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법회 | 법회의 역사와 의미
법회法會는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펼친 것에서 시작하여, 뒤에는 선지식이 수행자나 신도를 모아놓고 강설하는 의식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그 후 불교의 발전과정에서 생겨난 불사佛事, 재회齋會, 그리고 법요法要 등의 행사들이 포함되어 그 의미가 훨씬 폭넓게 확장되었다. 불교가 인도를 넘어 여러 나라에 전래된 이후에는 각 나라의 문화와 결합하고 군주와 민중의 바람에 부응하면서 다양한 법회 형식들이 나타나 고유의 형식으로 발전되었다.
| 초전법륜부터 이어져온 법회의 역사
인도불교에서 법회의 효시는 부처님께서 5명의 수행자에게 처음 법을 설한 초전법륜이다. 그 후 재가불자가 귀의하면서 사부대중이 형성되자 이들을 중심으로 법을 설하는 법회가 설행되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은 재가불자들은 출가하여 교단의 중요 인물이 되었다. 부처님의 십대제자 중 해공제일解空第一 수보리는 기원정사를 기증한 수닷타 장자의 아우 수마나의 아들이다. 기원정사가 낙성되던 날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출가하였다. 서인도 아반티국 왕사의 아들이었던 논의제일論議第一 가전연도 부처님을 만나고 싶다는 왕명을 전하러 갔다가 설법을 듣고 출가하였다. 이처럼 설법은 부처님 재세 시부터 법회의 중요한 요소였다.
인도불교의 법회는 초기불교와 부파불교를 거치면서 다양하게 발전되었다. 율장에 전해지고 있는 법회를 보면 먼저 부처님의 탄생과 깨달음을 기념하는 법회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부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법회인 불생일대회, 보리수 아래 금강좌에서 정각을 깨친 것을 기념하는 보리대회, 그리고 초전법륜을 기념하는 전법륜대회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출가를 기념하는 법회도 전해지고 있다. 삭발하면서 정계頂髻(머리카락)를 자른 것을 기념하는 반사바슬회, 다시 머리털이 자란 것을 기념하는 사바슬회, 일반인들이 정계를 깎는 것을 축하하는 이월회二月會와 성년을 기리는 입사회入舍會 등이 있었다.
대승불교 시대에도 법회는 지속되었다. 『대승이취육바라밀다경』은 무상보리에 들어가는 열 가지 훌륭한 법 가운데 여덟 번째로, 언제나 법보시를 즐기어 큰 법회를 베푸는 것임을 적고 있다. 7세기 중엽 현장이 쓴 『대당서역기』에서는 대승불교 시대 인도불교의 법회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가루 향을 진흙과 섞어 높이 5~6(약 15~18cm)촌 정도 되는 작은 솔도파(率堵婆, 탑을 일컫는 범어 ‘스투파stupa’의 음차)를 만들어 경전의 문구를 써서 그 속에 넣어 두는 것을 법사리法舍利라고 불렀다. 이것이 만들어지면 모든 승가 대중을 청하여 법회를 열어서 그것을 경축하였다고 한다.
| 국가적 차원에서 장려했던 동북아시아의 법회
인도불교와 달리 중국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불교를 수용했기 때문에 법회도 국태민안을 위한 방향으로 설행되었다. 처음 보이는 법회는 후한 영제 때인 180년 낙양 불탑사에서 설행한 재회齋會였다. 이때 천자는 불화를 걸고 향을 사루며, 꽃과 등불로 장엄하고는 스님들에게 공양을 베풀었다. 이런 법회는 초청하는 스님의 수에 따라 천승회千僧會, 만승회萬僧會 등으로 불렸다. 중국에 불교교단이 형성되면서는 부처님의 탄생이나 성도 등을 기념하는 법회가 개설되었다. 불강탄회佛降誕會, 성도회成道會, 그리고 열반회涅槃會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중국에서 법회의 기본형식은 선지식이 법을 전하는 것이었다. 양나라 때 혜교가 지은 『고승전』을 보면, 범어 경전을 한역한 것으로 유명한 인도 출신 스님 구마라집이 구자국에 오자 비구니가 된 왕녀 아가야말제阿軻耶末帝가 그의 법문을 듣고 뛸 듯이 기뻐하였다. 이에 다시 큰 모임을 마련하고 대승 경전의 심오한 이치를 들려줄 것을 청하였다. 구마라집은 이 법회에서 모든 현상이 공하여 내가 없음을 설하였고, 모인 청중들은 지나간 일을 돌이켜 생각하여 슬프게 느끼며, 깨달음이 뒤늦었음을 한탄해 마지않았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경전의 명칭에 따라 개설된 법회도 많았다. 불교를 수용하는 입장에서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경전은 매우 귀중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각종 경전을 강설하는 법회는 경전의 이름을 붙이는 것이 상례였다. 『화엄경』을 강설하면 ‘화엄회’, 『법화경』을 강설하면 ‘법화회’였다.
