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한이 갈라지고 나서부터 남한 국토의 중간지점은 어디였을까? 전국 어디에서나 비슷한 시간대에 갈 수 있는 곳, 명산과 명찰 그리고 너른 평지가 있어 많은 사람을 받아줄 수 있는 곳, 바로 보은 속리산이다.
그 시절 최고의 숲길은 오리숲이었다. 숙박 단지부터 법주사 입구까지 연결된 숲길은 오리(五里, 2km)쯤 된다 해서 오리숲으로 불렸다. 아름드리 소나무들과 벚나무, 전나무, 상수리나무 등이 뒤섞인 숲길은 넓고 쾌적하고 싱그러웠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이 길을 걸어서 들어갔다. 자동차 소리가 끊어진 숲길이니 누구나 안심하고 느긋하게 걸을 수 있었다.
길상초가 자리한 터전
법주사는 신라 553년(진흥왕 14) 의신조사가 창건했고, 776년(혜공왕 12) 진표율사의 제자들이 중창했다. 절 이름을 법주사(法住寺)라 한 것은 의신조사가 서역으로부터 돌아올 때 나귀에 불경을 싣고 들어와 이곳에 머물렀다는 설화에서 ‘불법이 머무는 절’이라는 뜻으로 지은 것이다.
금강문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사천왕문이 보이고 그 왼쪽으로 근년에 개금불사를 마친 금동미륵대불이 눈부신 위용을 자랑한다. 법주사는 국보 3점, 보물 13점, 시도유형문화재 20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 법주사 일원은 명승(名勝)으로, 법주사는 사적으로도 지정돼 있다. 어디 한 곳 허투루 볼 곳이 없는 사찰이다. 당연히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높이 솟은 전나무 두 그루가 앞에 서 있는 사천왕문에는 소조 사천왕상이 큰 키를 자랑하며 서 있다. 어느 자료에나 신라 553년(진흥왕 14)에 처음 세워진 법주사의 정문이라고 나온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금강역사가 있는 금강문이었을 것이다. 사천왕문은 고려 말에 등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철당간도 다른 사찰처럼 금강문 밖 외곽에 있었으나 사천왕문이 들어서면서 금강문이 더 앞으로 나오게 되고 철당간도 경내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법주사는 정유재란(1597) 때 석조물만 남기고 모두 소실됐고 종전 후 다시 복원했다. 사천왕문도 1624년(인조 2)에 벽암대사가 중건했으니 사천왕상도 이때 조성됐다. 이 사천왕상은 키가 5.7m에 이르는 큰 입상들이다.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사천왕상은 17개 고찰에 남아 있지만 높이가 전부 3~4m에 지나지 않는다. 2개 사찰을 빼곤 사천왕상이 전부 좌상이기 때문이다.
사천왕의 키가 크면 건물도 커지기 마련이어서 다른 건물들과 비례가 안 맞을 수도 있다. 법주사 사천왕문도 정면 5칸, 측면 2칸의 높은 건물이다. 그러나 사천왕문을 들어가며 마주하는 건물이 바로 팔상전이다. 우리나라 유일의 목조 5층 탑으로 높이가 22.7m에 이른다. 사천왕문과의 비례도 잘 맞는다. 결국 목탑의 높이를 감안해 사천왕문의 높이도 맞췄고 사천왕상도 입상으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법주사의 국보들
법주사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은 팔상전(捌相殿)이다. 삼국시대부터 많은 목탑이 세워졌지만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목탑은 법주사 팔상전이 유일하다. 법주사 목탑은 신라시대부터 있었다. 외적의 침략과 방화로 여러 번 소멸과 중건을 반복했고 조선시대에도 목탑이 있었다. 역시 정유재란 때 불에 탄 후 중건됐다. 목탑이지만 위로 올라갈 수는 없고 내부에 석가모니 부처님의 일생을 여덟 장면으로 나누어 그린 8상 탱화를 모셔놓았기에 팔상전이라고 부른다.
팔상전에는 눈여겨볼 만한 곳이 여럿 있다. 첫째는 팔상전 내부 북쪽에 봉안된 쌍림열반상 탱화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쿠시나가라 두 나무 사이에서 열반하는 모습을 그린 탱화인데 그 앞에 석가모니 부처님 열반상 조각이 있다. 한국 사찰에 남아 있는 유일한 조선시대 열반상이다.
두 번째는 2층 귀퉁이 처마 아래에 있는 야차상 조각이다. 각신(角神)이라고 해서 법당 모퉁이에서 건물을 지키는 야차신(夜叉神)이다. 연꽃이나 연잎 좌대 위에 앉아 있는데 두 손을 들어 위쪽의 부재를 받치고 있다. 입에 용을 물고 있는 야차도 2명 있다. 야차의 강력한 힘을 나타낸 것이다.
