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팔환초
팔공산 북쪽에서 비로봉을 바라보며 오르는 정상 부근의 오도암 가는 길을 좋아한다. 비로봉 정상의 군사·통신시설까지 오르는 찻길이 있다. 적당한 곳에 차를 세워 두고 걷는 것이 당연히, 좋다. 가파른 산길이 호젓하다. 거대한 바위 아래 위치한 오도암이 남루한 대로 꾸밈이 없어서 좋다. 절이라고는 하지만, 유서 깊다는 말만 강조될 뿐 볼만한 게 없음에도 큰 바위 아래 동그마니 앉은 자세가 좋은 것이다. 10년 전에는 더 그러했다. 해우소에서 쪼그려 앉아서 바라보는, 절벽 아래로 펼쳐지는 산들과 골짜기의 장쾌한 풍경도 더 없이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세월은 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오도암도 꽤 정비가 이뤄지고 있다. 해우소도 옛날식의 불편한 구석은 없어졌다. 그래도 쉼터며 기도처로는 여전히, 아주 괜찮다. 팔공산은 그렇게 늘 새롭게 낯을 익히며 찾아지는 산이다.
이처럼 친근하게 여겨지니, 등산객도 끊이지 않는다. 팔공산 등산 코스로 잘 알려진 ‘가팔환초’는 대구 사람이라면 꼭 밟아보고 싶어 하는 산길이다. 가산~팔공산 정상~환성산~초례봉으로 이어지는 트레킹 코스로 40여 킬로미터, 백여 리에 이르는 거리다. 가산산성에서 출발하거나 초례봉에서 출발하는 이 코스는 팔공산의 등뼈를 밟는 만만치 않은 여정으로 이어진다. 보통 꼬박 이틀을 잡아야 한다. 그보다 더 걸릴 수도 있다. 그래서 전 코스를 몇 개로 나눠 짬을 내어서 한 코스씩 도전하기도 한다. 긴 능선의 거대한 바위들 사이로 난 길은 하늘을 걷는 기분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전문 산악인이 아니면 엄두를 내기가 쉽지 않을 정도로 힘든 코스다. 높은 산의 위용에도 대구 시민들은 팔공산을 ‘우리의 산’이라며 늘 친근하게 대한다. 스스럼없이 밟아 오르려 한다. 자주 동봉을 오르고, 염불암의 바위 등에 새겨진 부처님들을 대하는 예가 간절하다.
달구벌의 영산
팔공산은 늘 대구 시민들의 시선을 받는다. 대구 시내에서 올려다보면 아스라이 걸친 팔공산의 스카이라인이 도시 북쪽에 떠 있다. 여름의 푸른 모습도 볼만하고, 겨울의 눈 쌓인 흰 정상 모습은 신비롭기까지 하다. 최고봉인 비로봉(1,193m)을 중심으로 동봉과 서봉이 양 날개를 펼친 듯한 모습이 특히 인상적이다. 대구 북쪽을 병풍처럼 둘러친 산맥이다.
팔공산은 대구의 진산으로 중악, 부악(父岳), 동수산(桐藪山)으로 불리기도 했다. 또한 신라 때의 5악, 즉 토함산(동악), 계룡산(서악), 지리산(남악), 태백산(북악) 가운데 중심 산으로 그 기운이 두루 빼어났고 영험했다. 중악과 부악이란 명칭으로 불리어올 만큼 팔공산은 국가적으로도 중요시됐음을 짐작하게 한다. 후삼국시대 견훤이 서라벌을 공략할 때 고려 태조가 이를 징벌하려다 고전 중, 이 산의 동수(桐藪, 동화사 일대)에서 견훤에게 포위당했다. 그때 신숭겸이 태조로 가장해 수레를 타고 적진을 누볐다. 태조는 그사이에 피해 목숨을 보전했다. 그를 피신시키기 위해 당시 신숭겸과 김락 등 8명의 장수가 전사했다. 태조는 이후 두고두고 이들의 공을 찬탄했다. 이 산이 팔공산이라 불리게 된 연유다.
달구벌(達句伐)로 불리던 대구 분지는 북쪽의 팔공산과 남쪽의 비슬산(1,084m) 사이에 울멍줄멍하게 펼쳐진 너른 들판이다. 특히 팔공산 기슭이 이룬 들판은 큰 수해가 없고, 물이 풍부한 데다 분지 특유의 풍요로운 농업 생산지로 예부터 복지(福地)로 인식돼 왔다. 그래서 통일신라 때는 수도로서 가장 적합한 환경으로 꼽혀 천도 계획이 이뤄지기도 했다. 그만큼 삼국의 전쟁기와 통일신라시대 이후 요충지면서 풍요로운 삶터로 꼽혀왔다. 팔공산이 이룬 천혜의 복지인 셈이다.
