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살로 살아가면서 실천하는 여섯 가지 덕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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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로 살아가면서 실천하는 여섯 가지 덕목
  • 불광출판사
  • 승인 2014.02.13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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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로 살아가면서 실천하는 여섯 가지 덕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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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반야.
불교도라면 누구나 준수하고 추구해야 할
여섯 가지 덕목이다.
보시는 남에게 베푸는 것, 지계는 윤리
도덕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것, 인욕은
참는 것, 정진은 부지런히 힘쓰는 것,
선정은 고요히 앉아 마음을 모으는 것,
반야는 무상無常과 무아無我등을
통찰하는 지혜다. 그런데 이런 덕목들에
‘공성의 조망’과‘자비의 감성’이
함께 하면‘보시바라밀, 지계바라밀...
반야바라밀’의 육바라밀로 승화한다.
대승 보살의 실천덕목들이다.
‘바라밀’은 범어 빠람이따Pa-ramita-를 음사한
바라밀다波羅蜜多를 줄인 말이다.
‘빠람Pa-ram’은‘저 멀리’를 의미하고
‘이따ita-’는‘감’을 의미하기에,
‘저 멀리 열반의 언덕으로 건너 감’이라는
의미에서‘빠람이따’를‘도피안度彼岸’
이라고 한역하기도 한다.

누구나 성불할 수 있다
소승불교의 수행목표는 아라한이었다. 아라한이 되는 것, 다시 말해 깨달음을 얻는 것은 출가한 스님이나 음욕을 끊은 재가불자와 같이 극소수의 수행자에게나 가능한 목표였다. 대부분의 불자들은 스님에게서 가르침을 듣고, 시주물을 올림으로써 복덕을 쌓는 생활을 하기에 불교신행의 중심에 있지 않았다. 그러나 대승의 시대가 되어 불교신행의 목표가 성불成佛로 상승하면서 출가든 재가든, 인간이든 천신이든 축생이든 살아있는 것들은 모두 불교신행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를 모아 놓은『본생담(Ja - taka)』에서는 전생의 부처님을‘보살(Bodhisattva)’이라고 부른다. 보살이란‘깨달음(Bodhi)을 추구하는 생명체(Sattva)’라는 뜻이다. 『본생담』의 보살은 온갖 생명체로 태어나 수없이 윤회하면서 자리自利와 이타利他, 즉 상구보리上求菩提하화중생下化衆生의 삶을 살아간다. 상구보리는“위로는 깨달음을 추구한다.”는 의미로 자신의 번뇌를 제거하면서 지혜를 추구하기에‘스스로(自)에게 이로운(利) 삶이고, 하화중생은“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한다.”는 의미로 다른 생명체를 도우면서 자비를 실천하기에 남을(他) 이롭게(利) 하는 삶이다.
『본생담』에서‘보살’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신前身, 한 분만을 지칭하는 고유명사였는데, 대승의 시대가 되자 보통명사로 그 외연이 확대되었다. 누구든 부처님의 전생과 같은 삶을 살 경우 언젠가 성불할 수 있다는 추론이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동참하는 중생의 범위와 수행의 목표가 소승과 비교할 바가 아니기에 ‘큰 수레’라는 의미에서 대승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육바라밀은 성불의 그 날까지 보살로 살아가면서 실천하는 여섯 가지 덕목인 것이다.
단순한 보시는 남에게 그냥 베푸는 것이지만, 보시바라밀은‘보시’라는 법이 공하다는 통찰과 다른 생명에 대한 자비심이 함께 하는 베풂이다. 이 때의 자비심을 보리심이라고 부른다. 보리심이란‘깨달음을 얻겠다는 마음’, 다시 말해 ‘성불하겠다는 마음’이다. 이러한 보리심을 내는 이유는 부처가 되어야 보다 많은 중생을 제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수많은 세월을 윤회하면서 보살로서 이타행을 실천해야 복덕을 갖춘 부처가 될 수 있고, 부처가 되어야 그 복력으로 인해 보다 많은 중생이 그 가르침을 따르기 때문이다. 따라서‘성불하겠다는 보리심’은 그대로‘중생에 대한 무한한 자비심’을 의미한다. 또 보시에 공성의 통찰이 함께 하지 않으면‘깨끗하지 못한 보시’가 되기 쉽다. ‘깨끗하지 못한 보시’란‘어떤 과보를 받기 위해서 보시하는 것’이다.
이 때 말하는 과보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지금 받는 과보이고 다른 하나는 나중에 받는 과보다. 보시를 한 다음에 칭찬을 받거나 존경을 받거나 사랑을 받는 것은‘지금 받는 과보’에 속하고, 보시의 공덕으로 내생에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은‘나중에 받는 과보’다. 그러나 이렇게 과보를 바라고 이루어지는 보시는 상거래와 같다. 다른 지역으로 멀리 간 장사꾼이 비록 갖가지 물건을 가지고 가서 그 지역 사람들에게 많은 이득을 주기는 하지만, 이는 그 사람들을 가엽게 여겨서가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그의 행동을 깨끗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는것이다.『 백론百論』의가르침이다.
진정한 보시인 보시바라밀에서는 베풂을 통해서 물건도 버리지만(捨), 베풀었다는 마음도 버린다.『금강경』에서 가르치는‘무주상無住相보시’가 바로 보시바라밀이다. 티내지 않는 베풂이다. 남에게도 티가 나지 않지만, 자신에게도 베풀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대반열반경』에서는 이런 베풂을‘다친 아들을 돌보는 어머니의 보살핌’에 비유한다. 다친 아들을 돌보는 어머니에게 베풀었다는 생각이 날 리도 없고, 흐뭇한 기분이 들 리도 없고, 보답을 바라는 마음이 있을 리도 없다. 안쓰러운 마음에서 계속 보살필 뿐이다. 보시하는 자, 보시를 받는 자, 보시하는물건의세가지에대한분별이사라진,‘ 삼륜청정三輪淸淨의 보시’다. 보시라는 법에 집착하지 않는 법공法空의 통찰이다. 공성과 자비는 동전의 양면이다.