세 번째는 팔상전의 기단부다. 목탑은 여러 번에 걸쳐 중건됐지만 기단부는 면석만 장대석으로 바뀌었을 뿐 신라양식이 그대로 남아 있다. 목탑이 불에 탔을 때 기단부도 불을 먹어 많이 손상됐을 것이다. 뜨거운 열에 돌이 터져나가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일부 석재를 빼곤 기단부가 새로 만든 듯 말짱하다. 기단부를 보수하며 새로운 석재로 대체하면서도 신라양식 그대로 만들었던 탓이다.
또 하나의 국보는 석련지(石蓮池)다. 다른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의 유물이다. 화강암을 둥글고 커다란 그릇 모양으로 깎아 안에 물을 담을 수 있게 만든 석조물이다. 둘레는 6.65m, 높이는 1.95m에 달한다. 표면은 연꽃무늬를 돌아가며 새겼다. 어떤 용도로 이 석련지를 만들었을까?
‘미륵불의 하생을 영접하는 가섭존자의 발우를 상징한다’, ‘연꽃은 깨달음과 극락세계를 상징함으로 연꽃을 띄워 두는 연못이다’, ‘연꽃을 키우려는 용도다’ 등 여러 견해가 나왔지만 아직까지 확실한 결론은 없는 상태다.
그런데 이 석련지는 옛 백제권에만 남아 있다. 국립공주박물관에는 공주 반죽동 대통사지에서 옮겨 온 2점의 석련지가 있다. 대통사는 백제 성왕이 525년경에 세운 절이다. 공식 명칭은 석조(石槽)라고 부르지만 대통사에서 연꽃을 키운 석련지로 보기도 한다. 국립부여박물관에 있는 부여 석조도 왕궁에서 연꽃을 심고 그 꽃을 즐겼다는 전설이 있기 때문이다.
법주사의 세 번째 국보는 쌍사자석등이다. 신라 석등의 전형적 양식은 팔각을 기본으로 하는 팔각석등이다. 지대석부터 지붕돌까지 팔각으로 이뤄졌는데, 팔각기둥이 들어갈 부분에 사자 두 마리가 마주 서서 장대석을 받들고 있는 석등도 있다. 바로 쌍사자석등이다.
통일신라시대의 쌍사자석등은 합천의 영암사터에도 있고 국립광주박물관에 소장된 중흥사 쌍사자석등도 있다. 그중에서 법주사 쌍사자석등은 높이 3.3m로 규모도 가장 크지만 조각 수법도 가장 우수한 유물이다.
난공불락의 요새, 삼년산성
보은읍에서 속리산으로 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높지도 않은 산에 둘러쳐진 성벽을 볼 수 있다. 산성이라면 대개 높은 산이나 험준한 지형에 자리 잡아 공략하기 어렵게 쌓는 것이 일반적인데 왜 낮은 산에 이러한 성을 쌓았는지 의아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이 산성은 신라시대에 쌓은 산성이면서 우리나라 산성을 대표할 만한 산성이다. 오정산(326m), 삼년(三年)산이라고 부르는 이 산은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다. 보은은 경상북도 상주와 충청북도 영동으로 왕래할 수 있는 길목으로 북쪽으로는 청주와 연결된다. 산성의 전망대에 올라가 보면 여러 방향에서 오는 군사들의 동태를 다 파악할 수 있는 요지임을 누구나 알 수 있다.
삼년산성에 주둔한 군대는 누구에게도 패배하지 않았다. 수나라와 당나라를 물리친 고구려군은 물론이고 백제도 이 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난공불락의 철옹성이었다. 사서에 기록된 전투의 승패 기록은 149승 1패. 고려 태조 왕건도 견훤이 먼저 점령한 이 성을 공략하려다 끝내 실패하고 물러났다.
유일한 1패는 신라 822년(헌덕왕 14) 김헌창의 반란군이 점령하고 있다가 관군에 패한 것이다. 반란군의 준비가 너무 부족했든지, 아니면 내부 반란으로 무너진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치열한 전투가 없어서 별 의미가 없는 패배였다.
성벽 중에서도 동문 바깥 성벽이 가장 볼 만하다. 높이가 22m에 이르니 바라보기만 해도 아찔하다. 아무리 우수한 적병이라도 어떻게 올라갈 수 있었겠는가? 한국의 산성 중에서 한 번은 꼭 가볼 만한 보은 삼년산성은 1973년 사적으로 지정됐다.
노승대
‘우리 문화’에 대한 열정으로 조자용 에밀레박물관장에게 사사하며, 18년간 공부했다. 인사동 문화학교장(2000~2007)을 지냈고, 졸업생 모임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인사모)’, 문화답사모임 ‘바라밀 문화기행(1993년 설립)’과 전국 문화답사를 다닌다. 『바위로 배우는 우리 문화』, 『사찰에는 도깨비도 살고 삼신할미도 산다』(2020년 올해의 불서 대상), 『잊혔거나 알려지지 않은 사찰 속 숨은 조연들』(2022)을 집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