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령대군 이보(李補)가 성대하게 수륙회를 7일 동안 한강에서 개설하였다. …나부끼는 깃발과 일산(日傘)이 강을 덮으며, 북소리와 종소리가 하늘을 뒤흔드니, 서울 안의 선비와 부녀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임자년 봄에 크게 무차지회(無遮之會)를 열었사온데, …기치와 일산이 해를 가리우고, 종과 북소리는 땅을 흔들었습니다.”
이는 『조선왕조실록』 중 『세종실록』에서 보이는 효령대군이 한강에서 설행한 수륙회(이하 수륙재)에 대한 기록의 일부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 야외에서 수륙재가 설행될 때, 깃발과 일산(日傘, 햇볕을 가리기 위한 일종의 양산)이 강을 덮고, 해를 가린다고 할 정도로 번(幡, 깃발) 등의 장엄물들이 많이 걸렸고, 종소리와 북소리가 하늘과 땅을 흔들었다 할 정도로 범패나 작법의 소리가 컸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성대한 수륙재의 모습은 조선시대에 제작돼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수륙회도(이하 감로탱)로 그 장면을 떠올려 볼 수 있다. 이 글에서는 대표적인 작품을 중심으로 화면의 시식대(施食臺)와 의식 승려들이 어떤 장면을 표현하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시식대와 의식 승려
남양주 흥국사에는 감로탱 한 점이 전해지고 있다. 이 작품은 금곡 영환(金谷 永煥) 등이 1868년에 그린 것으로 19~20세기 서울과 경기 지역에서 제작된 감로탱들의 시작점이 된다. 이 작품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화면 중앙의 넓은 시식대와 그 주변의 모습이다.
화면 중앙에는 공양물을 올리는 시식대가 있다. 시식대 윗면의 나이테로 보아 나무로 만들어진 것을 알 수 있고, 그 앞에는 붉은색과 녹색의 탁의(卓衣, 사찰 행사 때 불단을 장엄하는 덮개)를 둘렀다. 시식대는 굉장히 넓은데, 또 높이도 있는지 시식대 위에 공양물을 진설하는 스님은 시식대의 앞에 높인 계단을 이용해 오르내리고 있다. 시식대의 위, 가장 안쪽에는 커다란 불패(佛牌, 불·보살의 명호가 적힌 위패), 삼전패(三殿牌, 주상 전하, 왕비 전하, 세자 전하의 수복을 비는 내용이 적힌 불패)가 놓여 있다. 그 앞에는 음식을 높이 괴고, 그 위를 꽃으로 장식한 공양물과 그릇에 음식을 담고 붉은 천을 덮은 공양물들을 나란히 놓았다.
시식대의 좌우에는 용과 구름이 새겨진 흰 기둥을 세우고 그 기둥의 고리에 하얀 줄을 걸었다. 그리고 그 줄에는 ‘나무청정법신비로(자나)불[南無淸淨法身毗盧(遮那)佛]’, ‘나무원만(보신노사나불)[南無圓滿(報身盧舍那佛)]’, ‘나무백억(화신석가불)[南無百億(化身釋迦佛)]’의 삼신불번(三身佛幡)이 걸려 있다. 그리고 ‘널리 시방세계의 다함 없는 삼보님과 사부중 및 일체중생께 고하오니 모두 도량으로 오시어 이 공양을 받으소서(普告十方諸刹海無盡佛法僧三寶四部衆及群生類咸赴道場受此供)’라고 쓰여 있는 보고번(普告幡) 및 마군을 물리쳐 의식이 이뤄지는 도량을 보호한다는 의미를 담은 항마번(降魔幡), 세상에 태어날 때 지은 빚을 명부의 십대왕과 종관 권속들에게 갚는 돈을 의미하는 금전(金錢)과 은전(銀錢)이 걸려 있다. 이 밖에도 부처님께서 법회 대중의 청에 응하고 계심을 뜻하는 서기(瑞氣, 상서로운 기운)를 표시하기 위해 푸른색, 노란색, 붉은색의 3가지 천으로 만든 청황목(靑黃木)도 매달렸다.
시식대의 정면 가운데에는 발이 세 개가 달린 커다란 향로가 놓여 있으며, 그 좌우에는 고깔을 쓴 스님 두 분이 조각된 큰 붉은 초를 받쳐 들고 서 있다. 그리고 시식대 앞의 양쪽 끝에는 4개의 다리가 있는 붉은 색의 원형 받침이 있다. 이 받침 위에는 각각 붉고, 푸른 천을 어깨에 두른 큰 항아리가 올려져 있고, 붉은색, 하얀색 종이로 만든 모란꽃이 가득 꽂혀 있다. 시식대 앞에는 넓은 공간이 있어 한쪽 옆에는 상복을 입은 상주들이 무릎을 꿇고 합장을 하고 있다. 그 뒤에는 상복을 입고 있지는 않지만 합장을 하고 예를 표하는 이들이 있다. 이 상주들의 앞으로 스님 및 일반인들이 커다란 그릇에 담겨 붉은 천을 덮은 공양물을 시식대로 옮기기 위해서 두 손으로 받쳐 들거나 머리에 이고 줄지어 가고 있다.
