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현행원품에는 부처님의 한량없는 공덕을 말씀하시고 이 공덕을 성취하려면 열 가지 행원을 닦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열 가지의 첫째는 모든 부처님께 예경하는 것이고, 둘째는 모든 부처님을 찬탄하는 것이다.
예경에는 여러 뜻이 있지만 그 근본은 허망을 버리고 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찬탄의 극치는 감사이다. 그러므로 감사는 예경과 찬탄을 하나로 묶는 것이라 하겠으며 그것은 곧 여래공덕의 성취 법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감사에는 부처님의 불가사의한 위덕이 따라다닌다. 어찌하여 감사에 여래의 공덕이 따른다고 하는 것인가?
대개 만인은 누구나가 부처님 공덕을 풍성히 갖고 태어났으며 이 땅 구석구석에는 부처님의 자비공덕이 가득 실려있는 것이다. 범부는 이것을 모르고 엉뚱한 계교를 한다. 그런데 감사하는 것은 바로 이 사실의 긍정이며 믿음의 표출이다. 그것은 끝없이 펼쳐져 있는 무량청정 국토의 무량공덕을 우리 앞에 나타낸다.
원래 이것만이 있는 것이다. 원래로 중생이니 번뇌이니 죄악이니 업보니 고난이라 하는 것은 기실 없는 것이며 이름조차 없는 것이다. 있다고 보고 어루되는 데서 중생세계는 이루어진다. 감사는 이러한 전도몽상을 단번에 끊어버리고 즉시 부처님의 무량청정 공덕을 자신 앞에 현출시키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감사에는 한량없는 불가사의 공덕이 따를 수밖에 없다. 여기에는 이유가 없다. 조건이 없다. 많은 수행도 어려운 고행도 오랜 염불도 자비 보시 공덕도 필요 요건이 아니다. 오직 합장하고 진정으로 감사할 때 단번에 부처님의 은혜를 수용하는 것이다. 그것은 본래로 있는 진리실상을 긍정하기 때문에 실상공덕이 나타나는 것이다. 천년 묵은 암흑의 동굴이라도 빛을 받을 때 즉시에 밝아지듯이 감사하는 찰나에 본분 공덕은 넘쳐 나는 것이다. 참으로 신기하고 불가사의한 감사의 공덕이다.
혹자는 『나는 행복하다. 누구의 덕도 아니다. 누구에 감사하랴』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는 진리실상을 모르는 망견의 망언이다. 이 사람이야말로 『찰나무상』에서 영원과 평화를 착각하는 가련한 중생인 것이다.
감사하자. 오늘의 이 현실 속에서 감사하자. 부처님께 감사하고 부모님과 아내와 가족에게 감사하자 모든 이웃, 모든 형제 모든 일에 감사하자. 그곳에 자비하신 여래공덕은 넘쳐갈 것이다. 실로 감사는 부처님의 무한자비 공덕의 문을 여는 성스러운 작법임을 명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