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작·역자 | 등현 | 정가 | 25,000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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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일 | 2022-10-20 | 분야 | 불교 |
책정보 |
528쪽 152*223mm (A5신) 739g ISBN : 9791192476599 |
불교의 진수를 만나게 하는 단 한 권의 책!
2,500년 불교사를 관통하는 ‘한 맛[一味]’,
드디어 이 책에서 모습을 드러내다!
아버지의 죽음을 체험한 어느 소년이 걸어간 길
등현 스님은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죽음을 체험하고 종교에 빠져들었다. 유가의 가르침과 도가의 가르침과 기독교의 가르침을 섭렵하다가 결국 출가를 결심하게 되었다. 출가한 후에도 스님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많은 의문들과 씨름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오히려 굳게 의지하고 있던 것들에 대한 믿음까지 흔들렸다. “나에게 세 가지 보배가 무너졌다. 계율에 대한 의식이 무너지고, 괴로움의 진리가 무너지고, 항상 고요와 평온 속에 머무는 무심삼매가 무너졌다. 나는 큰 어려움에 봉착했다.”
스님은 뭔가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싶었다. 특히 초기불교와 대승불교 사이에 벌어지는 논쟁의 진실을 파헤치고 싶었다. 그래서 스님은 스리랑카로 가서 남방계를 받고 7년 동안 빠알리어 초기 경전을 공부했다. 남방불교의 전통에 따라 수행하다 보니 아이러니하게도 대승불교에 대한 믿음이 되살아났다. 이번에는 인도로 가서 산스크리트어로 된 힌두 경전을 공부했고, 다시 또 7년 동안 대승 경론을 공부했다. 한국에서 출발하여 스리랑카를 거쳐 인도까지 찾아간 오랜 구도 여정 끝에 그는 마침내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수많은 시행착오와 방황 끝에 대승이 나에게 문을 열고 환하게 웃으며 반겨 주었다. 나의 여행이 드디어 목적지에 도달한 것이다.”
절실했던 수십 년 공부의 회향, ‘초기불교에서 선까지’
귀국 후에 스님은 자신이 공부하고 깨달은 바를 <불교신문>에 ‘초기불교에서 선까지’라는 제목으로 3년 2개월 동안 연재했다. 등현 스님은 대중에게 널리 이름이 알려진 스님이 아니었고, 연재한 글 또한 세간의 이슈에 부합하는 내용은 아니었다. 하지만 스님의 연재 글은 불교계의 화제가 되었다. 중국불교의 교상판석은 물론, 원효 스님도 미처 완성하지 못했던 회통불교의 모습, 불교의 일미(一味)를 21세기의 언어로 설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종류의 글도 드물었지만, 그런 글을 쓸만한 역량을 가진 인물은 더더욱 드물었다. 그 바람에 스님 주변의 인물들은 스님과 직접 이야기하고 싶으니 연락처를 알려 달라는 전화에 시달리기도 했다.
불교를 꿰뚫다는 <불교신문>에 연재되었던 ‘초기불교에서 선까지’의 원고를 고치고 다듬어 한 권의 책으로 정리한 것이다. 1부 ‘초기・부파불교의 수행론’에서는 여러 초기 경전과 구사론에 나오는 수행론을. 2부 ‘대승의 수행론’에서는 중관학파와 유식학파의 수행론과 십지경에 나오는 수행론을. 3부 ‘선종의 수행론’에서는 능가경에 나오는 수행론과 달마선 및 조사선의 수행론을 각각 다룬다.
7세기에 원효가 품었던 꿈, 21세기에 다시 피어나다
불교는 교학이기 이전에 실천 수행이다. 이 점에 착안하여 불교를 꿰뚫다는 복잡다단한 불교의 수행론을 자세하게 분석하고 친절하게 설명한다. 하지만 이 책의 목표는 단지 불교의 수행론을 가르치는데 머물지 않는다. 이 책은 불교의 수행론을 논의 주제로 삼아 불교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가르침과 궁극적인 목표를 치열하게 규명해 나간다.
