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과 관련해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불교 인물이 두 명 있다. 라훌라 존자와 혜능선사다. 라훌라 존자는 부처님에게서 거울을 활용한 수행 이야기를 듣고, 혜능선사는 마음을 거울에 비유한다. 이 글에서는 라훌라 존자의 거울 이야기로, 수행과 관련한 거울의 기능과 거울 속 이미지를 통한 법(法, Dharma)의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거울, 공하다는 것을 비춰 보다
라훌라 존자는 부처님의 아들로 일곱 살 무렵 출가한다. 부처님은 이제 막 출가한 어린 아들을 찾아가서 수행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일러준다. 라훌라 존자를 찾아간 부처님은 발을 씻고는 물그릇의 물을 버리면서 ‘고의로 거짓말을 하는 것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을 경계한다. 이어서 거울의 비유를 말씀한다.
“라훌라야,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거울의 용도는 무엇인가?”
“비추어 보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라훌라야, 그와 같이 지속적으로 반조하면서 몸의 행위를 해야 하고, 지속적으로 반조하면서 말의 행위를 해야 하고, 지속적으로 반조하면서 마음의 행위를 해야 한다.”
이어서 부처님은 몸, 말, 마음으로 행위를 하고자 하면 몸, 말, 마음의 행위를 다음과 같이 돌이켜 살피는 반조를 하라고 한다.
‘나는 이제 몸, 말, 마음으로 행위를 하려고 한다. 나의 이런 몸, 말, 마음의 행위가 나와 다른 사람, 그리고 둘 다를 해치게 하는 것은 아닐까? 이 몸의 행위가 해로운 것이어서 괴로움으로 귀결되고 괴로운 과보를 가져오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해치게 하고 괴로운 과보를 가져오는 것이라면 절대로 해서는 안 되고, 가져오고 있다면 중지해야 하고, 이미 가져왔다면 드러내고 밝혀야 하고 미래를 위해 단속해야 한다고 말씀한다. 그러면서 신구의 삼업(身口意 三業, 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업)에 대해서 과거, 현재, 미래 삼세에 걸쳐서 모두 말씀한다. 마지막으로 ‘계속해서 반조함으로 몸, 말, 마음의 행위를 청정하게 하라’고 하면서 「암발랏티까에서 라훌라를 가르치신 경」이 끝난다.
어린 라훌라 존자에게 부처님께서는 ‘모든 행위에 대해서 거듭 비추어 보라’는 평생의 교훈을 준다. 이는 라훌라 존자뿐만 아니라 모든 불자가 이와 같이 신구의 삼업이 유익한지, 유해한지를 살펴보도록 한다. 이제 수행을 시작하는 수행자에게 자신의 신구의를 비춰 보는 것은 좋은 방법론이 될 수 있다.
비춰 보는 방법론의 대상이 삼업에서 법의 특징으로 나아가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단계까지 나아간다. 『반야심경』에서 관자재보살은 오온(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이라는 법의 특징이 공하다는 것을 비춰 보고서(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 알게 된다. 이처럼 비춰 보는(조견照見) 수행은 초심자부터 궁극적인 성취를 이룩하는 자까지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는 수행법이라고 할 수 있다.
진리를 비추는 거울 ‘법경(法鏡)’
부처님은 평소에도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은 것 같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이 성가셨는지 『대반열반경』 「법의 거울에 대한 법문」에서 명확한 기준을 제시한다.
죽은 이후에 어디로 갈 것인지에 대해서는 어떻게 ‘지옥, 축생, 아귀를 부수고 흐름에 든 자가 되어, 악취에 떨어지지 않는 법을 가지고 해탈이 확실하며 정등각으로 나아가는 자’가 되는지를, 즉 어떻게 ‘예류자(預流者)’가 되는지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한다.
예류자의 성취는 악도(惡道)로 나아갈지, 선도(善道)로 나아갈지의 갈림길에 위치하기 때문에 중요한 이정표가 된다. 부처님을 향한 흔들리지 않는 깨끗한(부동청정不動淸淨) 믿음, 법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깨끗한 믿음, 승가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깨끗한 믿음, 그리고 계를 구족한 것, 이 네 가지 가이드라인에 비춰 보면 어떤 사람이 예류자가 됐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이 네 가지를 갖추면 예류자가 되어 악취에 떨어지지 않고 해탈이 확실하며 정등각(正等覺, 우주의 일체 만상을 두루 아는 지혜)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 네 가지를 ‘법의 거울(법경法鏡)’이라고 한다.
