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학계에 크게 기여한 원측
원측(圓測)법사는 신라의 왕족으로 진평왕(진평왕)35년(613)에 당시의 서울 경주에서 태어났다.
일찍이(현존 기록에서는 3세라고 있음)출가하고 15세에 당나라로 건너갔다. 당나라에 도착한 그는 당시 중국의 이름있는 고승들을 찾아 배움을 구하였다.
거기에서 원측스님은 당시 당나라의 대표적인 학자로서 섭대승론(攝大乘論)의 대가였던 법상(法常 ; 567~645)과 승변(僧辯 ; 568~642)의 두 법사에게서 주로 경론(經論)을 공부하였다. 그는 남달리 천성이 총명하였으므로 비록 수천 만언(數天萬言)이라도 한번 들으면 잊어버리는 일이 없었다.그로부터 오래지 않아 태종(太宗)황제의 배려로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장안(長安)의 원법사(元法寺)에 머물게 되었다.
“원측스님의 제자 중엣 서명사주 자선법사와 대천복사 대덕 승장법사 등이 그 유해 일부를 보함 석곽에 담아서 스님이 생전에 자주 왕래하였던 종남산의 풍덕사동쪽 고개마루 위에 따로 무덤을 모셨다.”
그 곳에 머물면서 원측스님은 소승불교의 논장(論藏)인 아비담(阿毘曇)과 성실론(成實論)과 구사론(俱舍論). 비바사론(毘婆娑論)등을 열람하고, 대승의 경론 및 고금(古今)의 장소(章疏)를 모두 다 통달하였다. 그가 33세 되는 정관(貞觀)19년 (645)에 유명한 삼장법사(三藏法師) 현장(玄奘 ; 602~664)스님이 인도에서 돌아왔는데, 그때 원측스님은 미리 현장법사가 돌아오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중국의 불교 역사에 있어서 현장법사가 남긴 업적은 매우 큰 것이었다. 그는 인도에의 어려운 여행길에서 중인도의 나란타사(那爛陀寺)에 이르러 대학자이며 고승인 계현(戒賢)스님에게 유식학(唯識學)을 배웠고, 승군론사(勝軍論師)등 당대 석학 대덕을 만나 불교학문의 깊이를 더하였다. 부처님의 끼치신 발자취를 모두 순례 참배(巡禮參拜)한 것은 물론이고 불교와 관련있는 인도 서역의 여러 지방을 두루 거쳐서,당나라를 출발한지 17년만에 범어원전(梵語原典) 657부를 가지고 돌아왔다. 태조왕제의 칙명의 의해 국가적인 시설로 마련된 번경원(翻經院)에서 그는 경전 번역 사업을 시작하였으며, 600권 대반야경(大般若經)을 비롯하여 76부 1347권의 많은 경전을 번역하였다. 그와 같이 현장법사는 번역을 많이 한 것도 유명하지마는 그 번역 자체가 훌륭하여 그보다 이전의 번역을 구역(舊譯)이라 하고 그이 변역을 신역(新譯)이라 일컬었으며, 중국 역경사상(譯經史上) 구마라습(鳩摩羅什) 법사와 아울러 2대 역성(二大譯聖)이라 불리운다.
그러한 현장법사가 원측스님을 한번 보고는 크게 인정하였으며, 유가사지론(諭伽師地論)과 성유식론(成唯識論)이 번역되었을 때 원측스님으로 하여금 강의하게 하였다. 그 밖에도 현장스님이 번역한 대승 소승이 많은 경론들을 모두 이해하였다. 그뒤 원측법사는 황제의 칙명의 의하여 서명사(西明寺)의 대덕(大德)이 되었다.
이 서명사에 머물면서 그는 해심밀경소(解深蜜經疏)10권 등의 많은 저술을 하면서 당시 중국의 불교 대흥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러나 원측스님은 원래 성품이 산수(山水)를 즐기고 조용한 것을 좋아하였으므로 서명사를 떠나 종남산(終南山)의 운제사(雲際寺)로 가서 머물었다. 그러다가 다시 그 절에서 30여리 떨어진 한적한 곳에서 조용히 마음을 닦으며 8년을 지냈다.
“원측스님은 원래 성품이 산수(山水)를 즐기고 조용한 것을 좋아하였으므로 서명사를 떠나 종남산(종남산)의 운제사(운제사)로 가서 머물었다.”
