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신라, 33대 성덕왕 22년(A.D.723)에 김 대비(金大悲)스님<혹은 三法스님>은 어느 날 깊은 잠에서 깨어나 곰곰이 생각 끝에 커다란 모험을 결심하고 중국(唐)으로 건너간다.
이 때는 중국 선종(禪宗)의 육조혜능(六祖慧能)선사가 입적(713)한지 10년이 되는 해이다.
혜능선사가 입적하기전 이런 말을 남기셨다.
<“내가 죽은 후, 5~6년이 지나면 동방에서 한 사람이 나타나 나의 머리를 가져갈 것이다.” 하면서 게송(偈頌)을 지었다. “머리위로 어버이를 봉양하고, 입속에 밥을 구하네, 만(滿)의 난(難)을 만날 때는 양유(楊柳)가 관리(官吏)이다. (頭上養親 口裡須飧 遇滿之難 楊柳爲官)>
이러한 일이 있었을 때, 신라의 대비스님은 꿈을 꾸었던 것이다. ‘육조의 정상(頂相)을 흰눈이 덮힌 계곡, 꽃이 피어 있는 곳을 찾아 봉안하라’는 계시를 받은 것이다.
대비스님은 중국 홍주 개원사(開元寺)에 머물면서, 돈 2만냥을 주고 장 정만(張淨滿)으로 하여금 탑묘에 모셔있는 육조 혜능의 정상을 취하는데 성공하였으나, 그 고을의 현령 양 간(楊侃)과 자사 유무첨(柳無忝)의 수색으로 곧 잡혀서 육조의 제자인 영도스님에게 처분을 물었다.
그러나 대비스님은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해동에 육조 정상을 모시고 공양하려 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용서를 받아 육조 정상을 모시고 귀국한다.
귀국한 대비스님은 여러 곳을 물색 중 지리산 남쪽에 들어가 터를 잡고 옥천사(玉泉寺)를 창건하고 육조정상을 모셨다 한다.
현 쌍계사의 창건 설화는 이렇게 전하여 오고 있는 것이다. 현재의 사찰명은 신라 50대 정강왕(886~887)때에 한 고을에 같은 이름의 절이 두 개 있다하여 절 이름을 고쳤다. 문앞에 흐르는 두 개의 계곡에서 연유하여 쌍계사라 고치고, 최 치원(崔致遠)에게 쌍계석문(雙磎石門)이라 쓰게 하여 사찰의 입구에 있는 큰 바위에 새기게 한 것이 오늘날까지 전하여 오고 있다.
전설과 사실(史實)에 전하여 오는 이 사찰의 창건 유래에서 육조혜능 선사의 깊은 뜻이 이 땅에 묻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진감선사의 약전
쌍계사의 창건에 대하여 두가지 설이 있는 듯 하지만, 육조 정상을 모실 당시(723)에는 사찰의 규모가 작은 금당(金堂)만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진감혜소국사(眞鑑慧昭國師) 창건설의 46대 문성왕 2년(840)과 육조 정상을 모실 때와는 약 120년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
진감국사는 완산주(지금의 전주) 금마(金馬)에서 태어나(774년) 일찍이 부모를 여의었다. 속성은 최(崔)씨, 30세에 불법을 배우러 중국에 건너가 신감(神鑒)스님에게 득도 출가하였다. 36세에 숭산 소림사(少林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뭇사람들은 진감의 얼굴이 검다하여 흑두타(黑頭陀)라 불렀다. 중국에서 신라의 도의(道義)스님을 만나 같이 수행하다가 도의스님은 먼저 귀국하고 스님은 종남산에서 3년을 더 수행정진 하였다. 또한 종남산을 나와 저자거리에서 3년동안 짚신을 엮어 오가는 사람들에게 무상으로 주었다 한다.
56세(830년)에 귀국하면서 불교의식인 부처님을 찬탄하는 염불송(念佛頌 : 범패)과 차종자(茶種子)를 (이설도 있음) 들여왔다 한다.
상주 노악산 장백사(長栢寺)에서 10년동안 선(禪)과 교(敎)를 펼치니 배우는 이가 구름처럼 모였다 한다.
민애왕이 즉위하면서 스님의 법력을 흠모하여 국사(國師)로 청하였으나 응하지 않았다. 왕은 더욱 존경하여 혜조(慧照)라는 호를 내렸으나 뒤에 소(昭)라고 고쳐 불렀다.
스님은 지리산으로 거처를 옮기고 옥천사(玉泉寺)의 옛터에 사찰을 크게 짓고 육조의 영당(影堂)을 모셨던 것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어산구감(魚山龜鑑)을 집필하고, 이 일대가 차산지로 유명한 것은 스님의 유덕이다.
77세(884)에 옥천사에서 세연을 마치니 정강왕은 최치원에게 스님의 비문을 세우게 하고 사찰명을 쌍계사로 개명한 것이다.
세진을 씻는 곳
산이 높으니 계곡이 깊고, 바위가 있다. 거기에다 물소리 까지 있으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쌍계사 주변은 물론 이 사찰에 이르는 길은 세파에 찌든 잡념을 말끔히 지워버릴 만큼 경관이 아름답고 수려하며 또한 조용하다.
섬진강 줄기에 새로 포장되고 있는 도로를 지나면서 마음은 강심에 머물러 있는데 어느듯 쌍계사에 이른다.
행정구역이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지리산이다.
쌍계사 일원은 지방기념물 제21호로 지정되어 있듯이 역사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역대 조사 스님들의 수행처로서 국사암(國師庵)과 불일암(佛日菴)이 있고, 높이 60m의 불일폭포는 이 산중의 자랑이다.
주위 경관의 수려함에 예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문사(文士)들이 찾아와 수많은 글을 남겼다.
신라시대 최치원은 쌍계사에 머물면서 그의 친구에게 시(時) 한수를 적어 보냈다.
종일토록 머리숙이고 붓끝을 희롱하니<終日低頭弄筆端>
사람마다 입 다물어 맘속 말하기 어려워라<人人杜口話心難
진세를 멀리 떠난 건 즐거우나<遠離塵雖堪世喜>
풍정이 없어지지 않으니 어찌할꼬<爭奈風情未肯蘭>
개인 놀 단풍길에 그림자 엇갈리고<影鬪晴霞紅葉徑>
비오는 밤 흰구름 여울에 소리 연했다. <聲連夜雨白雲湍>
읊조리는 마음 경치를 대해 얽매임 없으니<吟魂對景無羈絆>
사해 깊은 기틀 도안(道安)을 생각하노라<四海深機憶道安>
오늘의 쌍계사
고려 조선조를 지나는 동안 벽안선사 등, 수차례의 중건 중수를 하였지만 계속되는 세월의 흐름은 많은 당우들이 퇴락되었다.
근년(1978년)에 오 고산(吳杲山)스님이 주지로 부임하면서 대대적인 중창불사로 가람을 일신하였다.
또한 육조 봉찬회를 매년 3월이면 보살계와 더불어 봉행하여 육조혜능의 선지(禪智)를 밝히고 있다.
경내의 문화재
진감선사대공탑비(국보 제 47호), 대웅전(보물 제 500호), 쌍계사부도(보물 제 380호),
또한 지방문화재로는, 5층석탑, 석등을 비롯하여 일주문, 팔상전, 명부전, 천왕문, 육조정상탑전, 나한전, 금강문, 불경경판, 마애불 등과 기타 부속건물이 쌍계사의 위용을 말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