 불교를 국교로 삼았던 신라의 시가 또한 불교성을 띠게된 것은 당연지사이다. 그러기에 향가는 종교적 성격을 갖기도 한다.

종교란 영어로는 ‘Religion’이라한다. 라틴어 ‘Religion’에서 온 말로 ‘결합한다’ 또는 ‘외경(畏敬)한다’의 뜻을 내포한다. 즉 종교란 사람이 신과 더불어 결합하고, 신에 대하여 숭외경배 한다는 뜻이다. 그 의미는 동양에서도 비슷하다. 「은씨설문해자(殷氏設文解字)」에 따르면 ‘관위옥야 시위신야’라 한다. 즉 ‘관’자는 ‘옥’을 이르고, ‘시’는 ‘신’을 이른다. 그렇다면 이 ‘종(宗)’의 뜻은 세상에서 가장 높고 중심이 되며 근원이 되는것을 말함이 아닌가. 그 점에 종교란 으뜸가는 근원이 되는 절대자의 가르침이다. 그래서 사람은 그 절대자의 가르침에 외경하면서 결합되기를 염원하기에 이른다. 하면 향가는 세상에서 가장 높고 으뜸가며 중심이 되고 근원이 되는 붓다의 가르침에 귀의하고자 하는 노래(시가)로 여겨진다.

세상이 한 개의 역여(逆旅)라면 인생이란 거기 사는 나그네이다. 그 나그네의 삶이 고해화택과도 같다. 일언이폐지하여 유택우택(有宅憂宅) 유전우택(有田憂宅)의 인생은 우비고뇌(憂悲苦腦)로 봉철된 베짜기가 아닌가. 우비고뇌로 짜낸 인간, 무명번뇌로 얽힌 이 인간이 그대로 바로 고해화택임에 이 어찌 진시방최승업자(盡示方最勝業者)요 편지자(編知者)이며 색무애(色無碍)에 구세대비자(救世大悲者)인 붓다의 가르침에 따라 열반적정의 해탈피안의 이상향에 도달함을 염원치 않으랴. 그로부터 붓다에의 종교심을 발원케 된다.

그 점에서도 향가는 불교적 성격을 뚜렷이 한다. 그러기에 향가의 불교적 이해가 전제되어진다. 향가는 환상가요로서의 향가와 왕상시가로서의 향가로 나누어짐에 다같이 불교적 성격이 파악되어진다. 먼저 환상가요로서「서동요」「헌화가」「도솔가」와 「풍요」등 4수의 향가를 다루었다. 작자도 불승이고 그 노래 뜻에서도 불교의 흔적이 보이는 월명의 「도솔가」는 랑 · 불쌍융(郞·佛雙融)의 과정을 나타낸 것으로서 불교적인 성격이 있는 가요이다. 「서동요」와 「헌화가」및 「풍요」3수는 비록 그 제재가 불교적 윤리는 아니나 위의 것과 같이 불교적인 뜻으로 분석함으로써 신불에 대한 기구 또는 불교적 성격에의 종교시라 할만하다.

다음은 왕생시가로 「원왕생가」「제망매가」「찬기파랑가」「우적가」등은 석존의 교법 내용을 자종의 입지에서 해석, 그 취의를 시화한 시가들이다. 그럼에 개중엔 이승을 떠나 정토의 왕생을 얻고자 생사의 한계를 자각시키는 시가(원왕생가)가 있고, 서방정토에서 만날 것을 도를 닦으며 기다리겠다는 시가(제망매가)가 있는가 하면, 입산수도하던 차에 도적들의 위협에서 향가를 읊어주고 되려 그들을 감화시키는 지혜로운 걸승의 모습도 접하게 된다. 어디 그뿐이랴. 다음의 「천수대비가」는 더욱 우리의 가슴을 때린다.

무릎을 곧추며 두 손바닥 모으와 千手관음 전에 비옴을 든노이다! 千 손에 千 눈을 하나를 놓고 하나를 더옵기, ⁄둘없는 내라, 하나야 그으기 고치올러라⁄아으으, 내게 끼쳐주시면 놓뇌 쓰올 자비여 열마나 큰고!

이 설화의 주인공은 희명의 아이이다. 그 아이가 갑작스레 눈이 멀어졌다. 희명은 아들의 눈을 뜨게하기 위해 아들을 관음대비존 앞에 나가 이렇게 간절한 기도를 올리게 했다.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을 가진 대비관음께서 앞을 보지못한 나에게 하나라도 달라고 애원하는 천진한 어린아이의 애처로운 소원을 듣는다. 이 또한 관음신앙을 기조한 기원이 아닌가. 이처럼 향가엔 종교시가로서의 간절함이 짙다. 종교시가는 크게 다음의 둘로 나뉜다. 적극적 마술(positive majic)과 소극적 마술(negative majic)이 그것이다. 전자는 ‘이러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이러이러한 일을 해라’의 적극성을 보여준다. 예를 들면「구하구하(龜何龜何)」「수로부인」「천수대비가」가 이에 속한다. 후자는 ‘이러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이러이러한 일을 하지말라’이다. 예를 들면 월명의 「도솔가」융천의 「혜성가」등이다.

이와같이 향가의 의미 내용은 다양하다. 환상가요는 곧 ‘나(我)’를 버리고 타인에게 일체의 선근을 돌리고 중생제도의 방편적 취의에서 보살정신을 노래한 회시(廻施)선양의 문학으로 집약된다. 또 왕상시가는 중생들로 하여금 망념을 떨치고 붓다의 진리를 깨닫도록 촉구한다. 즉 망상을 떠나 진실의 세계를 추구케 한다면, 그 점에서 진실표백에의 문학인 셈이다. 그러기에 향가는 불교성을 안으로 간직한 불교문학의 정수를 이룬다.

 

Ⅲ. 하면 향가가 추구하려는 이상 세계는 어디일까. 목숨을 바쳐 귀의하려는 곳은 바로 붓다의 정토가 아닌가. 무량광 무량수불은 지금 여기에 계시며 법을 설하고 계신다. 그곳 사람들은 모두 괴로움을 모르고 오직 즐거운 나날만을 보내니 이를 극락이라고도 한다. 사람들은 그 아름다운 극락에서 붓다를 생각하고 법을 생각하며 사람들과의 화합을 생각한다. 오직 삼보귀의만을 생각하게 된다. 붓다의 나라는 공덕과 아름다운 장엄을 갖추고 있다. 왜 이 나라의 붓다를 무량광무량수불이라 하는가. 붓다의 빛으로 새 생명에 눈뜨게 된 사람들이 무량하기 때문이다. 그럼에 거기가 곧 붓다의 정토가 아닌가. 아미타불을 염하여 마음을 하나로 모아 동요하는 일이 없으면 그 사람이 임종하는 자리에 붓다께서 많은 성자를 거느리시고 영접나오시며 마음이 전도하는 일없이 평안히 정토에 태어나게 된다. 우리는 바로 그 정토를 목숨을 바쳐 염원한다. 그 곳이 우리의 영원한 고향이기 때문이다. 그럼에 향가 또한 그 정토를 염원함이 아닌가. 진정 그 정토로 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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