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륜성왕을 꿈꾼 광개토왕] ‘광개토경 평안호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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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륜성왕을 꿈꾼 광개토왕] ‘광개토경 평안호태왕’
  • 박미선
  • 승인 2024.03.25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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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륜성왕을 꿈꾼 왕

광개토왕(재위 391~412)은 고구려 제19대 왕으로 이름은 담덕(談德)이며, 고구려 역사뿐 아니라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정복하고 통치한 ‘정복군주’다. 광개토왕, 즉 ‘국강상 광개토경 평안호태왕 國上 廣開土境 平安好太王’이라는 왕호가 정복군주로서의 그의 활동과 업적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정복군주인 광개토왕이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됐다.(?)’ 이 말이 과연 성립할 수 있는가? 전륜성왕은 불교에서 말하는 이상적인 왕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불교의 으뜸 계율은 ‘불살생(不殺生)’으로 불교의 이상적인 왕은 당연히 살생을 하지 않는 존재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정복군주는 수많은 전쟁을 치르며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을 희생시키게 되는데, 그러한 정복군주가 불교의 전륜성왕이 될 수 있을까? 정복군주와 전륜성왕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으로 보인다.

다만, 고구려 왕실에서 불교를 공인한 해가 372년(소수림왕 2)으로 광개토왕 때에는 이미 불교가 중심 이념으로 작용했다. 뿐만 아니라 4~5세기 중국에 불교가 널리 유행하면서 전륜성왕설이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광개토왕 또한 이러한 국내외적인 상황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고, 그의 활동이나 통치 이념이 불교와 무관할 수 없었을 것이다. 4~6세기 불교를 수용하고 고대국가로의 성장을 모색하던 백제, 신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바이샬리에 세워진 아쇼카 석주. 이 같은 기둥이 인도 전역에 세워졌다. 출처 셔터스톡

 

전륜성왕(轉輪聖王)이란? 

앞서 불교에서 말하는 이상적인 왕이라고 했는데, 전륜성왕은 불교만의 독특한 개념이 아니다. 산스크리트어의 ‘바퀴(cakra·륜輪)’와 ‘굴리다(vartin·전轉)’에서 유래된 것으로, 바퀴가 걸림 없이 굴러가듯 왕의 통치가 원만하게 널리 미친다는 의미로 ‘세계적 통치자’에 대한 고대 인도의 개념이다. 이 전륜성왕은 칠보(七寶)와 사신덕(四神德), 1,000명의 용감한 아들들, 그리고 사병(四兵)으로 구성된 막강한 군대를 소유하고 있다고 한다. 이 소유물들은 광대한 영토를 다스릴 수 있는 통치 수단이자 상징으로 전륜성왕의 강한 왕권을 보여준다. 

이러한 전륜성왕 개념이 불교에 수용되면서 ‘통치라는 수단을 통해 다르마(dharma, 정법正法)를 실천하는 여법한 법왕(法王)’으로 정의됐으며, 수레의 두 바퀴처럼 부처의 세속적인 짝으로 설명됐다. 전륜성왕도 부처와 마찬가지로 32가지의 신체적 특징인 32상(相)을 가진다. 이로써 전륜성왕은 전통적인 강력한 통치자로서의 모습과 여법한 법왕의 모습을 동시에 가진 존재가 됐다. 

여기에 아쇼카(Asoka)왕이라는 구체적 실존 인물이 전륜성왕 개념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인도 마우리아 왕조의 제3대 왕인 아쇼카는 인도 역사상 최초로 인도 대륙을 통일한 왕이었다. 통일 과정에서 치른 칼링가 전투 후 무수히 많은 시체와 고아들을 보며 전쟁의 비참함을 느끼고 불교에 귀의해 비폭력, 정법, 윤리에 의한 통치를 실현하고자 했다. 