선善함, 그 자체가 되기 위한 실천
지계와 지계바라밀은 다르다. 지계는 선과 악을 구분한 후 계를 지키는 것이지만, 지계바라밀에서는 선과 악의 구분이 사라진다. 선과 악을 구분하는 가치판단을 상실했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나 선하기 때문에 선과 악의 구분조차 모르는 지계의 실천이다. 공자는 나이 40세에 불혹, 50세에 이순, 60세에 지천명, 70세에 종심從心의 경지가 되었다고 한다. 마지막의 종심이란‘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의앞글자다.“ 마음에서욕구하는바가세속적윤리, 도덕의 잣대를 넘어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불교적으로 풀어서 말하면‘계율을 어기는 마음’이 눈곱만큼도 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내 속을 남에게 다 보여주고 살아도 부끄러울 것이 전혀 없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일거수일투족은 물론이고 마음 속속들이‘선善함’그 자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과 악을 구분하고서 악을 멀리 하려는 마음을 낼 필요가 없다.『 금강경』에서는이를“법도버리는데, 하물며비법非法이랴.”라고표현한다.“ 선도행하지않는데, 하물며 악을 행하겠는가?”라는 뜻이다. 진정으로 선한 사람은 선을 행한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지계라는 법에 대해 분별을 내지 않는 지계바라밀의 경지다. 인욕忍辱은 참는 것이다. 주로 모욕이나 핍박을 참기에‘욕辱’자를 덧붙여 한역했지만, 단순히‘참음’을 의미하는 산스끄리뜨어 끄샨띠Ks.a - nti의 번역어다. 인욕을 실천할 때 우리는 모욕이나 핍박은 물론이고 칭송이나 아첨도 참아야 한다. 모욕이나 핍박을 참기는 쉽다. 성인들의 전기를 통해 익히 알고 있는‘훌륭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칭송이나 아첨은 참기가 쉽지 않다. 누가 나를 칭송하면 입이 벌어지고 흐뭇한 마음이 솟는다. 인욕과 인욕바라밀은 다르다. 인욕은 단순히 참는 것이지만, 인욕바라밀은 참는다는 생각 없이 참는 것이다. 참아도 힘들지가 않다. 분노와 교만심이 솟구치는데 억지로 참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이 허공과 같이 비었기에 참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참아도 참는다고 할 것도 없다. 마치 무골호인과 같다.
“착한 사람이 암에 잘 걸린다.”는 속설이 있다. 마음 속에서는 분노와 원망이 들끓는데, 심지가 약하거나 힘이 없어서 억지로 참기 때문이다. 진짜 착한 사람이 아니다. 진짜 착한 사람은 모욕을 당해도 전혀 화가 나지 않기에 참을 것도 없다. 다만 악업을 짓는 상대가 안쓰러울 뿐이다. 육바라밀의 네 번째 덕목인 정진바라밀 역시 마찬가지다. 단순한‘정진’은 부지런한 것인데, 정진바라밀은 항상 부지런하게 살아도 힘이 들지 않는 것
이다. 정진이랄것도없기때문이다.‘ 40대과로사過勞死’라는 말이 가끔 신문에서 눈에 띈다. 너무 많은 일을 하다가 심장마비로 돌연사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한 번에 하나의 일밖에 할 수 없다는 점을 통찰하고서 매 순간 앞에 놓인 일에 전념할 때, 크게 힘들다는 생각 없이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항상 부지런하고 참으로 많은 일을 하고 살아도 전혀 힘들어 보이지 않는 정진바라밀의 삶이다. 선정禪定은 지止라고 번역되는 사마타S、amatha와 관觀이라고 번역되는 위빠사나Vipassana-가 함께 하는 지관止觀의 수행이다. ‘정려靜慮’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가부좌 틀고 앉아서 마음을 모으고‘곰곰이 생각하는것’,‘ 가만히관찰하는것’이다. 그러나걷든서든 앉든 눕든 내가 경험하는 모든 것을 가만히 관찰하고, 곰곰이 생각할 때‘선정바라밀’이 된다. 행주좌와行住坐臥가 모두 선이라는 자각 하에 선을 닦는 것이다. 지혜를 의미하는 산스끄리뜨어 쁘라즈냐Prajn~a -를 음사하여 반야般若라고 쓴다. 빠알리어로는 빤냐Pan~n~a - 다.‘ 무상無常, 무아無我, 고苦’나‘고집멸도의사성제’등에 대한 통찰이다. 그리고 이런 반야에‘법’들조차 실체가 없다는 통찰이 함께 할 때 반야바라밀이 된다. 예를 들어“자아가 없다.”는 무아에 대한 통찰은 반야일 뿐이지만, 자아를 이루고 있는 구성 요소인‘색, 수, 상, 행, 식’의 오온조차 공하다는 통찰이 함께 하면 반야바라밀이 된다. 요컨대 아공我空과 법공法空모두에 대한 통찰을 반야바라밀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김성철.
동국대 경주캠퍼스 불교학과 교수. 서울대 치과대학을 졸업하고 동국대 대학원 인도철학과에서 철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승랑』,『 불교초보탈출100문100답』,『 중론』,『 김성철교수의 불교하는사람은...』등10여권의저서와번역서,「 용수의 중관논리의기원」,「 역설과중관논리」등60여편의논문이 있다. 제6회 가산학술상(1996), 제19회 불이상(2004), 제1회 <불교평론> 올해의 논문상(2007)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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