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에 임금님 그리워하며 마음을 썼는데,
꿈속에서 두 개의 금 그릇을 분에 넘치게 받았네.
가련하게도 산골에서 부질없이 늙어가니,
성은에 보답할 길이 조금도 없구나.
비슬산 용연사(龍淵寺)에서 출가하고 입적한 인악 의첨(仁岳 義沾, 1746~1796) 스님이 쓴 시다. 세상사 인연을 모두 버리고 출가한 스님이 어떤 이유로 임금의 덕을 추모하는 글을 썼을까?
1790년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화성 용주사를 창건할 때, 인악 스님은 증사(證師)로 불상의 점안을 주재했다. 대웅보전 삼존불의 「용주사불복장봉안문(龍珠寺佛腹藏奉安文)」과 「용주사제신장문(龍珠寺祭神將文)」을 지어 임금으로부터 칭찬과 포상을 받았다. 정조는 선과 교에 이름을 떨치던 인악 스님을 초빙했고, 스님은 부름에 응답한 것이다. 용주사가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중창한 사찰이고 아비에 대한 정조의 애절함을 생각할 때, 인악 스님 위치를 보여주는 일이다.
스님은 4년 뒤 꿈속에서 정조를 다시 만났고, 이 시는 꿈을 회상하며 지은 것이다. 선과 교를 겸비하여 조선 후기 불교를 ‘화엄의 바다’로 조성한 비슬산 고승 인악 스님을 따라가 보자.
조선 후기, 화엄의 바람
조선 후기, 침체했던 조선 불교에 ‘화엄’의 바람이 불었다. 화엄의 바람은 18세기에 이르러 호남에는 연담 유일(蓮潭 有一, 1720~1799) 스님, 영남에는 인악 스님으로 이어졌다. 스님이 활동하던 시기는 화엄 연구가 활발했으며, 각종 화엄법회가 성행했다. 연담 스님과 인악 스님이 직접 교류를 했을 수도 있지만, 아직 확인된 것은 없다. 다만 두 분을 잇는 다리가 있는데, 설파 상언(雪坡 尙彦 1707~1791) 스님에게서 시기를 달리해 수학했다는 점이다.
1681년 어느 날, 중국의 배가 난파하여 전라도 임자도에 닿았다. 난파선에는 1,000권에 달하는 불경과 그릇이 있었는데, 『가흥대장경(嘉興大藏經)』이 그것이다. 『가흥대장경』을 수습하는 데 총력을 기울인 스님이 백암 성총(栢庵 性聰, 1631~1700) 스님이다. 수많은 불서 중 중국 청량 징관(淸凉 澄觀, 738~839) 스님이 쓴 『화엄경(華嚴經)』의 주석서, 「화엄경소초(華嚴經疏鈔)」가 있었다. 성총 스님은 이를 간행해 유통했고, 설파 스님이 다시 복간하기도 했다.
설파 스님은 당대에 이미 화엄보살로 불렸고, 「소초」를 제방에 유통하기도 했다. 스님은 또한 이에 관한 사기를 짓기도 했다. 사기(私記)란 스님들의 교육기관인 강원에서 진행했던 경전을 주역(註釋)한 것을 말한다.
설파 스님의 제자 연담 스님과 인악 스님 역시 사기를 각각 남겼는데, 그 시대를 대표하는 화엄교학의 수준을 보여준다. 『가흥대장경』의 우연한 전래와 복각은 불교계 화엄학 유행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고, 유명한 화엄학 강의에 수백 명이 몰려드는 현상이 생겨났다. 연담 스님은 호남에서, 인악 스님은 영남에서 화엄 바람의 근원지가 됐다.
인악 스님은 이외에도 서장사기(書狀私記), 능엄사기(楞嚴私記), 금강사기(金剛私記), 기신론사기(起信論私記), 원각사기(圓覺私記), 화엄사기(華嚴私記), 화엄십지품사기(華嚴十地品私記), 염송기(拈頌記)를 지었다.
