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권마다 다른 저승의 개념
고대 인류가 언제 죽음을 이해했는지 정확하게 알려진 것은 없다. 다만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 이전 인류였던 네안데르탈인의 유적에서 꽃가루가 묻은 뼈가 발견돼 죽은 자에게 애도의 표시로 꽃을 바친 것일지도 모른다는 추정이 나왔다. 이처럼 언제인지 알 수 없으나 인류가 죽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인 이후 죽음은 조금씩 가까워졌고 점점 죽음의 상상계는 거대해졌다.
그리고 문화권마다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언젠가부터 삶을 누린 다음에 죽음의 공간인 저승으로 여행을 떠난다는 관념도 생겼다. 이때 죽는 것을 ‘떠난다’라는 동사로도 표현한다. 정처 없이 떠도는 것이 아니라면(구천을 떠도는 건 불행한 죽음이다) 떠나기 위해서는 목적지가 있어야 한다. 죽음의 다른 이름인 서거(逝去)나 별세(別世)와 타계(他界), 소천(召天) 등에는 이런 생각이 담겨 있다.
이름이 높은 사람의 죽음을 가리키는 서거는 ‘가다’, ‘떠나다’는 뜻에서 왔고 윗사람의 죽음을 가리키는 별세와 타계는 ‘다른 세상’으로 향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그리스도교에서 많이 쓰는 소천은 하늘의 부름을 받고 ‘돌아가다’는 뜻이 담겨 있다. 이렇게 떠나고 돌아가야 할 다른 세상을 한국문화에서는 모두 알고 있듯이 저승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죽음 여행의 목적지인 저승은 어디에 있을까? 이는 그 문화권이 속한 지리 환경과 깊은 연관이 있다. 울창한 숲과 산으로 에워싸인 곳에서 살아온 사람과 바닷가에서 살아온 사람이 상상하는 저승의 지리적 이미지가 같을 수 없다. 특정한 문화를 이루는 상징은 그 문화를 키워낸 지리적 환경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농경 사회였던 한반도에서 태양은 작물을 키워내는 선한 존재지만, 견디기 힘든 뜨거운 열기를 쏟아내는 중동에서는 악한 존재로 묘사되고 이와 관련된 다른 문화적 기준이 달라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따라서 저승의 위치도 그가 속한 문화권에 따라 달라진다. 즉 강을 건너가야 하는 곳에 있기도 하고, 땅속으로 내려가야 하는 곳도 있으며, 하늘에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렇듯 저승이 어디에 있는지 그 공간 또는 공간의 성격이 정해지면 그와 연관된 여러 가지 사항이 함께 정해진다. 죽음을 여행에 비유하고 죽는 것을 이동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점에서 우리가 여행할 때 그곳이 어디인지에 따라, 즉 바다인지 산인지 또는 연회장인지 놀이동산인지에 따라 준비할 것이 달라지는 것과 비슷하다.
저승길 안내자
먼저 저승으로 가기 위한 필수적인 것 가운데 하나가 안내인이다. 그것이 뭐든 처음 하는 일은 서툴기 마련인데 사람들 모두 저승 가는 일은 아마도 처음일 것이기에 서툴고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다.
한국신화인 바리공주 신화에서 일곱 번째 공주로 태어나 버림을 받았다가 불치병에 걸린 부모를 구하기 위해 저승길을 다녀온 바리공주를 향해 죽음의 문턱에서 되살아난 부모(왕과 왕비)가 원하는 것을 뭐든지 들어주겠다고 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은 바리공주 신화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대목이기도 하다. 바리공주는 원하면 나라도 주고 돈도 주겠다는 아버지의 제안을 뿌리치고 자기가 저승길을 가면서 죽은 사람들이 저승을 가지 못하고 고통을 받는 것을 보았다면서 앞으로 그들을 안내하는 무당이 되겠다고 답한다. 바리공주가 무조(巫祖), 즉 무당의 조상이 된 것은 이런 연유다.