공양물
이러한 시식대는 삼보(三寶)에 공양을 올리기 위해 준비하는 것으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인 조선 후기에 제작된 일부 작품들을 제외하고는 감로탱에서 빠지지 않고 나타난다. 시식대 대부분은 탁의로 장엄한 탁자(佛卓, 불탁)로 1단 혹은 2단으로 구성되며, 그 앞에 향로와 정병이 놓이는 작은 불탁이 하나 더 놓이기도 한다.
수륙재 관련 경전에서 시식대에 놓이는 공양물은 “하나의 깨끗한 그릇에 맑은 물을 담고 약간의 밥과 갖가지 떡과 음식 등을 담아 두라”거나 “향, 꽃, 음식 등을 두루 갖추어라”라고 하고 있다. 따라서 공양물은 처음에는 이렇듯 간단한 향, 꽃, 밥이나 떡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후 불교 의례들의 절차가 정리되면서 그 공양물의 종류나 숫자 및 구성이 정해졌다. 대표적인 것이 ‘육법공양(六法供養)’이다. 육법공양의 공양물은 ‘향(香)’, ‘등(燈)’, ‘꽃(花)’, ‘과(菓, 과일 혹은 과자)’, ‘차(茶)’, ‘미(咪, 쌀·밥)’이다. 또한 수륙재 절차를 담은 의궤에서는 ‘칠종공양(七種供養)’을 말하는데 ‘향(香)’, ‘등(燈)’, ‘꽃(花)’, ‘과(菓)’, ‘수(水)’, ‘식(食, 쌀·밥)’, ‘병(餠, 떡)’이다. 칠종공양은 육법공양과 비교했을 때, ‘차’는 ‘수’로, 그리고 ‘미’는 ‘식’으로 바뀌고, ‘병’이 추가됐을 뿐 ‘향’, ‘등’, ‘꽃’, ‘과’는 동일하다.
앞에서 살펴본 흥국사 그림에서 보이는 공양물과 비교해 보자. 시식대 위에 나란히 놓인, 높이 괴인 공양물과 그 앞에 놓인 붉은 천이 덮인 것은 정확히 확인되지는 않지만 ‘병(떡)’, ‘식(쌀·밥)’, ‘과(과일 혹은 과자)’로 보인다. 이어 향로는 ‘향’, 붉은 초는 ‘등’, 그리고 항아리의 꽃은 ‘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그림 속의 시식대에는 육법공양에서의 ‘차’, 칠종공양에서의 ‘수’가 보이지 않지만, 시식대 앞에서 아직 공양물을 옮기고 있는 이들이 있다. 따라서 이 시식대에는 공양물이 아직 다 차려진 것이 아니니 법식에 맞지 않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승무와 송경(誦經)
흥국사 감로탱에서 진설 중인 시식대 옆에는 나무 기둥을 세워 장막을 쳤으며, 스님들이 그 아래에 앉아 있다. 스님들 앞에는 경전으로 보이는 책이 펼쳐져 있는 탁자가 놓였다. 스님 중 한 명은 금강령(혹은 요령)을 흔들고 있고 그 앞에는 금강저도 놓여 있어 이들이 경전을 읽고, 의식을 진행하고 있는 도중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경전을 읽고, 의식을 진행하고 있는 스님들 앞에는 작법무를 추는 스님들이 있다. 중앙에는 고깔을 쓰고 흰 장삼과 붉은 가사를 입은 스님이 광쇠(꽹과리 같은 쇠)를 든 팔을 넓게 벌려 승무를 추고 있다. 승무를 추고 있는 스님의 좌우에는 두 스님이 바라를 들고 바라춤을 추고 있다. 그리고 이 스님들과 장막 안의 스님들 사이에는 징을 들고 치고 있는 스님과, 큰 북의 앞에서 장삼 자락을 휘날리며 북을 치고 있는 스님이 있다. 이 승무나 바라춤, 북춤 등의 작법무를 행하고 있는 스님들 주변에는 꽃이나 광쇠를 들거나, 태평소 등의 악기를 연주하는 등의 범패 승려들로 생각되는 이들도 보인다.
조선시대 감로탱에서 의식을 진행하는 스님들은 대부분 시식대 왼쪽에 보인다. 이 의식 승려들은 등받이가 높은 의자에 앉아 의식을 총괄하는 수좌 스님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 북춤을 추고 바라춤을 추는 등의 작법무를 행하고 있는 스님들과 광쇠나 나각(소라 껍데기로 만든 악기) 등을 들고 연주하고 있는 범패 승려들, 그리고 경전이 놓인 탁자를 앞에 두고 앉아 금강령이나 금강저 등을 들고 있는 경전을 읽는 송경승(誦經僧)들로 구성돼 있다.