그 때 서명사의 스님들은 원측법사가 다시 돌아와 서명사의 대중들을 지도해 줄 것을 간절히 요청하였다. 하도 그들의 청이 간절하였으므로 그는 한적한 곳을 떠나 다시 서명사로 갔다. 그 곳에서 성유식론을 강의하는 한편, 인도<中天竺>의 삼장법사인 지바하라(地婆訶羅)와 제운반야(提雲般若)의 역장(譯場)에 증의(證義)가 되어 경전 번역에 큰 힘이 되었다. 그는 여섯 나라말<大國語>에 통달하였다고 할만큼 외국어에 능통하였으므로 경전을 번역하는 일에도 중요한 책임을 맡았던 것이다.
원측법사는 서명사에서 오래 머물었을 뿐 아니라 거기에서 강의<講學>와 저술을 많이 함으로써 그의 학문을 크게 이룰 수가 있었다. 그래서 그의 교학을 서명학파(西明學派) 또는 서명유식(西明唯識)이라 일컫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그의 사리탑명(舍利塔銘)에도 서명사대덕 원측법사(西明寺大德圓測法師)라 하여 있다.
그와 같이 원측법사와 인연이 깊은 서명사는 당나라의 서울 장안에 있었던 절인데, 당 고종(唐高宗)의 칙명에 의하여 현경(顯慶) 3년(658)에 인도의 기원정사를 본따서 세웠다고 한다. 처음 현장법사가 감주(監主)로 있은 것을 비롯하여, 도선(道宣) · 신태(神泰) · 회소(懷素) 등 50여 명의 당대 고승들이 차례로 머물었던 불교 학문의 중심도량이었다. 그 50여 명의 당나라 고승중에는 물론 원측스님도 들어 있다.
나중에 그는 다시 칙명으로 서명사를 떠나 당나라의 동도(東都) 인 낙양(洛陽)으로 가서 주로 그 곳의 불수기사(佛授記寺)에 머물게 되었다. 불수기사는 측천무후(則天武后)의 수공년간(垂拱年間 ; 685~689)에 세워진 큰 절이었는데, 당대의 유명한 보사유(寶思惟) · 보리류지(菩提流支) · 의정(義淨) · 실차난타(實叉難陀) 등의 여러 삼장법사가 머물면서 경전을 번역하고 장소(章疏)를 편술하였던 곳이다.
그가 이 곳을 중심으로 하여 강의하고 있었던 83세 되는 해(證聖元年, 695)에 저 유명한 의정(義淨)법사가 20여 년 간의 인도 구법여행을 마치고 낙양에 도착하였다. 그로부터 의정스님은 이 불수기사에서 경전번역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그해(695)에 번역을 착수한 80권 신역(新譯) 화엄경을 실차난타삼장과 보리류지삼장 등과 함께 시작하였었다. 아마도 원측법사 역시 그 신역화엄경의 번역을 돕기 위해서 불수기사로 칙명에 의해 갔던 것 같다.
우전국(于闐國)스님인 실차난타 삼장이 가지고 온 신역 화엄경의 범어원본<梵本>을 그 때(695) 번역하기 시작하여 4년 뒤인 성력(聖歷)2년 (699)에 완성을 보게 되었다.
“원측법사의 제자에는 도증(道證) · 승장(勝莊) · 자선(慈善)의 세 사람이 뛰어났는데, 도증스님과 승장스님은 신라사람이다.”
그러나 원측스님은 그 번역이 시작된 그 이듬해(696,萬歲通天元年) 에 불수기사에서 84세의 생애를 마쳤다.
일찍이 본국 신라에서는 국왕이 원측스님의 귀국을 당나라 조정에 간청하였었다. 그러나 당시 당나라 천하를 마음대로 움직였던 측천무후(聖神皇帝라고 하였음)가 보내어 주지 않았으므로 그는 끝내 조국 신라로 돌아가지 못하였으며, 끝내 이국땅에서 열반에 들었던 것이다.