이때의 거울은 기준점을 보여준다. 이는 부처님이 수행에 대한 확고한 기준을 제시한 것이다. 이 네 가지를 갖췄는지를 비춰 보면 예류과의 성취 여부를 알 수 있다. 예류자는 악취(惡趣, 지옥·아귀·축생)로 나아갈지 정등각으로 나아갈지의 기준이 된다. 염라대왕은 업경(業鏡)이라는 거울을 통해서 중생들의 업의 경중을 가름한다면, 붓다는 법경(法鏡)이라는 거울을 통해서 삼악도로 나아갈지, 성자로 나아갈지의 기준을 보여준다.
법, 즉 다르마라는 용어는 크게 두 가지로 사용된다. 대문자 다르마(Dharma)일 때는 ‘가르침’, ‘법문’, ‘진리’의 의미고, 소문자이면서 복수 형태(dharmas)로 쓸 때는 ‘사물’을 의미한다. 법경이라고 할 때는 전자의 의미로 사용된다. 법경은 진리를 비춰 주는 거울이 된다.
인연으로 만들어지는 거울 이미지
『대반야경』에는 법에 대한 열 가지 비유가 있다. 이때의 법은 사물, 즉 후자의 의미다. 모든 법 또는 사물은 ‘허깨비 같고, 불꽃 같고, 물에 비친 달 같고, 허공 같고, 메아리 같고, 건달바성 같고, 꿈 같고, 그림자 같고, 거울에 비친 이미지(상像, 경상鏡像) 같고, 환화(幻化, 환영) 같다.’ 이 열 가지 비유 가운데 ‘거울에 비친 이미지’가 있다.
‘거울 속 이미지와 같다’는 것은 이 이미지가 거울이 만든 것도 아니고, 얼굴이 만든 것도 아니고, 거울을 잡은 자가 만든 것도 아니고, 자연히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인연 없이 만들어진 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거울이 있다고 할지라도 얼굴이 없다면 거울 속 이미지는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에, 그 이미지는 거울이 만든 것이 아니다. 반대로 거울 없이 얼굴만 있다고 해서 거울 속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거울도 없고 얼굴도 없다면, 거울을 잡고 있다고 한들 이미지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거울을 자연적으로 둔다고 해서 거울이 없고 얼굴이 없으면 이미지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인연 없이 이미지가 만들어진다면 거울이나 얼굴 없이도 이미지가 만들어져야 할 텐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거울의 이미지는 인연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처럼 법은 자신이 만들거나, 남이 만들거나, 자타가 함께 만든 것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인연 없이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이처럼 일체의 법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연에 의한 것이다. 일체의 사물은 반드시 인연이 필요하다. 다만 어리석기 때문에 이를 모를 뿐이다.
현실 세계의 고통과 즐거움은 인연화합에 의해서 생기는데, 이 괴로움과 즐거움의 인연을 찾는다고 할지라도 지은 사람도 받는 사람도 없다. 다만 오온의 공(空)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고, 오온의 공에 의해 받는 것이다. 관자재보살은 이를 비춰 보고서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난 반면, 어리석은 사람은 즐거움을 얻으면 집착하다가 괴로움을 얻고는 화를 내고, 이 즐거움이 소멸할 때 다시 찾고자 한다. 마치 어린아이가 거울 속의 영상을 보고 마음이 즐거워 집착하고, 집착하던 걸 잃게 되면 거울을 깨뜨려 찾는 것과 같다.
이러한 까닭에 모든 존재는 거울에 비친 이미지와 같다고 말하는 것이다. 거울 속의 이미지처럼 법은 참으로 공이고 실체가 없고 불생불멸이다. 다만 거울 속의 이미지는 인연으로부터 생기는데, 얼굴이 있고 거울이 있고 거울을 지닌 사람이 있고 비춤이 있어, 이런 일들이 화합하여 이미지가 생긴다. 이 영상이 원인이 되어 근심과 즐거움이 생기고, 또한 원인이 되고 또한 결과가 된다. 현상계의 모든 사물 또는 법은 인연으로부터 생기는 마치 거울 속의 이미지와 같다.
