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화엄사로의 기행
화엄사의 역사와 문화유산은 디지털 세계에서도 접근이 가능하다.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은 2022년 처음으로 디지털 사지(寺誌) ‘지리산 화엄사’ 편을 선보였다(https://buddhaland.dongguk.edu/digitalsaji/theme/9). 이제는 마음만 먹으면 시간에 얽매이지 않는 자신만의 화엄사 기행(紀行)이 가능한 시대가 됐다.
화엄사는 통일신라시대부터 현재까지 오래된 역사와 새로운 역사가 조화를 이룬 곳으로, 유·무형의 다양한 문화유산을 소유한 사찰이다. 조선 후기 왕실 인물이 시주자로 참여한 대웅전과 각황전의 불상 그리고 영산회 괘불탱은 17세기와 18세기 불교미술을 대표한다.
화엄사는 예부터 불·보살을 모신 불전(佛殿)을 크게 대웅전과 나한전, 각황전, 원통전과 명부전 구역으로 나눴다. 현재의 가람 배치는 산문(山門)부터 시작된 문과 보제루, 대웅전과 각황전 권역으로 분류할 수 있다. ‘화엄사’ 하면 대웅전보다는 조선시대 불전 가운데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각황전이 먼저 떠오른다.
각황전 앞에 있는 부처님께 올리는 등(燈) 공양구인 석등도 6.4m로, 석등 가운데 크기가 으뜸이다. 이럴진대 정유재란(1597년)으로 불타기 전, 장육전(丈六殿, 현 각황전) 안에 모셔졌던 불상은 어떠했을까. 불전 안에는 『화엄경』을 돌에 새긴 석경(石經)도 봉안했을 테니 이 또한 얼마나 장엄스러웠을까. 이런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화엄사로의 기행은 가슴 설렌다.
조선 왕실의 안녕을 기원한, 원통전
조선시대 화엄사는 왕실과 매우 밀접하다. 대웅전, 각황전, 원통전에는 왕실과 관련된 흔적이 여러 곳에 드리워져 있다. 이 중에서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원당(願堂)의 형태를 잘 보여주는 곳이 바로 각황전 향우측에 있는 원통전(圓通願)이다. 원통전은 관음보살을 모시는 불전인데 관음보살은 두루 중생들이 원하는 바를 성취하게 해주기 때문에 ‘원통대사(圓通大士)’라고 한 데서 유래한 명칭이다.
원통전 관음보살상이 다른 불전의 불상과 달리 유리장으로 된 감실(龕室) 안에 모셔진 것은, 왕실의 안녕을 기원한 조선시대 불전의 특징 때문이다. 벽에는 각황전과 마찬가지로 왕실의 안녕을 축원하는 글귀가 남아 있다. 원통전은 각황전과 함께 건립됐고, 각황전을 중건하는 데 시주자로 참여한 영조의 생모와 연잉군(영조의 왕자 시절 이름)의 기도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조계문이자 일주문
화엄사는 조선시대 가람 배치가 잘 남아 있는 사찰이다. 1988년에 세운 산문을 제외하면, 일주문부터 대웅전까지의 조선시대 건물 배치가 정연하게 펼쳐진다. 산속에 있는 대표적인 산지 가람이라 세 개의 문을 통과해야만 부처님이 계신 중심 불전 권역으로 진입할 수 있다.
화엄사로 들어가는 첫 문은 기둥이 일렬로 서 있는 일주문이다. 일주문(一柱門)은 문의 형태를 일컫는 용어로 화엄사를 중창한 벽암 각성 스님은 ‘조계문(曺溪門)’이라 했다. 선조의 아들 의창군이 1636년에 쓴 ‘智異山華嚴寺(지리산화엄사)’ 현판이 방문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의창군은 17세기에 벽암 각성 스님이 화엄사를 중창할 때 참여한 대표적인 왕실 인물이다.
금강문과 금강역사
두 번째 문은 금강문(金剛門)인데 사찰의 수문장 역할을 하는 두 명의 금강역사가 청사자를 탄 문수보살과 흰 코끼리를 탄 보현보살과 함께 모셔져 있다. 금강역사는 간다라 미술에서 처음 등장한 호법신으로 석가모니불을 수호하는 임무를 맡았다. 중국에 불교가 전파되면서 금강역사의 역할을 확대했고, 탑의 문·석굴 사원·부처님 설법 장면에서 두 명으로 늘어났다. 이런 까닭으로 금강역사는 힘이 센 ‘나라연금강’과 석가모니불을 수호하며 비밀스러운 사적(事跡)을 듣고자 한 ‘밀적금강’으로 분화됐다.
금강문에서 만난 두 명의 금강역사는 사사자 삼층석탑 1층 탑신 서쪽 면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 나한전과 명부전에도 문의 좌우를 지키고 있는데 이때는 ‘장군상(將軍像)’으로 부른다. 금강역사는 있는 장소에 따라 금강문에서는 금강역사로, 나한전과 명부전에서는 장군상으로 명칭이 달라진다.