불국토의 잔영
팔공산에 대해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중악에 비겨 중사(中祀)했다”라고 기록돼 있다. 지리산, 계룡산, 태백산 등과 함께 중사(국가의 2등급 제사)를 지내는 산으로 꼽힌 것이다. 이른바 산악 신앙의 한 형태인 산신 및 토지신 제사는 사직을 중요시한 국사의 긴요한 의례였는데, 그 중심적인 곳으로 꼽힌 곳이 팔공산이었다. 산 기운이 예사롭지 않고 빼어났음을 예부터 인정한 것이다. 실제 팔공산 정상에는 제천단(祭天壇)으로 추측되는 장방형의 돌무더기 제단 형태가 발견되기도 했다.
이후 팔공산은 수많은 불적이 자리 잡은 불국토의 한 모습으로 바뀐다. 유명한 선본사 갓바위 부처인 관봉 석조여래좌상(보물)은 기도처로 이미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신라 때 창건된 고찰 동화사는 입구의 마애여래좌상(보물)을 비롯한 많은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는 사명대사 유정이 승군을 지휘하던 곳이기도 했다. 영천 방면에 있는 은해사는 거조사 영산전(국보)을 비롯해 많은 보물과 문화재들이 있다. 칠곡 송림사에는 5층 전탑(보물)이 유명하다.
부인사는 고려 초조대장경을 소장했던 곳이며, 선덕여왕을 모시고 있는 절이기도 하다. 북지장사도 최근 새로 단장했다. 파계사, 선본사, 관암사 등 유서 깊은 사찰은 물론, 비로암, 부도암, 양진암, 염불암, 거조암, 백흥암, 운부암, 묘봉암, 중암암, 내원암 등의 암자들이 곳곳에 깃들어 있다. 군위의 아미타여래삼존 석굴(국보)도 유명하다. 이러한 팔공산이 잊지 못할 한 위대한 스님이 있다. 심지(心地) 스님이다. 동화사와 파계사를 창건 또는 중건해 신라 5악의 하나인 중악(팔공산)을 불국토로 만들려고 했던 인물이다. 지금도 팔공산 일대의 사찰들에서는 ‘심지왕사’로 떠받들고 있다. 그러나 그에 관한 기록은 드물다. 『삼국유사』와 동화사, 파계사의 사적기에 행적이 얼핏 비치고 있을 뿐이다. 동화사 일대, 파계사 및 은해사 등 팔공산 남쪽 기슭과 환성사 등에 그의 족적이 더러 남아 있다. 그는 신라 말기의 스님이다. 41대 헌덕왕의 아들인 그는 왕자로서의 호사를 버리고 ‘학문에 뜻을 둘 나이’인 15세에 출가, 산문에 든다. 출가한 곳이 어딘지는 분명치 않다. 한동안 팔공산에서 정진했다고 『삼국유사』는 밝히고 있다. 그는 고승 진표율사의 법제자인 영심 스님으로부터 법을 이어받아 원광-진표-심지로 이어지는 독특한 점찰 법맥을 이룬 스님으로 알려져 있다.
『삼국유사』에는 심지 스님이 진표율사의 점찰 간자(簡子, 점을 치는 대쪽)를 전수받는 과정을 밝히고 있다. 그가 팔공산에서 수행하고 있을 때 마침 속리산의 영심 스님이 진표율사의 불골(佛骨) 간자를 전해 과증법회(果證法會, 진리를 깨달아 도를 여는 법회)를 연다는 소문을 들었다. 급히 속리산으로 갔으나 도착이 늦어 참례 허락을 받지 못했다. 할 수 없이 땅에 자리를 깔고 뜰에 엎드려 법회에 예를 올리고 참여했다. 7일이 지나 큰 눈이 내렸다. 그러나 심지 스님이 있는 땅의 열 자쯤에는 눈이 내리거나 날리지 않았다. 스님들이 이 신기한 광경에 놀라 그에게 당(堂)에 오르라고 했으나 그는 사양했다. 그가 당을 향해 예배할 때 팔꿈치와 이마에 피가 흘렀다.