또한 당시 통일 제국에는 다양한 종교, 언어, 관습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으므로 이들을 통합할 수 있는 새로운 통치 철학이 필요했다. 아쇼카왕은 ‘다르마’를 통치 철학으로 삼아 각 지역을 순행하고 그 통치 철학을 비석에 새겨 세웠다(아쇼카 석주). 이로써 아쇼카왕은 전륜성왕의 전형으로 여겨졌고, 그의 행적에 따라 전륜성왕은 위대한 통치자, 정복자이자 불법(佛法)을 실천하는 법왕이라는 이미지로 인식됐다.  

‘사르나트 주두(Sarnath Capital)’ 출처 위키미디어

 

전륜성왕 사상의 전래

이러한 전륜성왕 개념은 중국에도 전해졌고, 남북조 시대라는 혼란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왕의 ‘통치력과 권력’을 강조하는 전륜성왕이 부각했다. 북조에 할거한 북방 민족은 불교를 적극적으로 진흥시켰으며, 특히 북위(北魏)에서는 ‘왕이 곧 부처’라는 왕즉불(王卽佛)사상이 등장했다. 남조에서는 양나라의 무제(武帝)가 ‘국주구세보살(國主救世菩薩)’, 즉 황제보살로 칭해질 정도였다. 

중국의 통치자들은 전륜성왕의 모델인 아쇼카왕의 업적을 모방하며 자신이 전륜성왕임을 과시했으며, 아쇼카왕이 조성했다는 불상과 탑이 중국에 나타났다는 설화가 등장하기도 했다. 아쇼카왕과 관련된 경전인 『아육왕전(阿育王傳)』, 『아육왕경(阿育王經)』 등이 번역됐고, 아육왕탑이 곳곳에 세워졌다. ‘아육왕’은 아쇼카왕의 한자 표기며, ‘육왕(育王)’ 또는 ‘성왕(聖王)’이라고도 했다.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은 중국 남북조와 활발히 교류하면서 불교를 수용했고, 불교 수용의 주체가 왕이었던 만큼 전륜성왕 개념도 적극 받아들였다. 왕호에 전륜성왕을 표방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으로 백제의 성왕(聖王)이 있다. 그는 불교 교단을 정비하고 대통사를 건립했으며 인도에서 율장(律藏)을 들여오고 일본에 불교를 전할 정도로 불교진흥에 앞장선 왕으로 ‘성왕’이라는 왕호는 전륜성왕에서 왔다고 볼 수 있다. 5세기경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모두루묘지명」에 광개토왕을 ‘국강상 광개토지호태성왕(國上 廣開土地好太聖王)’이라 하여 ‘성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이 묘지명에서는 광개토왕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시조인 추모왕을 ‘추모성왕(鄒牟聖王)’, 고국원왕을 ‘국강상 성태왕(國上 聖太王)’으로 기록하고 있다. 고구려 사회에 불교가 널리 확산하고 왕이 전륜성왕을 표방하면서 이전의 왕들에게도 전륜성왕을 의미하는 성왕이라는 칭호로 추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아육왕을 뛰어넘은 진흥왕

한편 ‘성왕’을 유교에서 말하는 치세의 성인으로 칭송한 칭호라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신라 진흥왕(재위 540~576)이 전륜성왕을 표방했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황룡사 장육존상에 얽힌 아래의 설화가 이를 잘 보여준다.

(황룡사 창건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큰 배가 하곡현 사포(지금 울주)에 정박하였다. 조사해 보니 “서축(西竺)의 아육왕(阿育王)이 황철(黃鐵) 5만 7천 근과 황금 3만 푼을 모아 장차 석가삼존상을 주조하려고 하였으나 이루지 못해 배에 실어 바다에 띄우니 인연이 있는 나라에 이르러 장육존용(丈六尊容)을 이루기 바라며, 1불2보살상의 모형도 함께 실었다”는 편지가 있었다. 

그 마을 동쪽 높은 곳을 골라 동축사(東竺寺)를 창건하고 그 삼존불을 안치하게 하였다. 그 금과 철은 서울(경주)로 옮겨와서 574년에 장육존상을 주성하여 한 번에 이루었고, 황룡사에 안치하였다. 