그중에서도 경전을 읽는 송경승에 대해서 알아보자. 『조선왕조실록』에는 “…전부터 법석에서 ‘화엄’, ‘법화’, ‘삼매참’, ‘능엄’, ‘미타’, ‘원각’, ‘참경’ 등의 불경을 외었는데”라는 등의 기록이 있다. 중국 명대 관리인 갈인량(葛寅亮)이 중국의 금릉(金陵)이라는 지역의 사찰들 이야기를 적은 『금릉범찰지(金陵梵刹志)』를 보면 수륙재를 설행할 때, 『화엄경』, 『반야경』, 『내외부진언』, 『양무참』, 『법화경』, 『열반경』 등의 경전을 읽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 의식을 설행하는 과정에서 『화엄경』이나 『법화경』 등의 경전을 읽는 것은 빠질 수 없는 과정이었음을 알 수 있다.
작법무나 범패를 하는 스님들 역시 의식의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는 제일 앞에서 언급한 『세종실록』에서의 “북소리, 종소리가 하늘을 뒤흔들고, 땅을 흔들었다”라는 구절로도 추정해 볼 수 있다. 또한 중국 명대에 쓰인 통속소설인 『서상기(西廂記)』에서도 법석의 장면을 묘사하면서 “…독경 소리는 파도처럼 요란하고, 법고 소리와 바라 소리, 봄날의 뇌성이 절간을 울리듯…”이라 하고 있다. 따라서 이렇듯 북이나 바라를 치고, 독경을 하는 것은 의식의 한 부분이었음을 알 수 있다.
흥국사 감로탱에서는 송경승들이 장막 아래에 다수 모여 있으며, 따로 공간을 마련해 북춤이나 바라춤을 추고, 태평소를 부는 등의 작법무와 범패를 하는 스님들을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감로탱에서 송경승이나 범패승 및 작법무를 추는 스님들은 흥국사 작품에서와 같이 공간을 따로 나누지 않고, 의자에 앉은 수좌 스님을 중심으로 하나의 무리로 표현된다(<운흥사 감로탱> 참고). 흥국사 작품은 이러한 송경승이나 범패승 등을 다른 작품들보다 큰 공을 들여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상주와 구경꾼
흥국사 작품에서는 수륙재에 참여하는 상주들과 함께 구경꾼들도 표현됐다. 시식대 앞의 상주는 최의(삼베 상복의 웃옷), 요대(허리 부분 띠), 굴건(두건 위 덧쓰는 건) 등 제대로 갖춰진 상복을 입고 있다. 수륙재는 조선시대에 조상의 천도를 위해 널리 설행됐고, 따라서 이들은 조상의 천도를 위해 이 수륙재에 참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주들의 모습은 대부분의 다른 작품들에서도 시식대의 앞에서 절을 하거나 합장을 하는 등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광쇠와 꽃 등을 들고 있는 범패 승려들의 뒤로 ‘만세루(萬歲樓)’라는 건물이 있고 이 건물에는 갓을 쓴 선비 및 부녀자, 아이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만세루’는 바로 흥국사 대웅전 앞에 있는 ‘대방’이다. 이곳에 있는 이들은 앞에서 언급한 “한강에서 이루어진 수륙재에 선비와 부녀들이 구름과 같이 몰려들었다”는 기록과 같이 재를 구경하기 위해서 온 이들로 높다란 대방, 만세루는 구경하기에 좋은 장소였을 것이다.
앞의 설명을 다시 요약하면, 사찰의 마당 한편에 붉은색과 녹색의 탁의를 둘러 장엄한 넓고 높은 시식대가 준비되고, 그 앞에는 커다란 향로와 함께 지화(紙花, 종이꽃)가 가득 꽂힌 항아리가 놓인다. 시식대의 옆에 높다란 기둥을 세워 건 삼신불번, 항마번, 보고번을 비롯하여 금전, 은전과 청황목이 바람에 휘날린다. 시식대의 위에는 주상 전하를 비롯한 세 분 전하의 수복을 비는 삼전패가 놓이고, 스님들이 줄지어 법식에 맞춰 준비된 공양물들을 옮겨 와서 시식대 위에 놓고 있다. 시식대 옆에 친 장막 속에 앉은 스님들은 요령을 흔들며 경전을 읽고, 북춤, 바라춤, 승무 등의 작법무가 의식의 진행 과정에 따라 이뤄진다. 그리고 오늘 설행되는 수륙재를 통해 조상의 천도를 빌고자 하는 상주들은 시식대의 앞에서 정성 들여 무릎을 꿇고 합장하고 있으며, 구경하러 온 이들은 만세루에 올라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과거에 설행되던 수륙재의 모습이며, 또한 현재 설행되는 수륙재의 모습이기도 하다. 즉, 이러한 흥국사 감로탱을 비롯해 조선시대 감로탱에 표현된 시식대와 의식 승려의 공간은 바로 당시에 설행되던 수륙재의 모습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박정원
동아시아미술연구소 연구원, 동국대 미술사학과 대학원에서 조선시대 수륙회도(감로도, 감로왕도, 감로회도)를 주제로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고, 관련한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필자는 이 글에서는 다른 글들과의 통일성을 위해 ‘감로탱’을 사용했으나 이러한 불화가 그 한 폭에 수륙회의 모든 과정과 모습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수륙회도’라는 명칭이 적합하다 주장하고, 사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