그가 그 해(696,신라 孝昭王5 년) 7월22일에 세상을 떠나자 용문 향산사(龍門香山寺)의 북곡(北谷)에 다비하고 곧 백탑(白塔)을 세웠다. 그러나 장안에 있는 원측 스님의 제자 중에서 서명사주(西明寺主) 자선(慈善)법사와 대천복사대덕(大薦福寺大德) 승장(勝莊)법사 등이 그 유해 일부를 보함 석곽(寶函石槨)에 담아서 스님이 생전에 자주 왕래하였던 종남산의 풍덕사(豊德寺)동쪽 고개마루 위에 따로 무덤을 모셨다. 그리하여 그 무덤 위에 탑을 세웠는데 탑의 기단(基壇)안에 사리(舍利) 49개를 봉안하였다. <宋復撰, 大周西明寺故大德圓測法 師佛舎利塔銘井序. 崔致遠撰, 故翻經證意 大德圓測和尙 諱日文 등>
원측법사의 사리탑명(舍利塔銘)에는 스남의 (諱) 곧 법명이 문아(文雅)이며, 자(子)가 원측이라고 있다. 문아라는 법명이 부르기가 원측이라는 자보다 못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법명 아닌 자가 법호나 법명처럼 불리워져 있다는 것이 좀 이상하다고 하겠다. 법명이 있는데도 사후에 자를 쓰는 예는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원측스님은 당나라 땅에서 다음의 저서를 남겨 놓았다.
般若心經蔬 1권(지금 전하지 않음)
般若波羅密多心經 1권 (현재 전함)
仁王若經疏 6권 (현재 전함)
無量義經疏 2권 (전하지 않음)
無量壽經疏 3권 ( 〃 )
阿尾陀經疏 1권 ( 〃 )
彌勒上生經略贊 2권 ( 〃 )
解深密經疏 10권 (현재 전함)
俱舍論釋頌鈔 3권 (전하지 않음)
廣百論疏 10권 ( 〃 )
成唯識論疏 20(10)권 ( 〃 )
成唯識論別章 3권 ( 〃 )
二十唯識論疏 2권 ( 〃 )
六十二見章 1권 ( 〃 )
百法論疏 1권 ( 〃 )
觀所緣緣論疏2권 ( 〃 )
大因明論疏 2권 ( 〃 )
因明正理門論疏 2권 ( 〃 )
喻伽論疏 권수 모름 ( 〃 )
이 중에서 해심밀경소(解深密經疏)는 서장대장경(西藏大藏經 ; 影印北京版目錄 No. 5517 · 東北目錄 No. 4016)에 수록되어 있다. 그의 교학이 티베트지방에까지 영향이 미쳤음을 알 수가 있다.
송 고승전(宋高僧傳, 券 4)에는 신라의 고승 여러 명을 전하고 있는데 모두 그 제목에 신라 스님임을<唐新羅國順璟傳, 新羅國義湘傳, 新羅國黃龍寺元曉傳 등> 밝히고 있다. 그러나 유독 원측법사만은 신라스님임을 밝히지 않고 <唐京師西明寺圓測傳이라 하여> 석 원측은 그 씨족을 알 수가 없다. 釋圓測者 未詳氏族也> 라고 시작되어 있다. 어릴 적부터 명민(明敏)하여 혜해(慧解)가 종횡(縱橫)하였던 그는 현장삼장이 자은(慈恩) 규기(窺基)법사에게 유식론과 유가론(諭伽論)을 은밀히 강의하였을 때, 문지키는 사람을 매수하여 몰래 숨어서 도청(盜聽)하고는 앞질러 대중에게 강의해서 발표해 버리는 얌체인 것처럼 전해지고 있다. 아마 현장삼장에게 유가 유식학의 정통을 이었다고 알려진 자은대사 규기와 학설이 달랐으므로 중국 토박이인 자은파(慈恩派)에서 모략하였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여겨진다.
원측법사의 제자에는 도증(道證) · 승장(勝莊) · 자선(慈善)의 세 사람이 뛰어났는데, 도증스님과 승장스님은 신라사람이다.
자선법사 위에 당나라 고승으로 원측스님의 학문계통을 이은 인물로는 담광(曇曠)이 있었다고 한다. 담광법사는 서명사에 머물면서,대승기신론광석(大乘起信論廣釋) · 대승기신론약술(大乘起信論略述) · 대승백법명문론개종의기(大乘百法明門論開字義記) · 대승입도차제개결(大乘入道次第開決)등의 저술을 남겼다고 한다. ″
도증과 승장 두 스님에 관해서는 장을 달리하여 살펴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