이 책이 제시하는 불교의 핵심적인 가르침과 궁극적인 목표는 저자의 개인적 견해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초기불교에서 선불교에 이르는 장구한 불교사를 샅샅이 살펴본 저자의 식견에 기반해 있는 것이며, 불교사에 명멸한 여러 상이한 불교적 사유들에 대한 면밀한 교통정리에 기반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구사론』에서 말하는 법의 자성(sabhava)은 현상계[有爲法]의 자성을 뜻하고, 중관사상에서 말하는 무자성은 절대계[無爲法], 열반계의 관점에서 법의 무자성을 의미한다. 둘이 서로 다른 차원과 관점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상충되지 않는다 _ 27쪽
진실 혹은 실재는 경험적 실재와 절대적 실재 두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초기불교는 경험적 실재를 중시하고, 대승 특히 중관학파와 선종은 절대적 실재를 중시한다. _ 51쪽
저자는 여러 가지 불교적 사유라는 퍼즐 조각들 각각에 대해 맞춤한 위치를 찾아주었고, 그 결과 그 퍼즐 조각들은 서로 아귀가 맞게 연결되어 하나의 큰 그림을 그려냈다. 지금까지 사람들이 불교의 ‘한 맛[一味]’이라고 칭했던 것은 바로 이렇게 만들어진 큰 그림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그 큰 그림을, 불교의 ‘일미’를 우리는 이 책을 통해 비로소 조우한다.
등현 스님
근일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1986년에 사미계를, 1989년에 구족계를 수지했다. 1993년부터 20여 년간 스리랑카・인도・미얀마 등지에서 수행하면서 빠알리어・산스크리트어・티베트어로 된 불교 원전을 공부했다. 이후 12개국 스님들이 모여서 공부하는 태국 International Buddhist College에서 3년간 강의했다. 2016년부터 현재까지 고운사 화엄승가대학원 원장 소임을 맡고 있으며, 중앙승가대에서 강의하고 있다.
추천사
인사말
머리말
제1부 초기・부파 불교의 수행론
제1장 초기불교의 수행론
1. 부처님의 고뇌와 고락중도
2.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
3. 괴로움의 원인
4. 집착하면 왜 괴로운가
5. 제법무아
6. 멸성제
7. 팔정도
8. 법념처
9. 선정
10. 위빳사나 지혜
11. 십이연기
12. 분별설부와 설일체유부의 이상향
13. 삼십칠조도품
14. 바르게 깨달으신 분
15. 법의 덕을 억념하다
16. 지혜와 실천을 구족한 성문 승가
17. 오근과 팔정도
18. 오근과 오력
제2장 설일체유부의 수행론
1. 유루와 무루, 유위와 무위
2. 설일체유부의 번뇌론
제2부 대승의 수행론
제1장 중관학파의 수행론
1. 불교의 수행론
2. 『금강경』의 수행론
제2장 유식의 수행론
1. 중관과 유식
2. 제8식과 유식의 수행론
3. 제8식과 유식의 여러 학파
4. 유식의 세 가지 자성설
5. 해탈과 신통
6. 유가행
7. 유식의 자량위
8. 연기와 가행위
9. 견도와 통달위
10. 가행위와 사념처
11. 심념처와 삼계유심
12. 법념처와 만법유식
13. 통달위
제3장 『십지경』의 수행론
1. 세친 보살의 『십지경』 주석
2. 환희지와 연민심
3. 환희지와 십대 서원
4. 환희지와 보시바라밀
5. 욕심과 서원의 차이
6. 이구지의 수행
7. 여명지의 수행
8. 염혜지의 수행
9. 난승지의 수행
10. 현전지의 수행
11. 원행지의 수행
12. 부동지의 수행
13. 선혜지의 수행
14. 법운지의 수행
15. 아라한과 보살 수행의 차이
제3부 선종의 수행론
제1장 『능가경』의 수행론
1. 달마선과 『능가경』
2. 라와나왕 권청품
3. 집일체법품
4. 무상품
제2장 달마선
1. 선의 기원
2. 『이입사행론』
3. 『신심명』의 마음 다스리는 법
4. 아는 마음과 분별하는 마음
5. 신수와 혜능의 수행론
6. 진여심과 조주의 무
제3장 조사선
1. 돈오돈수와 마조의 평상심
2. 하택종의 ‘앎’과 ‘봄’
3. 아는 마음의 알려진 대상으로부터의 자유
맺음말
저자 후기
저자의 말
부처님께서는 무엇을 가르치셨는가? 부처님께서 가르치고자 하셨던 불교의 본질은 과연 무엇인가? 초기불교와 중관・유식・화엄・선종 등은 결국 모두 같은 가르침을 담고 있다. 모든 바다의 맛이 결국 짠맛으로 모아지듯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은 해탈과 자비라는 한 맛[一味]으로 귀결된다. 불교를 공부하는 이들이라면 이 사실을 깊이 유념해야 한다.
