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僧)진표가 산을 내려올 때 남녀가 머리를 풀어서 진흙을 덮고, 옷을 벗어서 길에 깔고, 방석 담요를 펴놓고 발을 밟게 하고, 화려한 자리와 아름다운 요로 구덩이를 메우기도 하였다. 진표는 정성되이 인정을 쫓아서 일일이 밟고 갔다.”
당나라 개국 시부터 서기 980년까지 당·송의 고승 533인을 기록한 송나라 때의 『송고승전』에 실린 진표 율사의 내용이다. 특이하게도 988년 편찬한 이 책에는 진표 율사를 굳이 백제스님이라고 표기했다. 진표 율사는 백제 멸망 뒤 약 50년 뒤에 태어나 통일신라의 스님으로 살았음에도, 백제의 스님으로 표기가 된 점은 여러 배경을 짐작케 한다. 금산사 창건은 계율 중시의 미륵신앙이 성행했던 백제 법왕 때로 알려져 있고, 진표 율사 때 비로소 중흥기를 맞는다. 혜덕왕사에 이르러서는 현재의 규모를 훨씬 능가하는 대가람을 형성한다.
보제루를 지나 마당에 들어서는 순간 잠시 모악산 중심에 서 있는 듯한 착각을 한다. 삼층의 장엄한 미륵전이 모악산 주봉을 압도하고 있는 데다, 비슷한 높이로 자리한 방등계단의 당당한 위엄이 더해져 오기 때문이다. 통도사 금강계단이 출가 수행자에게 계를 내리는 자리라면, 금산사 방등계단은 사부대중에게 열려 있는 평등의 계단이다. 그 배경에는 역시 진표 율사가 있다. 진표 율사가 출가하고 수행한 곳은 백제가 나당연합군과 맞서 최후까지 저항했던 지역이다. 스님이 미륵보살에게서 『점찰경』을 받은 불사의방(不思議房)은 백제군의 최후 거점이었던 개암사 우금산성이 지척인 곳이다. 백제가 패망하고 100여 년이 지나지 않아 유민의 후손이 큰스님이 되어 미륵 도량에 돌아와 법석을 펴니,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따르고 추앙했을 법하다. 미륵전은 국보 제62호이고 방등계단은 보물 제26호이다.
“선계산 불사의방에서 기도를 시작한 승(僧) 진표의 무릎과 팔뚝이 부서져 바위 낭떠러지에 피가 쏟아졌다. 기도를 시작하고 14일이 되어 지장보살로부터 정계를 받고, 이후 미륵보살에게 뜻이 있어 영산사로 옮겨 처음과 같이 기도하여 자씨, 즉 미륵보살에게서 『점찰경』 등을 받았다. ‘너는 이것으로써 세상에 법을 전하여 남을 구제하는 뗏목으로 삼으라.’
단석의 정결하고 엄한 것이 이 말세에는 보지 못하던 일이었다. 풍교와 법화가 두루 미치자 여러 곳을 다니다가 아슬라주에 이르니 섬 사이의 물고기와 자라들이 다리를 놓고 물속으로 맞아들였다. 진표가 불법을 강의하니 물고기와 자라들은 계를 받았다.”(『삼국유사』의 「진표전」 가운데)
절은 저녁 공양이 끝나는 6시 이후 속세와 이어지는 문을 굳게 닫는다.
속세의 인적이 끊기는 그 시간 이후 비로소 번잡한 걸음도, 수없이 나다니는 생각도 가라앉는다. 이 같은 시간을 만들어 준 역대 대덕과 현재의 사부대중께 머리 조아려 삼배를 올릴 즈음, 도량석 목탁이 모악산을 깨운다. 법랍이 꽤 있어 보이는 어른스님이 대적광전을 한 바퀴 돈 뒤 보제루 앞에서 도량석을 마친다.
목탁의 에너지가 도량의 찬 기운을 녹이고, 행자가 대종을 울린 뒤 대적광전으로 든다. 학인스님들의 우렁차고 조화로운 칠정례가 익숙했기에, 스님이 많지 않은 금산사 예불은 흥미로웠다. 불협화음 같은 스님 한 분 한 분의 짓소리가 묘하게 힘을 가진다. 칠정례 뒤에 이어지는 이산혜연 선사 발원문은 늘 서늘하다.
예불을 마치고 마당에 서자 경이로운 모습이 펼쳐진다. 위로는 북두칠성이 앞으로는 미륵부처님이 계신다. 북두칠성의 국자 손잡이 끝에 있는 별이 방등계단을 향해 있다. 예부터 천문에서는 북두칠성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북두칠성은 우주의 중추이자 음양의 본원으로, 하늘의 한가운데를 운행하며 사방을 제어함으로써 사시를 바르게 세우고 오행을 균일하게 만드는 우주의 에너지인 것이다. 그래서 동지 즈음 칠성의 끝별이 닿는 지점에 영험이 있는 기도처를 만들었다. 백양사 운문암 칠성전 자리가 영험 있기로 이름나 있는 것도 이 같은 이유 때문이다. 시계가 없던 옛사람들은 북두칠성을 보며 절기와 시간을 알았다. 동지에 가까워질수록 북두칠성은 똑바르게 서는데 지금이 그즈음이다. 하늘을 향했던 고개를 바로 세우자 미륵부처님의 부릅뜬 눈이 나를 직시한다. 헛것에 빠지지 말고 너 자신을 좀 들여다보라고.
글·사진. 유동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