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말 고려 초 경남 창원 봉림사의 진경 대사 심희에게 누군가 물었다.
“스님은 왜 중국 유학 안 가십니까?”
“이미 여러 선승이 중국에서 달마와 혜가의 선종을 배워왔거늘 굳이 또 유학 갈 필요가 있겠느냐?”
사상과 종교를 받아들인 이후 그 사상과 종교는 변하기 마련이다. 받아들인 나라의 역사와 풍토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변한 모습을 보지 않고 중국에서 받아들인 모습 그대로만 해석하는 것은 중국사이지 한국사가 아니다. 백제 불교도 마찬가지다. 불교를 중국에서 받아들였지만, 중국사와 백제사의 전개 과정이 달랐다. 역사에 녹아든 불교도 중국 불교가 아닌 백제 불교인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백제 역사의 가장 큰 특징은 도읍을 여러 번 옮겼다는 점이다. 더구나 한성에서 웅진으로의 천도는 피치 못할 상황에서 벌어진 천도였다. 백제의 개로왕이 전고려(=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을 받아 한성은 함락되고 개로왕은 죽임을 당했다. 개로왕의 동생 문주는 할 수 없이 웅진까지 내려와 웅진에 새 도읍을 정했다. 백제 역사의 트라우마는 웅진 천도였고 백제사의 전개 과정은 이 트라우마의 극복과정이었다.
한성 시기 불교수용, 10인의 도승과 도림
백제는 침류왕 원년(384) 동진의 마라난타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였다. 동진이 전진과 비수의 싸움에서 승리한 1년 뒤였다. 백제는 국제정세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백제의 왕계는 고이계와 초고계로 나뉘는데, 불교를 통해 두 왕계를 통합하고자 하였다. 왕실에선 어머니 아이부인이 병약한 침류왕의 건강을 위해 불교수용에 적극적이었다. 이듬해 백제는 한산에 절을 짓고 10명의 스님을 배출했다. 10인은 3사7증을 말한다. 3사7증은 구족계를 받을 때 있어야 할 세 사람의 스승과 일곱 사람의 증인으로 백제는 일찍부터 스님을 배출할 수 있는 기본 시스템을 갖추게 되었다. 침류왕의 아들 아신왕은 ‘널리 불법을 믿어 복을 구하라’란 교서를 내려 백성들에게 불교를 믿을 것을 독려했다.
개로왕 때 전고려의 스님 도림이 백제에 거짓으로 망명하여 정보를 자기 나라에 넘겼다. 도림이 승려 자격으로 활동할 수 있었던 배경은 백제에 불교가 널리 퍼졌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북조의 불교에 밝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도림을 통해 백제도 왕이 곧 부처라는 북조의 왕즉불(王卽佛) 사상을 접하게 되었다.
웅진 시기 법화신앙과 대통사
전고려 장수왕의 침입으로 한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은 죽임을 당했다. 문주왕이 급히 웅진으로 천도했지만, 정국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문주왕은 시해되고 삼근왕은 어린 나이에 죽고 동성왕도 시해당했다. 무령왕 때 가서야 중국 양나라와 활발한 교류를 통해 나라가 어느 정도 안정됐다. 무령왕은 겸익을 인도에 보내 범본 율장을 가져오게 했다. 중국에서 아직 번역되지 않은 율장이 궁금했고 해이해진 불교계를 다시 정비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겸익은 성왕 때 귀국해 율장을 번역했다.
무령왕의 뒤를 이은 성왕은 아버지 무령왕의 3년 빈상(殯喪)으로 왕권을 강화했다. 무령왕의 명복을 빌고자 대통사를 창건하기도 했다. 성왕은 평상시 이름이기도 하고 죽은 뒤 시호로도 사용됐다. 유교적 의미와 불교적 의미를 다 포함하고 있는데 불교적 의미에선 불법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이상적인 왕 전륜성왕을 의미하기도 한다. 성왕이 ‘대통’을 절 이름으로 삼은 건 『법화경』 「화성유품」에 따른 것이다.
이에 따르면 수십 겁 전에 대통지승여래가 있었다고 한다. 대통불의 아버지는 전륜성왕이고 대통불에게는 16명의 왕자가 있었다. 나중에 이들은 아버지 대통불을 따라 출가하여 8방에 2명씩 16부처가 된다(그림1). 16왕자의 막내가 석가이고 석가모니불이다. 즉 전륜성왕–대통불–석가모니에 이르는 계보에 보이는 것이 ‘성왕’과 ‘대통’이다. 성왕은 웅진 천도 이후 실추된 왕실의 신성한 권위를 드러내기 위해 석가모니의 계보와 백제 왕실의 계보를 일치시키고자 했다. 대통불의 다른 이름은 위덕세존이고 성왕의 아들이 위덕왕이다. 사비 시기 의자왕 때 대좌평을 지낸 사택지적의 ‘지적’이란 이름은 16명 왕자의 첫째 아들 지적(智積)과 같은 이름이다. 법화신앙은 대통사 창건을 계기로 널리 퍼졌으며 백제 멸망 때까지 백제의 대표적인 불교 신앙이었다.