물론 우리는 여러 불교 학파가 시대마다 각기 다른 개념이라는 그릇과 과학이나 철학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조금씩 다르게 표현한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자성이란 단어 하나만 보더라도 학파에 따라 다른 차원과 관점에서 사용하고 있고, 그로 인해 필연적으로 오해와 분쟁을 불러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필자는 이 같은 오해를 원전을 통해 확인함으로써 유구한 불교 역사 속에서 발전을 거듭해 온 부처님 법이 사실은 바다처럼 하나의 맛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자 이 책을 출간하게 되었다. _ 머리말에서
■ 추천의 말
불교 공부가 어려운 것은 불교사에 등장하는 다양한 사상과 교리들이 언어가 다르고 내용이 다르다 보니 혼돈이 오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이런 혼돈을 해결해 줄 연구도 논문도 책도 없었다. 아마도 이 책이 그런 혼란을 잠재우고 불교의 전반적인 이해도를 높이게 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리라 생각한다. 2500년 동안 변천해 온 불교의 사상적 흐름을 하나로 꿰뚫어 볼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수십 년을 스리랑카와 인도를 돌아다니며 스승을 찾아 배우고, 한국에 돌아와 그동안의 연구물을 책으로 내기까지 스님의 열정에 경의를 표한다. _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 진우 스님 추천사에서
■ 책 속으로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부처님께서 깨달은 고락중도의 선정과 외도들이 주장하는 선정은 매우 다르다는 것이다. 불교의 선정은 정견(正見)이란 지혜 위에 계의 실천을 통해 이루는 것이지만, 외도의 선정은 단순히 마음을 한곳에 응집하여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_ 36쪽
나에 대한 집착인 아집(我執)이 사라지면 나의 것, 즉 아소(我所)에 대한 집착인 법집(法執)도 사라져 모든 고통의 원인이 사라져 버린다. ‘나’가 없는데 ‘나의 것’이 있을 리 없다.
그렇다면 나에 대한 집착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없앨 것인가? 이것이 바로 고통을 사라지게 하는 핵심이며, 불교의 모든 종파가 온 힘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_ 48쪽
우리는 살아가면서 잘못된 믿음이라도 실재와 똑같은 결과를 주는 경우를 자주 경험한다. 예를 들어 한밤중에 길을 걷다가 노끈을 뱀으로 착각해서 몹시 놀라는 경우가 있다. 잘못된 믿음은 원인은 사실이 아니지만 결과가 사실이 되는 것이다. 오락에 너무 열중해서 건강과 공부를 해치는 소년에게 오락은 행복 그 자체이다. 그러나 행복하다는 그 느낌은 사실이 아닐 수 있다. 올바른 지식을 갖게 되면 바뀔 수 있는 착각의 감정인 것이다. 중증 당뇨병 환자가 단 음식을 먹으며 행복감을 느끼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믿음과 느낌들은 경험적 실재이다.
그러나 이러한 감정들은 잘못된 정보로 인해 생겨난 믿음이므로 실재라고 할 수 없고, 오직 경험적 측면에서만 실재이다. 이와 같이 오온의 경험도 주관적이고 경험적인 사실이다. 객관적인 진실이 아니고 그렇게 믿기 때문에 생겨난 하나의 심리적 현상일 뿐이다. 이것들을 실재이고 진실이라고 착각해서 일반화하면 고통에 빠질 수밖에 없다. _ 49-50쪽
그렇다면 무엇이 인간을 불행으로 이끄는 견해인가. 그것은 네 가지 잘못된 견해이다. 이 네 가지 잘못된 견해가 잘못된 인생관을 갖게 하고, 잘못된 인생관이 잘못된 목표를 세우게 하고, 잘못된 목표가 바르지 않은 사유를 하게 만든다. 그 네 가지 잘못된 견해는 인생이 영원하고[常], 즐거운 것이고[樂], 자아가 실재하고[我], 아름다운 대상[淨]이 실재한다는 믿음이다. 그러므로 바른 수행은 이 네 가지 견해에 대한 성찰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_ 61-62쪽
사띠는 일반적으로 ‘호흡의 알아차림’으로부터 시작한다. 호흡에 집중해야 하는 이유는 호흡이 마음을 현재에 머물게 하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마음은 늘 과거나 미래에서 노닐지만 호흡은 오직 현재에만 머문다.
