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의 불교] 스즈키 순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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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 불교] 스즈키 순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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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10.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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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 불교

일본 조동종의 스님인 스즈키 순류는 1959년 세수 55세에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가서 비트선이 주류이던 곳에 좌선을 행하는 정통 선불교를 전했다.

13세기 도겐 스님의 직계후손이었던 그는 샌프란시스코를 중심으로 다수의 선원을 설립하였고 6~70년대에 미국에 불교를 전한 몇 안 되는 주요인물에 속한다. 그의 별명, ‘구부정한 오이(crooked cucumber)’는 은사가 지어주었다고 하는데 ‘작고 못생겼으며 쓸모없이 구부러진 오이’를 뜻한다고 한다. 게리 스나이더, 앨런 긴즈버그 같은 비트의 문인과 앨런 와츠도 스즈키를 찾아 가르침을 듣고는 했다.

60이 다 된 나이에 미국에 와서 영어를 배우자니 무척이나 힘이 들었던 그는 한 학생이 지옥이 무어냐고 묻자 얼른 “지옥은 영어를 큰 소리로 읽는 것이다.”고 대답한 적이 있다고 한다.

조용한 성품에 작은 체구, 그리고 화려한 이벤트를 거부하는 소박함을 지닌 스즈키는 LSD 같은 마약을 통한 사이키델릭 실험이 집단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던 반문화의 중심 도시 샌프란시스코에 둥지를 틀고는 진정한 정신의 변화와 마음의 광대함을 체험하고 싶다면 마약 대신 좌선을 해보라고 젊은이들에게 권유했다.

몇 안 되는 사람이 아파트 거실에서 좌선을 하며 시작된 선방은 꾸준한 성장을 거듭하여 샌프란시스코 선원, 산타 로사시에 있는 소노마산 선원, 아시아 외부 지역에 처음으로 설립된 전문 승원인 타사하라, 유기농을 하여 선농일치를 추구하는 그린걸치, 버클리 선원, 카논도 선방, 도심 안에 위치한 초심사(初心寺) 등이 생겨나게 되었다. 스즈키는 늘 말했다.

“초심자의 마음에는 수많은 가능성이 있지만 전문가의 마음에는 별 가능성이 없다.”

60년대 말 스즈키와 티벳불교 카규파의 트룽파 린포체의 만남은 불교의 미국 전파에 더욱 힘을 얻는 계기가 되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나는 장면에는 보통 사람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대단한 감동이 있었다고 한다.

“샌프란시스코 선원에 도착한 트룽파 린포체가 스즈키 스님에게 다가갈 때 린포체의 눈에는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수없이 많은 전생에서 동시대에 만나 같은 일을 해온 동지가 이생에서 다시 만난 것처럼, 이들은 서로를 담박에 알아보았고 밀물처럼 다가오는 과거의 기억에 눈물이 터진 것이었다.”

이후 71년 스즈키가 입적할 때까지 두 사람은 짧지만 모든 것을 주는 깊은 우정을 나누게 된다. 트룽파는 스즈키에게 ‘법의 사자’라는 이름을 헌정했고, 스즈키는 트룽파에게 발우를 남겼다. 사람들은 “미국의 불교밭을 두루 일군 사람은 스즈키지만 트룽파가 오고 나서야 그 밭에서 눈에 보이는 수확을 거둘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극단적인 반대형으로 보이는 두 사람의 우정은 때로 역설처럼 보이기도 했다. 일본 조동종의 선사와 티베트 불교의 린포체, 가늘고 작은 체구와 몸집이 큰 역사형, 가능한 한 말을 절제하여 가르치는 선사와 화려하고 역설적인 말을 난사하며 가르친 린포체의 대조를 상상해보라.

스즈키가 아폴로 적이라면 트룽파는 디오니소스 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서로를 보완하며 운명적인 동지의식을 느꼈다. 두 사람이 함께 술을 마시며 대취한 적도 몇 번 있었다고 앨런 긴즈버그는 말한다.

