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금강역사상은 간다라나 중앙아시아의 금강역사상과는 완전히 다르다. 금강역사상의 숫자도, 서 있는 위치도, 모습도 다 다르다. 간다라에서 금강역사상은 붓다의 옆에 바짝 붙어 붓다를 밀착 수호했으며, 늘 혼자였다[도판 1]. 그러나 금강역사가 중국으로 건너온 후에는 완전히 달라진다.
간다라에서는 금강역사가 한 구였지만, 중국에서는 쌍이 됐으며, 위치도 붓다 옆이 아닌 사찰이나 석굴의 입구에 서서 사역(寺域) 전체를 지킨다. 또 그 가운데 하나는 입을 크게 열었고, 다른 하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입 모양이 서로 다른 이형(異形)대칭인 점도 특이하지만, 몸의 표현도 흥미롭다. 상반신에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으며 몸은 울퉁불퉁한 근육질이다. 양손에는 힘을 잔뜩 주어 뼈대와 힘줄이 툭툭 불거졌다. 얼굴 모습도 특이하다. 크고 부리부리한 눈은 곧 튀어나올 것 같으며, 코는 커다랗고, 입은 꾹 다물어 우락부락하다. 간다라에서 중국으로 자리를 옮긴 금강역사상은 왜 이렇게 달라졌을까?
쌍이 된 금강역사상
간다라에서 혼자 중국으로 들어온 금강역사는 곧바로 쌍이 된다. 간다라와 중앙아시아에서는 한 구였지만, 중국에서는 예외 없이 쌍이다. 서 있는 위치도 달라졌다. 간다라처럼 붓다의 옆에 바짝 붙어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문밖에 섰다. 금강역사상이 지켜야 할 범위가 훨씬 커진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중국에 금강역사상이 들어온 때가 북위(386~534) 후기인 5세기 후반인데, 바로 그때가 중국의 불교미술이 현지화되기 시작한 시기라는 점이다. 간다라와 인도로부터 받아들인 중국 불상이 인도와 간다라의 옷을 벗고 중국의 옷으로 갈아입은 때가 5세기 후반이다. 바로 이때 중국 본토에 금강역사상이 처음으로 등장했고, 처음부터 쌍으로 등장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중국 본토로 들어온 금강역사상 가운데 가장 이른 예는 5세기 후반에 조성된 운강석굴 제9굴의 금강역사상이다. 제9굴에서 금강역사상은 전실 입구 위쪽에서 찾아볼 수 있다[도판 2]. 전실 입구 전체를 하나의 목조건물로 형상화하고 지붕의 추녀 아래 좌우 양 끝에 금강역사를 세워뒀다. 운강석굴 제9굴은 처음부터 중국 금강역사가 문밖을 지키는 존재였음을 알려준다. 금강역사가 문밖에 서서 사찰 안으로 들어오는 삿된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쌍으로 등장한 운강석굴 제9굴의 금강역사상은 한 손에는 금강저, 나머지 한 손에는 삼지창을 들었다[도판 3]. 쌍으로 등장하는 대표 예는 523년에 완성된 용문석굴 빈양중동 입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도판 4, 5].
이처럼 원래 1구였던 금강역사가 중국에서 쌍이 된 것은 중국 고대의 좌우 대칭 관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중국 고대 분묘 내의 한(漢) 화상석(畫像石) 혹은 화상전(畫像塼)에 새겨진 각종 문신(門神, 문을 지키는 수호신)과 벽사 도상이 대표적이다[도판 6]. 문신은 문의 좌우에 대칭으로 서 있다. 무덤 입구에 좌우 이형대칭으로 부장된 진묘수(鎭墓獸, 무덤을 지키는 동물상)도 마찬가지다. 흥미롭게도 문신도, 진묘수도 입 모양이 서로 다른 좌우 이형대칭이다.
결국 간다라에서는 붓다 수호신이었던 금강역사가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로 와서는 사찰과 가람 전체를 지키는 수호신으로 그 역할이 확장됐다. 물론 문 좌우에 문지기가 서서 문으로 들어오는 악한 것을 물리친다는 관념은 어느 지역, 어느 시대에서나 생각할 수 있는 기본적인 사유체계다. 중국 금강역사상의 제작자는 건물 입구의 좌우에 문신 또는 역사(力士)를 세우는 것처럼, 석굴 입구에 금강역사를 쌍으로 세워두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동아시아에서는 이미 초월적 존재로 인식됐던 붓다를 굳이 금강역사가 밀착 수호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며, 그런 이유로 금강역사에게 붓다의 밀착 수호가 아닌 사역 수호의 역할을 맡긴 것이다.