법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도중에 보니 심지 스님의 옷 주름에 간자 두 개가 붙어 있었다. 그것을 가지고 되돌아가 영심 스님에게 알렸다. “간자는 함 속에 있다”며 영심 스님이 함을 열어보니 과연 두 개가 없었다. 간자를 돌려주고 돌아가다가 다시 보니 여전히 간자가 옷에 붙어 있었다. 이에 영심이 “부처님 뜻이 그대에게 있으니 그대가 받들어 봉행하라”고 했다. 심지 스님은 그것을 받아 돌아오다가 팔공산 산신을 만난다. 산신과 함께 “땅을 가려 이 신성한 간자를 봉안하겠다”고 말하고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 간자를 던졌다. 간자는 숲속의 한 우물에 떨어졌고, 그 자리에 법당을 세웠다. 바로 동화사 자리다. 『삼국유사』에 실린 동화사 창건 설화다. 이로 미뤄 동화사 절터를 정할 때 점을 치는 점찰법으로 이뤄졌으리라는 추측도 나온다.
그러나 동화사 사적기에는 동화사 창건이 신라 소지왕 15년(493)에 극달화상이 창건해 유가사라 부르다가 흥덕왕 7년(832) 심지왕사가 중건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신라에 불교가 공인된 게 23대 법흥왕 이후로 꼽는데, 21대 소지왕 때 절이 창간된 것은 모순이다. 흥덕왕 때 절을 처음으로 조성했으리라는 설이 설득력 있게 들린다.
동화사 입구에 있는 마애여래좌상(보물)과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등을 심지 스님이 조성했단다. 심지 스님은 특히 불사를 좋아하고, 예술적인 자질이 있은 듯하다. 파계사뿐만 아니라 은해사 뒤편의 중암암 3층 석탑(경상북도 유형문화재)도 그가 조성했다는 이야기가 남아 있다. 심지 스님이 이처럼 불국토 조성이라는 ‘팔공산 프로젝트’를 성사시킬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왕실의 일원이었다는 점도 배경으로 크게 작용했을까? 어쨌든 그가 살았던 시기에 팔공산 일대에 사찰이 집중적으로 늘어난 것은 예사롭지 않다. 팔공산에 지금도 많이 남아 있는 불적들은 그가 남긴 불국토 성취라는 필생의 자취인 셈이다.
대구인들의 귀의처
팔공산은 대구인들의 귀의처다. 대구를 병풍처럼 둘러치면서 너른 팔로 껴안고 있어서 대구 사람들은 대구의 후원이나 큰 정원으로 여기며 늘 그 속에 안기고 싶어 한다. 태백산맥에서 남서 방향으로 갈라져 나온 지맥이 방가산, 화산, 팔공산, 도덕산으로 이어져 팔공산맥을 이뤘다. 산세가 웅장하고 사방으로 뻗친 계곡들이 깊어 폭포와 숲으로, 웅숭깊은 자연의 보금자리로 어우러져 있다. 1980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됐는데, 현재 국립공원화가 추진되고 있다. 대구시와 경북도가 2019~2021년 실시한 ‘팔공산 자연자원조사 용역’ 결과에 따르면, 팔공산 도립공원에는 총 5,295종의 생물이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사람뿐만 아니라 뭇 생명들의 품인 것이다. 지금은 더욱 숲이 우거졌고, 등산로도 잘 닦여 사방으로 통한다.
산 서편에 위치한 가산산성은 전쟁 때마다 대구 사람들의 피난처였고, 저항의 자리였다. 한티재도 유명하다. 얼마 전 군위로 이어진 터널이 뚫리기 전에는 팔공산을 넘는 이 고갯길이 만만찮았다. 고갯길 아래 숨겨진 한티 성지는 지금 천주교인들의 주요한 성지로 순례객이 끊이지 않는다. 순교라는 피의 역사 속에서 부대끼던 민초들의 가파른 삶을 푸근히 품어 주던 품이 팔공산이기도 했다.
사진. 유동영
이하석
1971년 『현대시학』 추천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투명한 속』, 『김씨의 옆얼굴』, 『우리 낯선 사람들』, 『측백나무 울타리』, 『금요일엔 먼데를 본다』, 『녹』, 『것들』, 『상응』, 『연애 間(간)』, 『천둥의 뿌리』, 『향촌동 랩소디』 등과 산문집으로 『코 떼인 경주 남산』 등이 있다. 김수영문학상, 김달진문학상, 이육사시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