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을 떠난 니어링의 삶을 꿈꾸다
새벽 다섯 시 눈을 떴다. 다시 잠이 오지 않아 물 한 모금 마시고 스마트폰을 뒤적거리다 책장 한구석 조용히 먼지가 쌓여가는 책 하나를 끄집어냈다. 헬렌 니어링과 스콧 니어링이 쓴 『조화로운 삶』. 이 책이 필자에게 온 지는 스무 해도 더 지났다. 표지는 더러 뜯겨나가고 찢어지고 낡았다. 재생지로 만든 본문 종이는 누렇게 색이 바뀌고 글자는 잉크가 바래 윤곽이 흐릿하다.
책장을 하나하나 넘기자 이 책을 읽었을 때의 기억이 지면 위에 어룽거려 마음이 아릿해진다. 그 무렵 필자는 신문 기자를 하다 사표를 내고 고향인 충북 괴산에 농사를 지으러 귀향한 삼십 대 초반 가장이었다. 도시의 삶은 누구를 억누르거나 짓밟아야 내가 올라선다는 생각이 들자 하루하루 견디기 힘들었다. 무해한 삶을 꿈꾸며 생태적 가치까지 추구할 수 있는 농부가 된 것은 그런 까닭이었다.
니어링 부부는 미국 뉴욕에서의 삶을 깊게 회의하며 출구를 모색한다. 점점 괴물이 돼가는 자본주의, 자유를 억압하는 정치체제의 상징인 뉴욕을 벗어나야겠다는 결심을 한 뒤 세 가지 방향을 가늠해본다.
첫째, 미국을 떠나 남미나 아시아의 다른 나라로 이주하는 것. 니어링 부부는 이것은 당면한 문제를 회피하고 도망가는 것이라고 생각해 가장 먼저 제외한다. 둘째, 뉴욕에 남아 협동조합 같은 공동체 운동을 하는 것. 안타깝게도 뉴욕은 그런 여지조차 없앨 만큼 삭막하게 변했다.
결국 셋째, 뉴잉글랜드 버몬트주의 시골로 들어가 자급자족적인 생활을 하기로 결심한다. 결코 동의할 수 없는 체제에 대해 저항하는 삶의 태도를 견지할 수 있고 대안적 삶의 모델까지 만들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니어링 부부는 새로운 삶의 가치와 루틴을 만들기 위해 평생을 바쳐 노력한다. 자급자족, 지산지소(地産地消, 지역에서 생산된 농산물을 지역에서 소비한다는 뜻), 경제적 안정성, 일과 여가의 조화, 타인에게 열려 있는 공동체 생활 등.
이 책을 읽으며 많은 꿈을 꾸었지만, 현실은 ‘먹고사니즘’을 벗어나지 못했다. 농사를 지어 생계를 꾸려가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지역 공동체를 위해 환경운동에 참여하면서 생계를 유지하는 것도 위태로운 지경이 됐다. 2005년 청와대 행정관으로 채용돼 귀농생활은 종지부를 찍고 다시 서울살이가 시작됐다.
뉴욕에서 니어링을 생각하다
2012년 늦가을 한 통의 메일이 뉴욕에서 날아왔다. 뉴욕 유니온 신학대학원에서 2013년 봄 ‘국제 불교・기독교 컨퍼런스-깨달음과 해방; 참여불교인과 해방신학자의 대화’를 열 예정이라며 도법 스님을 공식 초청한다는 소식이었다. 필자는 그 무렵 조계종 화쟁위원회 사무국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컨퍼런스 참가를 주저하는 도법 스님을 설득해 그해 4월 16일 뉴욕으로 향했다. JFK 공항에 도착해 택시를 잡아타고 유니온 신학대학원이 위치한 브로드웨이로 향했다. 마천루 빌딩 숲의 뉴욕을 상상했지만 뉴욕은 고풍스러운 석조 건물의 도시였다. 물론 마천루 빌딩이 즐비한 번화가도 있었지만 그보다 적당한 높이의 건물들이 적절한 공간을 차지하며 자리 잡은 낡은 도시였다.
유니온 신학대학원도 지은 지 백 년은 족히 넘어 보이는 아름다운 석조 건물이었다. 6층 높이의 건물이 ‘ㅁ’자 형으로 연결됐고 그 가운데 아담한 정원이 잘 가꾸어져 있었다. 주변엔 아름다운 고딕 양식 교회인 리버사이드 처치가 있고 리버사이드 파크 옆으로 허드슨강이 흘렀다.
유니온 신학대학원 게스트하우스에 묵으며 아침 9시부터 저녁 9시까지 하루 열두 시간 넘게 컨퍼런스에 참여했다. 컨퍼런스의 키워드는 ‘고통(suffering)’. 경제적 격차, 전쟁과 폭력, 성, 인종주의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적 고통에 대해 종교는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컨퍼런스 일정을 마친 뒤 링컨센터에서 뉴욕 필하모닉이 연주하는 브루크너의 교향곡 1번을 듣고,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을 감상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이집트와 그리스, 로마의 유물과 예술작품을 감상하고 고흐, 고갱, 세잔 등 인상파 특별전을 관람했다. 말할 수 없이 큰 감동을 받았다. 9·11테러 현장인 그라운드 제로를 방문해 억울한 영혼을 달래는 기도도 올렸다.