입을 여닫은 한 쌍의 금강역사상
금강역사가 쌍으로 조성되면서 동반되는 현상이 바로 서로 다른 입 모양이다. 쌍으로 조성하면서 하나는 입을 열고, 다른 하나는 입을 닫은 이형대칭으로 구성했다[도판 7]. 우리나라의 석굴암[도판 8]이나 일본 호류지의 금강역사상[도판 9]도 마찬가지다. 예전에는 입을 연 상을 ‘아상(阿像)’, 입을 다문 상을 ‘흠상(吽像)’이라고 불렀다. 아와 흠은 처음과 끝을 의미하는 범어의 ‘a’와 ‘hūṃ’에서 따온 것이다. 즉 ‘아’가 입을 열어 내는 최초의 소리, ‘흠’이 입을 닫아 내는 최후의 소리이기 때문에 모든 시작과 끝을 상징하기도 하며, 또는 일체를 포함하는 두 글자로 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금강역사상이 쌍을 이루고, 입을 여닫은 상이 이미 중국 고대 좌우 대칭 관념에서 시작된 것[도판 6]이기 때문에 필자는 이들의 이름을 범어로 붙이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 실제로 인도, 간다라, 중앙아시아에는 입을 여닫은 금강역사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들 지역에서는 금강역사가 쌍으로 제작되지 않았으니 당연한 이야기다. 금강역사가 양과 음의 이형대칭이 된 것은 금강역사가 중국에 유입된 이후 쌍이 되면서 생겨난 것이니 중국 내에서 그 원인을 찾는 것이 옳다. 특히 처음 쌍으로 제작하기 시작된 때가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 북위 후기이며, 이때는 불교미술의 중국화가 이뤄진 때임은 앞서 이야기했다.
물론 북위 후기에 금강역사만 입의 개폐로 쌍을 이룬 것이 아니다. 사천왕 가운데 이천왕상(二天王像)만 표현되거나, 불상 앞에 사자를 좌우로 배치할 때도 입 모양으로 이형대칭을 이룬다[도판 10]. 중국 고대의 각종 용(俑, 나무로 만든 사람 형상), 무덤 속 진묘수도 마찬가지다. 입을 여닫은 상이 서로 한 쌍을 이룬 일이 중국에서 일어난 변화이므로 그 원인은 중국 안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처음 조성 의도와는 무관하게 밀교의 아, 흠과 결부시키는 것은 맞지 않으며, 그래서 필자는 입을 크게 연 상을 ‘양상(陽像)’, 입을 닫은 상을 ‘음상(陰像)’이라 부른다.
험상궂은 얼굴의 금강역사상
얼굴은 여러 가지 말을 한다. 표정에 따라 성스러움이나 자비로움, 근엄함 또는 기쁨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때에 따라 화가 났다거나, 누군가를 위협하고 있음을 알려주기도 한다. 중국의 금강역사상은 팔다리는 갖췄지만, 추켜세운 눈썹, 불거진 눈, 커다란 코 등의 모습은 보편적인 인간의 형상이라고 보기 어렵다. 이런 모습을 필자는 ‘이인화(異人化)’라 부른다. 얼굴 모습이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눈을 돌출시켜 강조했다.
금강역사의 얼굴은 중국에서 이인화됐다. 간다라나 중앙아시아의 금강역사상 가운데에는 노인의 얼굴도 있고, 장년의 얼굴도 있고, 청년의 얼굴도 있었다. 생김새는 다양하지만, 표정 변화에 따라 다른 역할을 보여주려는 의도는 없었다. 그러나 금강역사상이 중국에 유입된 후 모습이 달라졌다. 이는 사천왕상도 마찬가지다. 금강역사상도 사천왕상도 모두 이인화된 것이다.
중국 내의 무엇이 금강역사의 얼굴 모습을 점점 더 험악하고 괴이한 모습으로 변하게 만들었을까? 중국의 금강역사상은 간다라나 인도와는 달리 표정으로 무언가를 이야기하려 한다. 중국의 금강역사가 표정으로 전하고 싶었던 것은 ‘위협’이다. 물론 부릅뜬 눈은 금강역사가 아니더라도 악귀를 쫓는 형상으로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애용됐다.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각종 삿된 것을 물리치려면 일단 눈을 크게 뜨고 잘 살피는 것이 기본이며, 동시에 그 큰 눈으로 상대방을 위협하여 접근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흥미로운 사실은 이러한 보편성이 중국 금강역사상에 투영됐다는 점이다. 간다라나 중앙아시아의 금강역사상 역시 같은 수호의 역할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눈을 크고 돌출되게 표현하지도 않았고, 기괴한 표정을 짓지도 않았다. 이는 분명 중국 금강역사상에서 처음으로 보이는 표정 변화다. 물론 금강역사상만이 중국에서 달라진 것은 아니다. 사천왕상도 마찬가지다.
이와 관련해 중국 고대의 각종 벽사 도상을 떠올리게 된다. 실제로 눈을 크고 돌출되게 표현해 잡귀를 막으려 한 예는 중국 고대미술 속에서 수도 없이 찾아볼 수 있다. 거슬러 올라가면 상주(상商나라 기원전 1600~1046, 주周나라 기원전 1046~256) 시기 청동기의 장식 도철문(饕餮文)부터, 귀면와(鬼面瓦, 귀신의 얼굴을 그린 기와), 각종 도깨비 형상에 이르기까지 수도 없이 많다. 흥미로운 점은 부릅뜬 눈으로 악귀를 쫓는 중국 고대의 각종 형상이 북위 후기라는 특정 시기에 불교의 금강역사상 얼굴에 대입됐다는 사실이다.