『화엄경』 속 서로를 비추는 거울구슬
거울의 비유를 통해서 법의 특징을 드러내는 것은 『화엄경』에서 절정을 이룬다. 세계에서 ‘세(世)’는 삼세, 즉 과거·현재·미래를 말하고, ‘계(界)’는 공간을 말한다. 계는 내입처와 외입처, 즉 안이비설신의라는 감각기관과 그 대상인 색성향미촉법이라는 감각대상이 만들어 내는 공간을 말한다. 매 순간 여섯 가지 감각기관과 각각의 고유한 감각대상이 만나면서 새로운 계를 만든다. 이렇게 우리는 매 순간 새로운 세와 계를 만들어 나간다. 매 순간 새로운 세계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세와 계에서 만들어지는 모든 존재들의 특징을 『화엄경』은 거울의 비유를 통해서 보여준다.
엘리베이터 안 양쪽 벽면에 붙어 있는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은 무한하게 많아진다. 인드라신의 궁전을 덮고 있는 그물의 그물코마다 거울처럼 비추는 구슬이 달려 있다면 얼마나 무수한 세계가 만들어질 것인가? 이때 구슬에 비치는 모든 이미지가 법의 특징을 가진다. 『대반야경』에서는 법의 특징을 보여준다면, 『화엄경』은 이러한 법의 입체성과 다층성을 서로가 서로를 비추는 거울구슬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단순히 법의 특징만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법이 이루는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이뤄진 세계가 『화엄경』이 보여주고 싶은 세계일 것이다.
인드라신의 궁전인 선견성(善見城) 위로 끝없이 펼쳐진 그물이 조금만 흔들려도, 각각의 거울구슬에는 수많은 이미지가 사라지고 새롭게 맺힐 것이다. 이러한 거울 이미지의 세계가 법계(法界)가 된다. 거울구슬이 중첩되어 이미지가 이미지를 무수히 비추고 있기에, 중중무진연기(重重無盡緣起)라고 하는 것이다.
화엄경의 주석서인 『화엄경탐현기』 1권에서는 법으로 이루어진 세계의 특징을 열 가지로 제시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일곱째가 ‘인드라망법계문(因陀羅網法界門)’이다. “찰해(刹海, 무수한 세계) 가운데 또 작은 먼지가 있고 저 모든 먼지 속에 다시 찰해가 있어서 이와 같이 중중하여 다할 수 없다.” 마치 “제석 그물의 천주(天珠)가 투명하게 밝아서 서로서로 그림자를 나타내고 그림자는 또다시 그림자를 나타내어 그리하고도 다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인드라신의 그물(인드라망因陀羅網)은 서로서로 그림자를 비추어 겹겹으로 둘러쳐 있고(이인드라망 참호영이중중以因陁羅網 參互影而重重)”, “하나는 많음과 다르지 아니하여 걸림이 없고, 많음은 하나와 다르지 아니하여 원만하게 통하고 있다(일즉다이무애 다즉일이원통一卽多而無礙 多卽一而圓通).”
법의 세계는 구슬이 반조하듯이 끝없이 비춰 간다. 하나의 구슬 속 이미지가 연이 돼서 나머지 모든 구슬에 이미지가 비친다. 이는 중첩적으로 끝없이 펼쳐지는, 중중무진연기의 모습을 보여준다. 구슬로 이뤄진 그물로 인해서 중중무진연기의 모습을 보여주는 동시에, 법의 세계가 하나로 연결돼 있는 일원론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각각의 구슬에 비친 법의 모습은 거울 속 이미지의 특징을 보여준다.