위의 대목에서 보듯이 ‘낯선’ 저승으로 가기 위해서는 좋은 안내자가 있어야 한다. 흔히 저승사자라고 하면 공포의 대상이라는 의미를 지닌 관용어로 사용하고 있으나 실제로 저승사자는 죽은 자를 저승으로 안내하는 존재다. 저승사자는 ‘저승+사자’인데 사자(使者)는 명령이나 부탁을 받고 일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이 맡은 것은 정해진 삶을 다 누리면 정해진 절차에 따라 저승으로 안내하고 그곳에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주는 일이다(우리 사회에 비유하면 공무원과 비슷하다). 그것은 아기가 태어나면 출생신고를 해서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것과 다르지 않다.
좋은 안내인의 조건은 위의 바리공주 사례에서 보듯이 먼저 저승에 다녀온 경험일 것이다. 절에서 죽음의 공간인 지장전이나 명부전의 주인인 지장보살의 옆에 도명(道明)존자가 있는 것도 잘 알려진 것처럼 그와 같은 이름을 가진 다른 사람이 저승으로 가야 하는데 행정적 착오로 저승을 갔다가 돌아온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도명존자도 바리공주처럼 한 번 가면 돌아올 수 없는 저승에서 돌아온 경험이 있는 존재이기에 저승으로 가는 길을 안내할 자격이 생긴 것이다.
다음으로 저승으로 가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 장례다. 장례는 삶이 종료됐음을 확정하고 삶과 격리하는 의례다. 산 자와 죽은 자가 뒤섞이면 안 되기에 죽은 자의 몸은 묻거나 태우고 심지어 티베트에서 보듯 독수리에게 주기도 한다.
오늘날 현대과학에서는 불멸하는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여기에 문화권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예부터 일반적으로 사람이 죽으면 혼(魂, 영혼)과 백(魄, 육체)으로 나뉘고 영혼은 저승으로 간다고 믿었다. 장례는 이 전체 과정을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절차에 따라 장례를 치르지 않으면 영혼은 구천을 떠돌게 된다는 믿음은 여기에서 기인했다.
저명한 프랑스의 작가 알베르 카뮈(A. Camus, 1913~1960)가 인간이 지닌 불굴의 반항 정신을 가진 인물로 제시하며 유명해진 시시포스는 그리스 신화의 등장인물이다. 신화에서 시시포스는 가족들에게 혹시 자기가 죽더라도 장례를 치르지 말라고 일러뒀다. 그리고 얼마 후 시시포스는 죽어서 저승(하데스)으로 갔다. 가족들은 시시포스의 말에 따라 장례를 치르지 않았다. 즉 시시포스는 죽었으나 죽음이 확정되지 않은 어정쩡한 상태에 놓였다. 그러자 저승의 지배자 하데스는 그를 불러 장례를 치르지 않는 이유를 물었고 시시포스는 자기가 이승으로 가서 가족들에게 장례를 치르라고 말하고 오겠다고 대답했다. 이렇게 저승에서 풀려난 시시포스는 저승으로 돌아가지 않고 신들을 조롱하며 오랫동안 살았다. 물론 모두 알고 있듯이 그는 그 대가로 죽은 다음에 굴러떨어질 바위를 계속 밀어 올려야 하는 영원한 형벌을 받았다.
이제 장례를 치렀다면 몸은 매장이나 화장, 천장 등의 여러 형태로 소멸하는 과정을 거치는데 영혼은 사라지지 않고 저승으로 가게 된다. 이른바 저승길을 가게 된다. 한국문화에서 저승길은 살던 집 대문을 나서면 곧바로 나타나고 “저승길이 구만리”라는 속담에서 보듯이 먼 곳에 있기에 저승 여행을 위한 경비인 노잣돈도 필요하다. 저승이 강 건너에 있으면 강을 건네주는 뱃사공에게 뱃삯을 내야 하는 곳도 있다.
이렇게 먼 길을 어떻게 갈 것인가? 그것은 목적지가 어디에 있는지에 따라 여러 변수가 생긴다. 앞서 보았듯이 강이나 바다 너머인지, 깊은 땅속인지, 하늘인지에 따라 달라진다. 아마 오늘날이라면 편안하게 비행기를 타고 가거나 해리포터에서 보듯 기차를 타고 갈 수도 있겠으나 저승길의 관념이 생길 때 비행기와 기차는 없었다. 땅이라면 걸어야 했고 강이나 바다라면 배를 탈 수 있었으며 하늘이라면 큰 새의 날개를 빌려야 했다. 시베리아 샤먼들은 북을 타고 가기도 했다.