그리고 문득 니어링 부부를 떠올렸다. 니어링 부부는 80여 년 전 이 뉴욕의 삶이 왜 그렇게 견딜 수 없었던 것일까? 필자는 왜 14년 전 서울의 삶이 왜 그렇게 견딜 수 없었던 것일까? 이제 서울의 거리도, 뉴욕의 거리도 아무런 거부감 없이 걷게 된 그 순간에.
뉴욕에서 강의를 하다
글쓰기 강사로 전업을 한 지 일 년이 갓 넘은 2015년, 미국에서 오랫동안 살다 온 지인과 이야기를 나누다 이런 말을 던졌다. “미국 교포들 대상으로 글쓰기 강의를 한번 해보고 싶네요.” 지인은 자신이 과거에 근무했던 교포 언론사의 대표가 이 제안에 관심을 가질지도 모른다고 답했다.
몇 달 후 지인에게 전화가 왔다. 교포 언론사 대표가 곧 한국을 방문하는데, 만나서 지난번 제안을 진지하게 이야기 나누면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연남동 어느 화상이 운영하는 중국 요릿집에서 C대표와 만나 미주 순회강연을 하기로 의기투합했다.
C대표는 순회강연에 소요되는 왕복 항공비, 교통비, 숙박비, 기타비용을 모두 지원하기로 했으며 거기에 더해 두 딸의 동행 비용 일체까지 책임져주기로 했다. 미국 교포사회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필자에겐 실로 파격적인 대우였다. C대표는 독실한 크리스천이었지만 종교적 차별이나 편견 같은 것을 조금도 느낄 수 없을 만큼 열린 사람이었다.
그해 12월 중순 두 딸과 함께 뉴욕 JFK 공항에 도착했다. C대표가 거주하는 뉴욕 플러싱 근처에 숙소를 잡고 본격적인 일정을 시작했다. 플러싱 한인 교회에서 신자들을 대상으로 글쓰기 강의를 시작했다. 두 시간 남짓 진행되는 동안 많은 교포가 자신의 삶을 짧은 글로 정리해 발표했고 더러 감정에 북받쳐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의 글에서 이민사를 다룬 책이나 다큐멘터리에서는 알 수 없었던 이민자들의 구체적 삶을 만날 수 있었다.
C대표가 운영하는 학원에서도 사전에 모집된 글쓰기 강좌 수강생들을 위한 연속 강좌를 진행했다. 하루에 2시간씩 5일간 이어졌다. 다양한 목적을 가진 교포들이 이 강좌에 참여했다. 목회 연설을 잘하기 위해 글쓰기를 배우러 왔다는 목사, 뉴욕 뒷골목 맛집을 소개하는 책을 준비 중이라는 중년 여성, 신학대학원에 다니는 청년, 은퇴 후 전 세계 각지로 여행을 다니는데 제대로 기록하고 싶다는 부부.
강의 후엔 교포들이 자신의 집으로 필자를 초청해 거의 매일 저녁 만찬 겸 술자리가 이어졌다. 거기서 이주민으로서 살아온 그들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다.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치적 상황에 대한 그들의 높은 관심사와 뜨거운 열정도 확인할 수 있었다.
낮엔 두 딸과 함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구겐하임 미술관, 휘트니 미술관 등을 관람했고 센트럴 파크와 소호의 거리를 누비고 다녔다. 브로드웨이 뮤지컬과 링컨센터의 여러 공연들을 즐기고 버려진 철로를 활용해 만든 하이라인파크를 걸었다.
뉴욕은 필자와 두 딸에게 멋있고 살아있는 느낌이 넘치는 도시로 다가왔다. 길거리에서 만난 뉴요커의 개성 넘치고 자신 있는 표정에서 한국과는 다른 문화를 느낄 수 있었다.
그 후 두 차례 더 미주 순회강연을 다녀왔지만, 뉴욕 거리를 활보하는 동안 필자에겐 더 이상 니어링 부부가 오버랩된 뉴욕은 떠오르지 않았다. 코로나19로 미국을 방문하지 못하게 된 지금, 다시 『조화로운 삶』을 읽게 되니 생각에 잠긴다. 니어링 부부가 살아냈던 뉴욕의 삶은 무엇일까, 22년 전 필자가 살아냈던 서울의 삶은 무엇일까.
백승권
글쓰기 컨설팅 전문업체 커뮤니케이션컨설팅앤클리닉 대표로 업무용 글쓰기 강사로 활동 중이다. 노무현 정부 청와대 홍보수석실 행정관, 조계종 화쟁위원회 사무국장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