그렇다면 왜 마음을 현재에 머물게 해야 하는가? 과거나 미래는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개념으로 이루어진 가상의 실재이기 때문에, 현재에 마음이 머물지 않으면 나의 진실한 모습을 보지 못한다. 마음이 현재에 머무를 때 나의 실체를 경험하여 깨닫고, ‘나’라는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_ 76쪽
이 시작점에서 잘못된 흐름으로 인도하는 것이 바로 계와 금기에 대한 오해[戒禁取見]다. 본래 금계(禁戒)는 자이나교의 수행이다. 재가자는 작은 금계, 출가자는 큰 금계의 서원을 세우고 수행을 한다. 금계의 내용은 각각 다섯 가지인데, “평생 여자에게서 물건을 받지 않는다”, “일생 동안 5리 밖을 나가지 않는다”라는 등의 서원이다. 자이나교도들은 이 같은 고행의 서원을 지킴으로써 해탈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를 불교적으로 재해석한다면 신(身)・구(口)・의(意) 삼업(三業)을 정화하지 않아도 다른 방법만으로 해탈할 수 있다는 그릇된 믿음에 해당된다. 하지만 진정한 불자라면 어떤 수행을 하더라도 신・구・의 삼업을 팔정도를 통해 정화해야만 한다. 이것만이 진정한 깨달음의 길이라고 할 수 있다. _ 104-105쪽
불교의 모든 수행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지관(止觀)이다. 초기불교, 구사, 중관, 유식, 천태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수행법은 지(止, samatha)와 관(觀, vipasyanā)으로 귀결된다. ‘관’으로 ‘보아서 사라지는 번뇌’[見惑]를 끊고, ‘지’로 ‘닦아서 사라지는 번뇌’[修惑]를 다스리는데, 이를 견도(見道)와 수도(修道)라 한다. 견혹(見惑)은 이지적 장애이고, 수혹(修惑)은 감성적 장애이다. 삼독으로 보면 견혹은 치(癡)이고, 수혹은 탐(貪)・진(瞋)이다. 탐・진・치를 다스리는 것은
모든 종파가 공히 인정하는 수행이다. 탐・진은 선정을 통해 거듭 닦아 다스려야만 하고[修道], 치는 바르게 보아 정견을 갖추면 사라진다[見道]. _ 195-196쪽
다시 말해 나와 중생은 둘이 아니다. 둘이 아닐 뿐만 아니라 하나이고, 하나일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나와 중생은 실체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모두 오온의 병렬적 행진이고, 나와 남은 오직 나의 개념과 관념 속에서만 존재한다. 그렇다고 모든 것이 환(幻)이란 말은 아니다. 물질・지각・인식・느낌・욕구 등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인연에 의해 ‘동시에 생겼다가 동시에 사라지는’ 것이고 그 자체에는 자타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들을 나와 대상이라고 구별하는 것은 나의 생각일 뿐이고 개념일 뿐이다. _ 206쪽
‘나’ 혹은 ‘나의 몸’이라고 말하는 것은 속제이고, ‘나’와 ‘나의 몸’이라고 말하기 전에 이 몸을 구성하는 최소의 경험적 대상인 지・수・화・풍의 속성을 지각하면 유위의 진제인 것이다. 상대적이고, 조건 지워진 것이기에 유위이고, 개념 없이 지각할 수 있으므로 진제이다. 인과율과 자성은 이 유위의 진제에만 존재한다. 왜냐하면 무위의 진제는 모든 것이 해체되어 주관도 객관도, 모든 조건 지워지고 형성된 것이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_ 224쪽
그렇다면 여래의 사후에 대해 어떤 표현도 할 수 없는 것인가? 꼭 그렇지는 않다. 만일 여래의 사후에 대해 질문을 받는다면 “오온은 무상한 것이고, 무상한 것에 집착하면 괴로움이 따르며, 무상하고 괴로운 것은 소멸하여 사라지는 것이다”라고 주어를 오온으로 바꾸어 대답하면 된다. _ 227쪽
불국토는 모든 유위의 형성이 해체된 세계이다. 그러므로 불국토를 건설하거나 장엄한다는 것은 외형적인 세계나 국가를 만드는 일이 아니고, 모든 유위의 형성을 해체하는 것을 말한다. _ 249쪽