천왕문과 사천왕
세 번째 문은 천왕문(天王門)(보물)이다. 천왕문에는 동서남북을 지키는 네 명의 호법신인 천왕이 있다. 그들의 두 눈은 금강문의 금강역사보다 더 무섭고, 손에는 다양한 물건을 들고 있다. 북방 다문천왕은 비파를, 동방 지국천왕은 칼을, 남방 증장천왕은 용과 여의주를, 서방 광목천왕은 당(幢, 휘장)과 쥐를 들고 있다.
조선시대 사천왕의 특징은 북방 다문천왕이 보탑 대신 비파를 든 점이다. 고려시대까지 다문천왕의 상징이었던 보탑은, 중국에서 1431년에 간행된 『제불보살묘상명호경주(諸佛菩薩妙相名號經呪)』의 유입으로 서방 광목천왕으로 옮겨졌다. 다문천왕은 새롭게 등장한 비파의 주인공이 됐다.
화엄사 천왕문의 사천왕은 조선 전기에 도입된 새로운 사천왕 도상을 수용한 것이다. 비파를 든 천왕을 두고 현재까지도 북방 또는 동방이라는 논란이 있지만, 조성 연도가 밝혀진 조선시대 사천왕은 모두 북방 다문천왕으로 인식됐다.
화엄사 천왕문의 서방 광목천왕은 왼손을 허리에 대고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손에 이상한 동물을 잡고 있는데, 이것은 티베트의 사천왕에서 유래한 것으로 쥐다. 쥐는 한자로 ‘서(鼠)’이고 보배로운 쥐라고 해 ‘보서(寶鼠)’라고 한다. 티베트는 중앙아시아의 영향으로 쥐를 서방 광목천왕의 지물로 수용했다.
쥐는 중앙아시아에 있는 우전국에서 귀하게 대접받았다. 그 이유로 이 지역의 패권을 두고 인도계와 중국계가 전쟁 중일 때, 쥐들이 인도계 군대의 무기를 모두 무용지물로 만들었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화엄사의 정문, 보제루
천왕문을 지나 불전 구역으로 들어가는 관문은 보제루(普濟樓)다. 보제루는 사찰 진입로의 끝이면서 불전 영역이 시작되는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보제루를 정문(正門)으로 불렀다. 보제루에는 두 종류의 현판이 있는데 진입할 때는 ‘普濟樓’이고, 대웅전에서 마주 볼 때는 ‘華藏’이다. 화장(華藏)은 이곳이 바로 화엄 세계가 펼쳐지는 곳임을 암시한다.
가장 오랜 역사가 스민, 사사자 삼층석탑과 석등
구례 앞뜰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네 마리의 사자가 탑신을 받치고 있는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국보)이 있다. 이 탑은 8세기 중엽에 건축된 것으로 경주 불국사 다보탑 계열의 석탑이다. 이와 유사한 석탑은 각황전과 원통전 앞에도 한 기가 더 있다. 사사자 삼층석탑의 2층 기단에는 네 마리의 사자와 중앙에는 스님상이 있고, 탑의 맞은편에는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는 또 다른 스님상이 있다.
사사자 삼층석탑과 석등의 인물상은 오랫동안 많은 설화를 만들어냈다. 즉 탑의 인물상은 화엄사를 창건한 연기조사의 어머니며, 석등의 인물상은 연기조사라는 설이 널리 퍼졌다. 연기조사가 어머니께 공양 올리는 것으로 해석해 조선시대에 화엄사를 방문한 많은 문인이 이곳을 ‘효대(孝臺)’라고 칭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탑과 석등의 인물은 모두 스님 모습인데 탑의 스님상은 손에 연봉오리를, 석등 인물상은 받침이 있는 찻잔을 들었다. 두 인물상이 들고 있는 것은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물인 연꽃과 차로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대웅전과 비로자나삼신불좌상・삼신불탱
법신(法身) 비로자나불(가운데)·보신(報身) 노사나불(오른쪽)·화신(化身) 석가모니불(왼쪽)으로 이뤄진 대웅전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1634년)은 국보이고, 불상을 모신 대웅전과 불상을 장엄하는 후불탱인 삼신불탱은 보물이다.
화엄사는 1597년 정유재란 때 피해가 매우 컸던 것으로 짐작된다. 화엄석경이 봉안됐던 장육전이 이때 소실됐고, 불전 안 돌에 새긴 경전은 산산이 부서졌다. 17세기 벽암 각성 스님이 화엄사를 중창할 당시 장육전은 복원이 이뤄지지 못했고 먼저 대웅전이 중건됐다. 대웅전이면 석가모니불이 주불이어야 하는데 비로자나불이 주불로 모셔진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화엄사 문화유산은 유·무형의 산물이다. 현재 남아 있는 문화유산을 통해 당시의 불교의식을 살펴볼 수 있다. 대웅전 비로자나삼신불상과 불화에서 수습된 자료는 이를 증명한다. 노사나불상과 석가모니불상 내부에서 다양한 불교 경전과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후령통(사리를 비롯해 오곡五穀, 오보五寶, 오약五藥 등을 넣는 통)이 발견됐다. 불화에는 복장주머니와 거울이 후령통 대신 매달려 있었다. 후령통, 복장낭, 거울은 모두 신앙의 대상이 되는 불상과 불화에 생명을 불어넣는 역할을 했다.