바다 건너 피안으로
삼국시대 불교가 한반도로 전래한 이후 초기에는 이전부터 존재했던 신앙인 샤머니즘과 갈등을 빚기도 했으나 불교와 샤머니즘은 무불습합(巫佛習合)이라는 말에 어울리게 차츰 서로 조화를 이루며 한국의 기층문화를 형성해 왔다. 그리고 문화의 핵심 요소인 죽음의 영역에서도 상보작용을 하며 우리 문화 속에 죽음의 상상계를 풍요롭고 넓게 뿌리내렸다. 그것은 여기서 논의하고 있는 저승도 다르지 않았는데 그 대표적인 상징 가운데 하나가 반야용선이다.
반야용선은 주지하듯 불교에서 극락정토로 갈 때 타고 가는 상상의 배로 용의 모습으로 본떠서 만들어진 배다. 배를 만들어 타는 이유는 반야용선도라고 불리는 그림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바다를 건너 피안으로 가기 위해서다. 즉 불교의 이승과 저승 사이에는 바다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불교에서 유래한 반야용선은 무불습합의 영향으로 샤머니즘의 의례인 굿판에서 활용되고 있다. 반야용선은 죽은 자를 좋은 곳으로 보내기 위해 치르는 망자천도굿에서 활용된다. 망자천도굿은 지역에 따라 씻김굿, 오구굿, 진오귀굿 등의 이름으로 달리 불리는데 굿의 막판에 이르면 죽은 자의 영혼을 저승으로 보내는 굿거리가 진행된다. 한 예로 서울 지역의 새남굿에서는 바리공주가 죽은 자를 인도한다. 신화에서 바리공주는 다리를 통해 이승과 저승 사이에 있는 물을 건너 서천서역국(저승)으로 들어가는데 새남굿에서도 베로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는 다리를 만들어 만신이 그 베를 가르는 형태(베째 또는 베가르기)로 다리를 건너 저승으로 건너간다. 그러니까 이승과 저승 사이에 놓인 물을 배로 건너가지 않고 다리를 놓아 건너간다.
이와 달리 배를 타고 저승으로 건너가는, 즉 반야용선을 활용하는 지역은 전라남도의 씻김굿, 거제와 통영 등 남해안과 동해안 오구굿 등이다. 굿판에서 쓰이는 반야용선은 일반적으로 대나무 가지로 형태를 만들고 종이로 장식을 해서 용선을 만드는데 지화(종이꽃)를 만들어 꽂는 등 다채로운 색깔로 화려하게 장식한다.
동해안에서는 앞서 본 새남굿처럼 무명이나 베로 이승과 저승을 잇는 길[길베]을 만들고 반야용선이 그 길로 지나가는 모습을 연행하고 남해안에서는 굿을 크게 할 때 반야용선을 머리에 쓰고 용선춤이라 불리는 놀이를 한다. 전라남도에서는 광주리 모양으로 만든 넋당석을 달리 용선, 반야용선이라고도 부른다. 넋당석은 넋을 천도하기 전에 잠시 모셔두는 휴식처의 역할과 넋을 저승으로 보내는 저승배의 역할을 하는데 생긴 것이 배 모양도 아니고 용과 관련이 없으나 용선 또는 반야용선이라고 부른다.
이처럼 반야용선은 불교에서 용어와 역할을 빌려 굿판에서 적절하게 잘 활용하고 있는 무불습합의 좋은 사례다.
이경덕
대학에서 철학, 대학원에서 문화인류학 전공하고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학에서 아시아문화의 이해, 의례축제신화, 경제인류학 등을 강의한다. 저서로는 『새롭게 만나는 한국 신화』, 『신화, 우리 시대의 거울』, 『어느 외계인의 인류학 보고서』, 『처음 만나는 북유럽 신화』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그리스인 이야기』(전 3권), 『주술의 사상』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