인악 스님과 용연사
인악 스님이 출가한 비슬산 용연사는 이름에 드러나듯 용(龍)과 관련이 깊다. 절 이름의 유래에 대해 절 근처 골짜기에 신룡(神龍)이 사는 굴이 있었기 때문에, 혹은 골짜기에 용추(龍湫)가 있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한편에는 용연사를 창건한 보양선사가 중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는 도중에 서해 용왕을 만난 인연이 전해진다. 용연사 근처에는 용이 나타났다는 폭포도 있었다고 한다.
용과 관련된 창건 설화를 지닌 용연사에는 금강계단이 있어, 또 다른 적멸보궁으로 꼽힌다. 통도사에 모셨던 부처님의 사리를 용연사로 옮긴 연유가 「석가여래부도비(釋迦如來浮屠碑, 1676년 조성)」에 기록돼 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사명대사는 두 함에 불사리를 보관해 금강산 휴정 스님에게 가져갔다. 휴정 스님은 한 함은 묘향산 보현사에 봉안했고, 다른 하나는 통도사에 재봉안하게 했다. 그런데 사명대사가 일본에 가게 되자 통도사로 향하던 사리함을 치악산(雉岳山) 각림사(覺林寺)에 두게 했다. 후에 제자인 청진(淸振) 스님이 일부를 통도사에 돌아가 봉안하고 나머지는 용연사 북쪽 기슭에 봉안했다. 인악 스님이 용연사와 인연을 처음 맺었을 때, 금강계단은 이미 비슬산 자락에 있었다. 스님은 비슬산 자락에서 태어났고(1746), 18세에 용연사에서 출가했으며(1763), 25세에 설파 스님으로부터 선의(禪衣)를 전수받았다(1770).
인악 스님이 태어난 곳은 달성 인흥촌. 일연 스님이 머물던 인흥사와 멀지 않은 곳이다. 어릴 때 「소학」과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배웠고, 이를 통해 스님이 유학자 집안 출신임을 알 수 있다.
용연사에서 좌선하여 3년 동안 면벽한다고
손님이 와도 일찍이 응대하지 못했네.
스님은 “밤에 참선을 하여 취침 시간이 2시간 남짓이었으며, 낮으로는 강설을 하여 고하에 따라 자세히 일러주었다”며 용연사에 머물 때를 기록하고 있다. “한양의 승려가 영남으로 나를 방문하여 금강경을 배웠다”라고 할 정도로 스님의 학식은 널리 알려졌다. 대구 유학자들과의 교류도 활발했다. 선비 중에서도 가르침을 청하는 사람이 있었고, 『주역』을 배우러 오기도 했다. 스님이 불교 경전뿐 아니라 유학에 대해서도 깊이 있게 알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참선하려면 먼저 육근(六根)을 닫아야 하니,
어찌 세존만이 홀로 그렇게 할 수 있었으리오.
하나의 방해물도 마음속에 오지 못하게 해야 하니,
그런 후에야 마음의 근원이 강물처럼 맑아지리라.
교학(敎學)에 능했지만, 스님에게서 궁극은 일심(一心)의 마음자리를 밝히는 것으로 귀일한다. 스님은 비슬산·팔공산·황악산·계룡산·불영산 등을 거닐었으며, 동화사에서 주석하기도 했다. 대둔사, 백흥암, 내원암, 용주사, 남지장사, 도봉산 망월암 등에 스님의 자취가 남아 있다. 1796년 5월 보름, 병이 들어 비슬산 명적암(明寂菴)에서 입적하니 세수 51세, 법랍 34세다. 『인악집』이 남겨져 스님의 자취를 알 수 있다.
사진. 유동영
참고 자료
이종수, 「조선후기 화엄학의 유행과 그 배경」,
『불교학연구 제42호』, 2015
이대형, 「인악의첨의 독서와 교유」, 『연민학지 38집』, 2022
김진현, 「인악 의첨의 일심관 연구」, 『불교학연구 30호』, 2011
용연사, 『인악대사 추모 학술세미나』,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