- 『삼국유사』 권3 「탑상」4 황룡사장육조

여기서 서축은 인도를 말하는 것이자 부처의 땅으로, ‘서축의 아육왕’은 곧 아쇼카왕이다. 전륜성왕이라 일컫는 아육왕이 보낸 삼존불상을 ‘동축사’를 지어 안치했다고 하니, 신라 땅이 서축에 비견되는 동쪽에 있는 부처의 땅임을 은연중 드러낸 것이다. 나아가 아육왕도 만들지 못한 장육존상을 신라의 진흥왕은 ‘한 번에’ 이뤘다고 한다. 아육왕이 보낸 황철로 만들었으니 아육왕의 계승자이자, 그가 하지 못한 것을 이뤘으니 진흥왕이야말로 아육왕을 능가하는 전륜성왕임을 과시하고 있다. 

아육왕이 곧 전륜성왕인데 그를 능가하는 전륜성왕이 가능한가? 엄밀하게 말하면 아육왕은 전륜성왕 중 철륜왕이다. 『대비바사론(大毘婆娑論)』에 의하면 전륜성왕은 다스리는 영토의 규모나 통치 방식에 따라 나뉘는데, 7보를 모두 갖추고 수미 4주(洲) 즉 전 세계를 통치하는 금륜왕, 동·서·남 3주를 통치하는 은륜왕, 동·남 2주를 통치하는 동륜왕, 그리고 남염부주 1주를 통치하는 철륜왕의 4계위가 있다고 했다. 아육왕은 남염부주를 통치하는 철륜왕으로 여겨졌다.  

위 설화에 따르면 진흥왕은 아쇼카왕도 하지 못한 것을 이뤘기에 아쇼카왕의 철륜왕보다 높은 계위의 전륜성왕이 돼야 한다. 실제 진흥왕은 자신의 두 아들의 이름을 각각 ‘동륜(銅輪)’과 ‘사륜(舍輪)’이라 지었다. 동생 사륜의 경우 ‘금륜(金輪)’이라고도 한다고 했다. 두 아들의 이름이 전륜성왕에서 따온 것임을 알 수 있다. 다만 형이 동륜이니 동생은 철륜이 되는 것이 타당할 것이나, 사륜 혹은 금륜으로 표기했다. 이에 대해서는 첫째, ‘사(舍)’가 철(鐵)의 우리 발음인 ‘쇠’와 비슷한 점에서 철륜으로 보고 있다. 두 번째 해석으로 사륜을 금륜이라고 한 것은 형이었던 동륜이 일찍 죽고 사륜이 즉위해 진지왕이 됐기 때문이거나, 손자인 김춘추가 미화·윤색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이렇게 진흥왕의 아들이 동륜, 철륜이니 진흥왕 자신은 저절로 은륜왕 또는 금륜왕이 되고, 그러므로 철륜왕인 아육왕이 못한 장육존상의 조성을 단번에 이룬 일도 가능한 것이다.     

575년(진흥왕 36)에 이 장육존상이 눈물을 흘려 발꿈치까지 이르렀고, 그 이듬해인 576년에 진흥왕이 세상을 떠났다. 장육존상의 눈물을 진흥왕의 죽음과 연관시킬 정도로 장육존상은 곧 진흥왕이었다. 이 장육존상을 통해 신라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진흥왕을 전륜성왕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정복군주이자 전륜성왕으로서의 통치  

그럼 진흥왕은 전륜성왕다운 통치를 펼쳤는가? 

정법으로 통치하기 위해서는 불교진흥이 전제돼야 했다. 진흥왕은 궁궐 대신 황룡사를 창건하고 장육존상을 안치했다. 양나라에서 부처의 사리를 보내왔고(549), 진나라에서는 불교 경론 1,700여 권을 보내줬다(565). 이로써 불교진흥을 위한 모든 것을 갖추게 됐다. 

무엇보다 진흥왕은 활발한 정복 활동으로 한강 유역을 차지했을 뿐 아니라 북쪽으로 함흥 지역까지 진출했다. 이에 진흥왕은 자신이 넓힌 영토를 순행하고 순수비(巡狩碑)를 세웠다.