대통사의 문헌 기록은 『삼국유사』에서 ‘신라 법흥왕이 대통원년(527) 양나라 무제를 위해서 웅천주에 절을 짓고 이름을 대통사라 하였다’가 전부이다. 일연은 덧붙이기를 ‘527년 웅천주[웅진, 공주]는 신라 땅이다’라고 했다. 신라 법흥왕이 백제 도읍인 웅진에 절을 지었다든가 527년 웅진이 신라 땅이라고 한 것이라든가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는 기록인데 단지 신라 법흥왕을 백제 성왕으로 바꾸어 이해하고 있다.
527년을 전후한 시기는 무령왕의 3년 빈상(523~525)과 무령왕비의 3년 빈상(526~529) 기간이었다. 부왕과 모후를 위한 절도 짓지 않다가 갑자기 양나라 무제의 연호를 위해 절을 짓는 건 이해하기 어렵다. 무령왕의 명복을 비는 대통사란 절을 525년 완공했거나 짓고 있었는데, 중국에서 527년 대통으로 연호를 바꾸자 대통불에다 대통 연호가 덧붙여진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중국 양나라와 우호 관계가 절실한 백제 성왕의 처지에서도 대통사가 양 무제의 연호를 따서 양 무제를 위한 절이라고 적극적으로 홍보했을 것이다. 그런데 백제가 멸망한 이후 대통불의 대통사는 사라지고 대통 연호의 대통사만 남은 것으로 여겨진다.
사비 시기 법화신앙과 스님들
백제 성왕이 그 많은 절 이름을 놔두고 ‘대통불’에서 이름을 따온 것은 『법화경』이 가장 널리 알려진 경전이기도 했고, 백제에서 『법화경』이 유행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525~527년을 전후해 활동한 법화의 스님은 발정이다. 일본 청련원(靑蓮院)에서 발견된 중국 육조시대의 기록인 『관세음응험기』에 따르면, 발정은 당시 백제가 아니고 중국 양나라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귀국한 연대는 성왕 때 후반이다. 발정이 귀국할 때 『화엄경』과 『법화경』을 누가 더 잘 독송하는지 내기를 했는데 『법화경』을 독송한 발정이 이겼다고 한다. 비록 대통사 창건에 발정이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대통사 창건을 전후해 백제에 『법화경』이 널리 읽히고 있었음을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중국 송나라 찬녕의 『송고승전』에 따르면, 현광은 중국에 유학하여 천태 지의의 스승인 남악 혜사에게 ‘법화안락행문’을 전수하고 법화삼매를 증득했다고 한다. ‘법화안락행문’은 『법화경』 「안락행품」에 근거하고 있다. 현광은 천태 지의와 동문으로 위덕왕 때 후반 귀국하여 당시 도읍인 사비가 아닌 웅진 옹산에 머물렀다. 아마도 『법화경』에 근거하여 세워진 웅진 대통사에 머물렀을 가능성이 크다.
혜현은 중국에 유학하지 않았는데도 중국 당나라 도선의 『속고승전』에 전기가 실린 고승이다. 혜현은 『법화경』에 능통했을 뿐만 아니라 『중론』, 『십이문론』, 『백론』의 삼론(三論)에도 정통했다. 혜현은 수덕사에서 『법화경』 독송을 하고 전남 영암 월출산으로 자리를 옮겨 『법화경』 독송을 이어갔다. 그가 죽은 후 그의 뼈는 마치 살아있는 듯 붉었다고 한다.