화엄사 석가모니불상과 노사나불상 ‘시주질(施主秩)’에는 불상 조성과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가 기록돼, 약 400여 년 전 화엄사 중창 불사 당시의 상황을 알려준다. 즉 불상 조성을 주도한 벽암 각성과 왕실과의 관계를 밝힐 수 있는 자료이며, 선조의 아들 의창군과 사위 신익성, 인조의 아들 소현세자 등이 구체적으로 기록된 최초의 조선시대 자료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노사나불상과 석가모니불상의 조성 기록인 ‘시주질’에는 총 1,430명과 1,328명이 참여한 사실이 남아 있어 당시 불상 조성이 얼마나 큰 불사였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벽암 각성 스님은 1634년에 왕실 인물과 수많은 승속 인물을 시주자로 참여하게 한 대형 프로젝트, ‘화엄사 대웅전 비로자나삼신불상 조성’을 주도했던 것이다.
영산회 괘불탱
왜란과 호란이 종식된 17세기에는 많은 사찰에서 큰 야외 걸개용 불화인 괘불을 조성했다. 화엄사에서도 1653년에 영산회 괘불탱을 제작해 절 마당에 괘불을 걸고 전쟁으로 돌아가신 분들의 천도를 위한 수륙재를 열었을 것이다.
화엄사 영산회 괘불탱은 석가모니불이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 조성 당시의 기록에는 ‘掛佛幀(괘불탱)’으로만 기록됐다. 이 불화를 시주한 왕실 인물은 효종의 둘째 딸 숙안공주와 익평위 홍득기 부부로 이들은 향주머니도 시주했다.
각황전과 불상
화엄사 각황전과 석가삼불상 및 사보살상은 국가문화유산인 국보와 보물로, 후불탱은 지방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각황전은 1699년에 공사를 시작해 1702년에 완공됐고, 내부에는 3불상 4보살상을 1703년에 봉안했다. 각황전 중건 불사를 주도한 승려는 계파 성능이다. 각황전은 정면 7칸, 측면 5칸, 다포계 중층 불전으로 조선 후기 불전 건축 가운데 규모가 가장 장대하다. 화엄사 ‘覺皇殿(각황전)’ 현판은 숙종이 하사했고, 현판 글씨는 당시 명필가이며 숙종의 신임을 받았던 성재 이진휴가 1703년에 썼다.
각황전 안에는 석가여래·다보여래·아미타여래와 문수·보현·관음·지적보살 등 3불상과 4보살상이 모셔져 있다. 이 존상들은 1703년에 왕실 인물을 비롯한 인근 사찰 승려들의 시주에 의해 조성됐다.
화엄사 각황전 중건과 불상 조성의 목적은 여러 번에 걸친 숙종의 환국(換局)과 관련 있다. 숙종은 경신년(1680년), 기사년(1689년), 갑술년(1694년)의 세 차례 환국 정치를 통해 정권을 서인 → 남인 → 서인으로 교체해 서인과 남인 간의 세력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해 나갔다. 숙종의 환국 정치에는 왕실 여성들도 깊게 관여됐다. 서인 세력인 인현왕후와 남인 세력인 희빈 장씨의 갈등은 당쟁의 대리전이 됐고, 숙종은 이러한 당쟁 구도를 적극 활용한 면이 있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인현왕후는 복위됐지만 폐위 과정에서 건강이 나빠졌다. 결국 1700년 3월에 발병해 1701년 8월에 승하하고 말았다. 숙종과 왕실 인물과 환국으로 피해를 본 가문의 후손들은, 인현왕후 민씨의 극락왕생과 환국을 통해 돌아가신 분들의 영가 천도를 위해 각황전 존상의 시주자로 동참했던 것이다.
화엄사는 사사자 삼층석탑과 동·서오층석탑(보물) 그리고 화엄석경(보물) 등 통일신라시대의 문화유산이 남아 있지만, 다른 유물들은 대부분 조선 후기의 것이다. 다른 사찰에 비해 조선시대에 제작된 성보가 국가문화유산으로 많이 지정된 것은, 17세기 이후 왕실의 지원이 끊이지 않은 점도 기여했다. 인조 때 건립된 대웅전과 불상, 숙종 때 건축된 각황전과 불상, 효종 때 제작된 괘불은 왕실 인물의 시주가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화엄사의 문화유산이 후손들에게도 전승되기 위해서 국가의 지속적인 지원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진. 유동영
유근자
국립순천대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며, 인천광역시·강원자치도 문화유산위원, 경기도 문화유산전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조선시대 불상의 복장 기록과 부처님의 생애를 표현한 간다라 불전미술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저서로 『조선시대 왕실발원 불상의 연구』, 『조선시대 불상의 복장기록 연구』, 『간다라에서 만난 부처』(공저), 『치유하는 붓다』(공저), 『한국불교사 조선·근대』(공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