「북한산비」에 ‘적과 싸울 때 대왕은 덕을 밝히고 군대를 쓰지 않았다’라거나 「마운령비」에 ‘영토를 순수하여 민심을 살펴 위로하고 선물을 내려주고자 한다’라고 새겨져 있어 정복지 백성들을 안심시키고 교화하고자 했음을 보여준다. 「마운령비」와 「황초령비」에는 수행원 중 ‘사문도인(沙門道人) 법장과 혜인(法藏慧忍)’, 즉 승려를 맨 앞에 기록하고 있어 불교를 통한 교화와 통치를 지향했음을 엿볼 수 있다. 이는 아쇼카왕이 국경을 순수하고 그 지역에 석주(石柱)를 세우고, 우파굽타존자의 수행과 안내를 받았던 것과 유사하다.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국보). 북한산 비봉에 있었으며,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졌다. 
황초령 순수비 탁본. ‘사문도인(沙門道人) 법장과 혜인(法藏慧忍)’이 수행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광개토왕이 새롭게 영토로 편입한 요동 지역과 수도를 건설하고자 한 평양에 각각 탑과 사찰을 건립해 그 지역을 정비하고 지역민을 안무했던 모습과도 겹친다. 백제 성왕도 마한을 완전히 정복하고, 한강 유역을 수복하는 등 영토 확장을 꾀하며 백제의 중흥을 열었다. 이러한 변화 속 불교 계율을 강조함으로써 ‘정법’에 의한 통치를 지향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4~7세기 삼국은 서로 치열하게 전쟁을 수행하던 시대였기 때문에 정복군주는 당연히 위대한 왕으로 여겨졌다. 나아가 넓힌 영토와 늘어난 백성을 잘 통치하는 왕이 필요했고, 왕은 새로운 통치 이념이 필요했다. 이에 삼국의 왕들은 불교를 적극 수용했으며, 전륜성왕을 이상적인 군주로 인식했다. 역사적 전륜성왕이었던 아쇼카왕의 통치를 모델로 삼아 불교를 진흥시키며 ‘정법’에 의한 통치를 지향하며 전륜성왕을 표방했다. 

고구려 광개토왕, 백제 성왕, 신라 진흥왕 모두 영토를 확장한 정복군주이자 정법에 의한 통치를 꾀한 전륜성왕으로서 각각 전성기를 이끌 수 있었다.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정복군주와 전륜성왕은 이렇게 하나가 될 수 있었다. 광개토왕의 경우, ‘廣開土境 平安好太王’이라는 왕호에서 ‘광개토경(廣開土境)’이라는 영토를 넓힌 정복군주의 모습과 ‘평안호(平安好)’라는 불교로 통치를 잘한 전륜성왕이 하나가 된 모습을 볼 수 있다.    

 

참고 문헌

●  소현숙, 「백제 성왕의 대통사 창건과 양 무제」 『백제문화』 60, 2019

●  윤세원, 「전륜성왕의 개념형성과 수용과정에 관한 연구」 『사회사상과 문화』 17, 2008

●  윤세원, 「진흥왕과 전륜성왕사상 - 아쇼카 ‘따라하기’와 ‘넘어서기’를 중심으로」 『한국동양정치사상사연구』 16-1, 2017

●  임기환, 「고구려 왕호의 변천과 성격」 『한국고대사연구』 28, 2002

●  장지훈, 「불교의 정치사상과 전륜성왕」 『사총』 44, 1995

●  조경철, 「동아시아 불교식 왕호 비교-4~8세기를 중심으로-」 『한국고대사연구』 43, 2006

●  최병헌, 「신라 진흥왕대의 국가발전과 정치사상-진흥왕순수비·황룡사장육존상 조성의 역사적 의의-」 『신라문화』 54, 2019

●  河上麻由子, 「양 무제의 『아육왕경』 전륜성왕 표방과 백제 성왕」 『목간과 문자』 24, 2020

●  Pankaj Mohan, 「6세기 신라에서의 아소카상징의 수용과 그 의의」 『한국사상사학』 23, 2004

 

박미선
연세대 사학과에서 「신라 점찰법회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신라 정치사상 및 역사 교육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으며, 명지대·인천대에서 한국사 및 문화사 등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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