백제의 법화신앙은 불교미술에도 영향을 끼쳤다. 백제 기와의 8엽 연화문은 『법화경』 「화성유품」의 8방 16왕자[부처]를 의미한다. 8엽 연화문이 각각 2개로 갈라지거나 2개의 구멍이 뚫린 것도 있는데, 이는 8×2=16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예산 사방불은 『금광명경』과 『법화경』 「화성유품」의 8방불과 관련이 있다. 태안마애삼존불의 나란히 서 있는 두 부처는 『법화경』 「견보탑품」의 다보불과 석가불을 의미한다. 서산마애삼존불의 제화갈라보살–석가–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법화경』의 수기 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익산 미륵사의 3탑 3금당 양식은 기본적으로 미륵신앙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1목탑 2석탑의 쌍석탑은 『법화경』 「견보탑품」의 석가탑, 다보탑과 관련이 있다.●●
누구나 성불할 수 있다
『법화경』의 또 다른 중요한 가르침은 누구나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백제 성왕은 541년 중국 양나라에서 『열반경』을 비롯한 여러 경전의 주석서를 들여왔다. 『법화경』의 성불론에 관한 관심은 자연스럽게 『열반경』을 향한 관심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점은 『열반경』을 들여온 게 아니라 그 주석서를 들여왔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대통사를 창건한 525~527년을 전후한 시기 이미 『법화경』과 『열반경』에 대한 이해가 높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백제 성왕이 『열반경』에 대한 주석서를 요구할 때 예제에 밝은 육후도 건너왔다. 백제 성왕의 유교와 불교의 콜라보는 『일본서기』 ‘보천지하 일체중생 개몽해탈’에 보인다. 『시경』의 하늘 아래 모든 땅이 왕의 것이라는 ‘보천지하’와 모든 중생이 성불한다는 『열반경』의 ‘일체중생 개몽해탈’ 두 개가 합쳐졌다. 백제 성왕은 일본에 불교를 전해 줄 때 『금광명경』의 구절을 첨부해 보내기도 했다.
백제 성왕 때 기반을 다진 『법화경』, 『열반경』, 『금광명경』 등에 대한 이해는 이후 백제 불교의 수준을 한 단계 높여 주었다. 『일본서기』가 인용한 『백제본기』에 의하면 545년 전고려가 세군(細群)과 추군(麤群) 두 패로 나누어 싸우다 2,000명이 죽었다고 한다. 추군과 세군이란 용어는 전고려의 스님 의연이 중국 북제에서 관심을 기울인 경전인 『대지도론』, 『십지론』에 나온다. 그런데 백제가 추군과 세군을 인용하고 있었으므로 백제에서도 이들 논소에 대한 이해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최근 『대승사론현의』란 책이 백제 스님 혜균이 쓴 경전으로 새롭게 밝혀졌다. 삼론의 입장에서 삼론학과 경쟁 관계에 있던 지론, 섭론, 성실, 비담 등의 사론을 비판한 책이다. 혜균이 백제 승려인지는 논란이 있지만, 『십지론』의 추군, 세군에 대한 이해가 있었던 백제는 삼론과 사론이 경쟁 관계에 있을 정도로 불교신앙뿐 아니라 불교 교학 수준도 높았음을 알 수 있다. 혜현도 삼론에 정통했고 일본에서 활동한 혜총, 관륵, 혜관도 삼론학자였다.
미래불과 정토에 있는 부처
백제의 미륵신앙은 익산 미륵사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미륵사는 세계에서 유일한 3탑 3가람의 독특한 가람 배치를 갖고 있다. 이는 미륵이 하생해 용화수 아래에서 세 번에 걸쳐 설하는 삼회설법을 상징하는 가람 배치다. 물론 미륵사에는 미륵신앙만 있는 게 아니었다. 2개의 쌍석탑은 『법화경』에 의한 것이다. 쌍석탑의 기원도 신라가 아니라 백제였던 것이다. 미륵사의 3원 1가람 형태는 『법화경』의 회삼귀일(會三歸一) 사상과도 연결된다.
백제에서의 아미타신앙은 확실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예산 사방불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백제 멸망 후 조성된 계유명아미타삼존불비상은 이미 백제 말기에 아미타신앙이 퍼져 있었음을 보여준다. 아미타신앙도 그 계보는 『법화경』 「화성유품」의 8방 가운데 서방의 부처인 아미타불 신앙에서 유래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백제 능사에서 ‘숙세결업 동생일처 시비상문 상배백래’라 적힌 목간이 나왔다. ‘오랜 세월 맺은 업으로 한곳에 태어났거늘 시비를 물어 무엇하랴. 부처님께 귀의합니다’라는 뜻이다. 수십 겁 이전에 백제는 대통불의 부처님 나라였다. 관산성 패전으로 온 나라가 슬픔에 휩싸였을 때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었던 것은 오랜 옛날부터 지금까지 백제가 부처님 나라라는 믿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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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4~5세기를 전후하여 고려로 나라 이름을 바꾸었다. 궁예가 세운 나라도 고려다. 왕건의 고려는 전고려와 후고려로 두 나라를 구분했다.(조경철, 2018, 「주몽고려, 궁예고려, 왕건고려의 단절과 계승」, 『역사와 현실』 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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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철, 2015, 「백제 익산 미륵사의 3탑 3금당과 쌍탑의 기원」, 『백제연구』 62.
조경철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3년부터 연세대에서 한국사를 가르치고 있다. 2013년 한국연구재단이 조사한 한국사 분야 학술지 인용지수 2위를 차지했다. 저서로는 『백제불교사연구』, 『나만의 한국사』 등이 있으며 새로운 시각에서 역사를 바라보려고 노력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