이후 크고 돌출한 눈을 가진 위협적이고 과장된 얼굴 모습은 금강역사상이라면 반드시 갖춰야 할 필수 조건이 됐다. 이런 얼굴로 정형화된 금강역사상은 수·당대가 되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이인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금강역사상의 얼굴은 이인화의 정도가 심해지며 몸의 근육도 과장된다. 이러한 변화는 600년 이후부터 두드러진다. 남아 있는 대표 사례가 바로 용문석굴의 675년 봉선사동 금강역사상이다[도판 11, 12].
부릅뜬 눈, 추켜세운 눈썹, 힘이 잔뜩 들어간 목과 전신의 근육 등 기본형은 이전 시기의 금강역사상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강도가 훨씬 세졌다. 특히 당나라(618~907) 금강역사상의 대표작인 봉선사동 금강역사상을 지나 8세기 중엽이 되면 이인화의 정도가 더욱 심해진다. 성당(盛唐, 713~761) 시기의 금강역사상이 대표적이다[도판 13, 14].
그 모습은 험악하다 못해 괴이하기까지 한데 이러한 현상은 755년 안사난(安史亂)을 전후해 일어난 현상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안사의 난을 일으킨 안록산(安祿山, 703~757)과 사사명(史思明, ?~761)은 중앙아시아 사람인 호인(胡人)이다. 안사의 난을 일으킨 호인이 중국인들에게 위협적인 존재로 인식되면서 그들의 모습을 본떠 금강역사상을 더욱더 험악하게 조성한 것이다.
금강역사의 모습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바뀌었지만, 누군가를 지킨다는 금강역사의 기본적인 역할은 변하지 않았다. 다만 북위 후기인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초라는 특정 시기에 지켜야 할 대상이 붓다에서 사찰의 영역 전체로 확장됐다. 다시 말해 중국 고대 문신과 각종 역사의 이미지가 금강역사에 투영되면서 자연스럽게 입구 좌우에 쌍으로 서서 사역 수호의 역할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물론 중국 내에서의 붓다는 이미 금강역사가 바로 옆에서 밀착 수호할 필요가 없는 초월적 존재로 인식되었던 것도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금강역사는 북위 후기라는 시기에 외래종교인 불교가 중국에서 어떤 모습으로 자리 잡아 가는지 그 과정을 분명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로운 주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금강역사를 흔히 ‘인왕(仁王)’이라고도 부른다. 인왕이라는 별칭은 특히 일본에서 금강역사를 지칭할 때 많이 쓴다. 일본에서는 오히려 금강역사보다 인왕이라는 명칭을 더 애용한다. 그러나 문제는 금강역사와 관련된 어떤 경전에서도 금강역사를 인왕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이유로 금강역사가 자기 모습이나 역할과 어울리지 않는 인왕, 즉 ‘어진 왕’이라는 호칭을 지니게 됐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인왕경』이나 『인왕호국경』의 인왕이 금강역사상을 지칭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용어의 혼동은 근대 일본에서 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747년 일본 법륭사의 기록에도 분명히 금강역사라고 쓰고 그렇게 불렀다. 그러나 20세기 초에 들어서면서부터 일본에서는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금강역사보다는 인왕이라는 용어를 더 많이 사용한다. 특히 일본인들은 석굴암 금강역사를 두고 예외 없이 인왕이라고 부른다. 지금 우리의 혼동은 이때 시작됐을 것이라 짐작해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한국 사찰에는 예부터 문 양쪽에 금강역사상을 세웠으며, 그 문을 인왕문 또는 이왕문이라 불러왔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근대 이전 사찰에 인왕문의 편액을 달고 있는 예는 없다. 사찰 입구에는 대부분 천왕문을 세우고 그 안에 사천왕상을 두어 사찰로 들어오는 삿된 것을 막는다. 사찰 입구 산문에 금강역사상을 세운 예는 매우 드물다. 간혹 그림으로 남겨져 있기는 하지만, 그때도 정식명칭은 인왕문이 아니라 ‘금강문(金剛門)’이다. 어떤 연유에서 인왕이라는 속칭을 쓰게 됐든지 간에 이를 혼동해서 사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정확한 이름은 인왕상이 아니라 ‘금강역사상’이다.
임영애
이화여대 미술사학과에서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주대 교수를 거쳐 현재 동국대 문화재학과와 대학원 미술사학과 교수, 동국대 박물관 관장과 불교학술원 문화재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문화체육관광부 전통사찰운영위원회 위원, 대한불교조계종 성보보존위원회 위원을 지내고 있다. 사단법인 중앙아시아학회 회장, 서울시, 경기도, 경상북도, 강원도 문화재위원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서역불교조각사』, 『교류로 본 한국불교조각』, 『금강역사상』(2023년 올해의 불서 대상) 등과 100여 편의 국내외 논문을 발표했으며 석굴암에 대한 연구서를 준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