『대반야경』의 거울 속 이미지와 달리 『화엄경』의 구슬은 하나의 구슬이 아니라 수많은 구슬이 서로 비추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서로가 서로를 비추는 반조는 거울 속 이미지가 아무리 많이 비춘다고 할지라도 서로가 서로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서로가 서로를 비춰 각각의 거울 속으로 이미지는 계속 들어간다는 의미에서 ‘상즉상입(相卽相入)’이라고 할 수 있다. 상호반영적(interreflexive)이고, 상호의존적(interdependent)이고, 상호연결적(interconnective)이면서, 상호침투적(interpenetrative)이다. 거울 속 이미지가 아무리 중첩돼도 방해되지 않고 중첩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 각각의 이미지가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사사무애(事事無碍)’라고 하고, 이러한 특징을 가진 법의 세계를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라고 한다.
중중무진연기라고 할 때 앞의 ‘중(重)’은 수많은 구슬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뒤의 ‘중(重)’은 이미지의 중첩을 이야기한다. 엘리베이터 안 두 개의 거울만 가지고도, 수많은 나의 모습이 거울에 비치는데, 하물며 인드라신의 궁전을 뒤덮을 정도의 그물의 그물코만큼의 거울구슬은 말할 것이 못 된다. 그 안에서 수많은 이미지가 각각의 거울구슬에 투영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거울 속 이미지가 일정 순간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조되는 이미지가 끝없이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중중(重重)은 지속이다.
또한 엘리베이터의 양쪽 거울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하나의 거울은 나머지 거울의 모든 이미지를 포함하고 있고 반대편 거울도 맞은편 거울의 이미지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엘리베이터의 양쪽 거울은 일즉일(一卽一) 일즉일(一卽一)의 관계이지만, 거울이 그물이 되면 일즉다(一卽多) 다즉일(多卽一)의 관계가 된다. 나아가서 법은 다(多)가 아니라 일체가 되므로 ‘일즉일체(一卽一切) 일체즉일(一切卽一)’이 된다.
허망한 ‘실재’와 고정불변의 ‘실체’
불교에서 법은 ‘실재(reality)’다. 실제로 있는 존재는 법의 모습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법을 허망하다고 할 때 ‘허망한 모습이 실재이다’라는 것이다. 허망과 실재를 반대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허망의 반대말은 ‘실체(substance)’다. 실체는 고정불변의 사물을 말하는 반면, 허망은 매 순간 생멸하는 존재다. 불교에서는 실체를 비실재로 보고 허망을 실재로 보고, 실재를 법으로 본다. 거울 속 이미지가 허망하다는 것은 실재가 아니라는 것이 아니라, 법은 거울 속 이미지처럼 허망하게, 생멸하게 존재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현실과 꿈, 현실과 아지랑이, 현실과 거울 속 이미지를 반대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현실이 꿈과 같은 특징을 가지므로 현실이 꿈이고 아지랑이이고 거울 속 이미지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꿈은 허망한 것이고, 현실은 실재라는 것이 아니라 현실과 꿈은 둘 다 허망한 것이고 실재라는 것이다.
『화엄경』의 거울구슬을 통해서 우리는 연기론, 존재론, 법론이라는 세 가지 측면에서 법의 역동성을 볼 수 있다. 연기론은 일원론적 중중무진연기이고, 존재론은 일즉다 다즉일 또는 일즉일체 일체즉일의 모습 또는 사사무애법계이고, 법론은 구슬 속 이미지는 실재의 모습임을 보여준다.
『화엄경』에서 볼 수 있는 법의 역동성은 『대반야경』에 나타난 거울 속 이미지의 비유에서부터 볼 수 있다. 거울 속 이미지는 실체는 아니지만 공이고, 실재이고, 인연에 의해서 만들어진다는 법의 특징을 보여준다. 이러한 법의 특징을 비춰 보는 것은 관자재보살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방법론이 된다. 이러한 방법론은 부처님이 라훌라 존자에게 가르쳐 줬던 수행법에서 시작된다.
● 참고문헌
『대반야바라밀다경』 제400권
『대반열반경』
『대방광불화엄경』 제37권
『대지도론』 제6권
『화엄경탐현기』 제1권
윤희조
서울대 철학과 학부와 대학원 석사과정을 졸업하고,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불교학과 대학원에서 석·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불교학과 불교상담학 전공지도교수로 재직 중이며, 불교와심리연구원 원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