이들 마음의 흐름은 자성이 없다. 해가 뜨면 어둠이 사라지듯, 집착을 놓은 자에게는 이 흐름이 실체를 잃고 사라지게 된다. 어둠은 경험되어지는 진실이지만 그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음의 흐름에는 ‘나’라거나 ‘나의 것’이라고 할 것이 없으며 집착할 바가 없으므로,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이라 하는 것이다. _ 265쪽
중생을 돕는 계행은 중생에게 도움이 된다면 보살 스스로 고통을 기꺼이 감수하는 것을 말한다. 설사 지옥에 태어난다고 할지라도 그 행위가 다수에게 이로움이 된다면 계행을 범해서라도 중생의 이로움을 구하는 것이 바로 보살행이다. _ 344-345쪽
이것이 유식과 『십지경』에서 바라보는 삼계유심이다. 즉, 마음이 삼계를 만든다는 존재론적 유심이라기보다는 마음이 없으면 대상을 인식할 수 없다는 인식론적 유심이다. ‘현전지의 보살이 삼계는 오직 마음임을 깨닫는다’라는 것은 인식이 마음을 떠나 존재할 수 없다는 마음에 의지한 십이연기를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의식이 없으면 대상을 인식할 수 없고, 인식할 수 없는 대상은 없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마음은 깨끗한 거울에 비유할 수 있다. 이 마음이라는 거울이 없으면 거울에 비치는 대상이 있을 수 없고, 인식하지 못한 삼계는 나에게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_ 403쪽
제6지의 혜바라밀(慧波羅蜜)과 제10지인 지바라밀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전자는 적멸을 체험하여 온갖 분별이 끊긴 상태인 반면, 후자는 온갖 분별이 끊긴 경지에 이른 후에 삶 속에서 다시 차별 현상을 있는 그대로 알고 실천하면서 중생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지혜이다. 후자를 유식학에서는 무분별지(無分別智)에 이른 후에 얻는 지혜라고 해서 무분별후득지(無分別後得智)라고 한다. _ 406쪽
대승 불교의 근본 사상은 ‘모든 중생을 다 구제하되 한 중생도 구제할 바가 없다’라는 것이다. 이때 ‘모든 중생’은 현상계이고, ‘한 중생도 구제할 바 없다’는 것은 본질의 세계이다. 모든 중생을 구제한다는 현상계와 한 중생도 구제할 것이 없다는 본질, 이 양면을 조화롭게 실천하는 것이 중도이다. 본래 성품의 깨달음만 강조하거나 깨달음 없이 이웃에 대한 연민만을 강조하는 것은 중도가 아니다. 그러므로 보살행을 실천하지 않은 깨달음은 중도적 깨달음이라고 말할 수 없다. _ 472쪽
인간은 수많은 생을 살아오면서 알게 모르게 지은 악업이 수없이 많다. 그리고 그 악업의 과보는 고통스러운 환경으로 드러난다. 고통스러운 환경에 부딪혔을 때 우리는 그것이 분열된 자기 내면세계의 투사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갈라지고 찢어진 내면세계는 살아오면서 받았던 수많은 상처의 결과물이다. 그것들이 이 외부 세계를 고통스러운 세계로 투사시키는 것이다. _ 481쪽
삶과 죽음은 의식이 하나의 대상에서 다른 대상을 향해 가는 것에 불과하다. 나타나는 모든 현상, 경험되어지는 모든 세계는 본래 고요하고 적멸하다. 왜냐하면 대상들은 형상, 이름, 분별들인데 이들은 모두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이고, 의식이 의미를 주지 않으면 대상들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본래의 법은 모양도 개념도 없기 때문에 수행의 순서나 상속도 말할 수 없다. 큰 불덩이가 맹렬히 타오를 때 여러 모양과 색깔이 다채롭게 보이듯이, 삼계(三有)는 모두 마음이 드러난 모양일 뿐이고, 현재나 과거로 투사되어 보이지만 사실은 모두 적멸의 상태를 벗어난 적이 없다. _ 50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