스즈키의 다비식 때 트룽파가 관 위에 티베트의 하얀 스카프를 놓은 후 큰 소리로 울부짖는 모습은 너무나 인간적이었다고 한다. 두 사람의 동지의식은 스즈키 사후에도 계속되어 트룽파는 스즈키의 제자들에게 커다란 정신적 힘이 되었다. 트룽파는 스즈키의 제자들을 나로파 대학에 여름학기 교수로 초빙하기도 했고, 스즈키의 제자들은 트룽파의 강연회에 대거 참석하여 성원하였다.

캘리포니아 주의 깊은 산속 소노마산 선원에 스즈키의 부도탑이 있다. 조용한 오솔길과 나무로 둘러싸인 아늑한 곳에 작은 돌로 둥글게 가장자리를 두르고 한가운데에는 타사하라 강에서 끌어올린 커다란 황금빛 돌이 놓여있는 곳이다. 돌이라기보다는 좌선에 들어있는 선객처럼 보이는 이 돌은 스즈키가 생전에 손수 골라놓았다고 한다. 사람들이 그 돌에 물을 붓고 반야심경을 욀 때 스님의 이런 말이 들리는 듯하다고 한다.

“나를 보고 싶으면 이곳으로 오라. 그리고 좌선하라. 좌선하는 그 곳에 나는 언제나 있느니. 고요히 바위처럼 그렇게 앉아 있으라.”

미국이라는 전혀 다른 문화권에 들어와 무에서 불교를 일구었던 그는 ‘돌에 나무를 심고 뿌리가 내리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은 막막한 심정을 자주 체험했다고 한다. 그러나 단 한 사람이라도 법문을 들으러만 와준다면 몇 시간이고 고심하며 철저한 준비를 하였다. 기침과 감기를 달고 사는 그이기에 오래 살고 싶으면 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아무리 권해도 그는 들은 척도 않고 아무런 진전도 없어 보이는 일을 계속했다.

1966년 샌프란시스코 선원에서 공부를 시작한 지 5년째 된 리처드 베이커(Richard Baker)는 가장 눈밝은 납자였다. 그 동안 수백 명의 사람들이 스즈키에게 불교를 배웠고, 삶에 크고 작은 영향도 받았고, 법사가 될 가망성이 보이는 사람도 몇 있었지만 가장 장래가 촉망되는 제자가 베이커였다.

이 해 스즈키는 베이커에게 대외적으로 ‘스즈키의 제자’라고 말해도 좋다는 허락을 한다. 이후 베이커는 샌프란시스코 선원의 제2인자가 되어 행정과 수행의 큰 틀을 짜게 된다.

스즈키는 규칙이란 따스하고 친절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므로 글자 그대로 따를 필요도 없는 것이요, 규칙이 없는 데 일부러 만들 필요도 없는 것이라고 했다.

“규칙이 필요하기는 하지. 저 구석에 있는 빗자루 보게. 솔있는 쪽으로 세워져 있지 않나? 그렇게 두면 솔이 굽어져서 좋지 않거든. 그래서 빗자루는 손잡이가 밑으로 가게 세워놓으라는 게 규칙인 게야. 그건 좋은 규칙이지.”

스즈키는 정원을 무척 좋아했다. 밭을 일구고 화초를 기르는 것이 삶의 일부였던 것이다. 그는 불교의 기쁨은 다만 밭을 일구는 기쁨이라고 했다.

“불교 공부는 이미 선조들이 다 완성하였기에 우리가 할 일은 그저 그것을 보존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마치 음식을 냉장고에 보존하듯이 말이다.

불교라는 음식은 냉장고에 들어 있지 않다. 여러분은 밭을 일구어 그 음식을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빈 밭을 보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지만 씨를 뿌리고 가꾸면 곡식이 자란다. 불교의 기쁨은 바로 밭을 가꾸는 기쁨이다.”

깨달음을 갈구하는 사람들에게 “무엇 때문에 깨달음을 얻으려는가? 깨달음을 얻은 후에 더 마음에 들지 않을 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말하며 순수한 수행 그 자체로 돌아갈 것을 말하곤 했던 스즈키는 1971년 세수 67세에 입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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