불교가 중국의 생활에 영향을 미치면서 생겨난 법회도 있다. 505년 양무제가 금산사에서 처음 시행한 수륙회水陸會는 음식을 마련하여 물과 땅에 사는 중생들을 공양하는 법회였다. 그리고 농산물이 순조롭게 자라기를 기원하는 청묘회靑苗會, 가뭄이 그치고 비가 내리기를 기원하는 기우법회祈雨法會, 오랜 장마가 그치기를 기원하는 기청법회祈請法會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중국은 불교가 전래되기 이전 유교사상이 강한 나라였다. 그런 유교적 관점에서 출가수행은 충효에 어긋나는 행위로 많은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불교는 그런 시각을 희석시키기 위해 『부모은중경』을 제작하는 한편 부모에 대한 효심을 습합한 법회를 성대하게 설행하였다. 그것이 매년 7월 15일 해제일에 불법승 삼보에 공양함은 물론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는 우란분회盂蘭盆會이다.
한국의 법회는 삼국시대부터 있었다. 인왕호국법회, 금광명경법회, 그리고 점찰법회와 같이 국가의 안녕과 개인의 신앙적 실천이 주로였다. 이런 법회가 고려시대가 되면 종류와 개설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하였다. 그런 법회는 법석法席, 대회大會, 도장道場, 재齋 등 여러 가지 명칭으로 대략 70여 종이 행해졌으며, 그 가운데 가장 많이 실시된 것은 연등회, 소재도량, 인왕도량, 팔관회였다. 왕실과 지도층, 그리고 민중들은 이런 법회를 통해 불교적 통치이념과 함께 현실적 이상을 성취하게 하는 기대감을 키웠다. 그리고 상하계층이 모여 즐기고 단합하면서 생긴 일체감은 불교의 대중화와 함께 국민적 신앙으로 발전을 거듭했다. 그리고 행사에 사용되었던 의례와 음악은 고려시대의 불교문화로 발전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숭유억불의 배경 속에서 만일염불회와 같이 서민들의 생활과 내세적 신앙관이 조화될 수 있는 대중적 법회가 설행되었다. 이 법회는 날마다 아미타불을 만 번씩 염불하는 것이 주된 일정이지만 중간에 『화엄경』을 강의하거나 백일기도, 가사불사 등 다양한 불교행사가 병행되었다. 대중들은 이런 법회를 통해 현실의 고통을 없애고 보다 나은 미래로의 희망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에 사회, 경제적으로 빈곤을 겪던 기층민들의 귀의가 많았다.
| 법회의 수승함과 공덕, 그리고 환희심
한국불교에서 현재와 같은 법회가 설행된 것은 근대였다. 일본불교의 유입과 함께 서구 종교의 선교활동을 지켜본 조선왕조는, 그들에게 예속되지 않기 위해 우리 사회에 뿌리 깊게 존재하고 있는 불교를 보호하고 발전시키려 하였다. 그런 인식은 불교의 국가적 관리로 이어져 흐트러진 교단을 정비하고 격변하는 현실에 적응할 수 있도록 조직을 개편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1899년 대본산 원흥사가 창건되었다. 1911년 11월 1일 이후부터 다음해 3월 초까지 지방 각 사찰의 유명한 법사들을 초청하여, 열반회 개최를 시작으로 다양한 법회와 포교활동들이 연이어 열렸다. 그 후 1913년 9월 선교양종포교당으로 명칭을 바꾼 원흥사는 매주 토요일마다 남녀신도들을 모아서 불교의 진리와 도덕을 강연하는 정기적인 법회를 개최하였다. 이런 법회 형식은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져 한국불교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기본형식으로 정립되었다.
법회는 진리를 배우는 자리이다. 많은 경전들은 법회의 수승함과 공덕을 전하고 있다. 『법화경』에 “여러 경로로 전해 들어도 그 복이 헤아릴 수 없이 많거늘, 하물며 법회에서 처음으로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그에 따라 환희심을 느낀 사람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는 내용은 법회의 중요성을 잘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종교는 믿음에서 시작된다. 불교 역시 그 가르침의 세계를 믿고 실천함으로써 열반에 이를 수 있음을 확신하는 데서 시작한다. 그런 의미에서 법회에 참석하여 가르침을 배우는 일은 불자의 기본이 된다. 그런 기본적인 법회 참석에는 다음과 같은 자세가 필요하다. 법을 들을 때는 자기의 사견을 버려야 한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에 집착하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법회에 참석할 때는 마음을 허공같이 맑게 하고 비워두어야 부처님의 경계를 알게 된다”는 『화엄경』 ‘여래출현품’의 가르침은 여러 가지를 시사한다.
김경집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를 받았다. 군법사로 복무한 후 성균관대, 중앙승가대, 동국대학교 불교학과에서 강의를 했으며 현재 위덕대학교 불교학부 겸임교수를 맡고 있다. 한국불교학회 이사이자 보조사상연구원 연구위원으로도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한국 근대불교사』, 『역사로 읽는 한국불교』 등 10여 권을 썼으며 근현대 불교와 관련한 60여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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