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서 부는 바람이 유난히 매섭게 느껴지는 때가 있다면 음력 정월일 것이다. 망중한(忙中閑)이랄까? 생활에서 한치도 빠져 나오지 못하는 여자신도님들도 정초가 되면 모든 일을 뒤로 미루고, 지극히 정성어린 마음으로 절을 찾아서 새해 가정의 행운을 기도한다.
종교에 대한 이론이나 깊은 뜻을 하기 이전에, 한 가정을 위하여 하는 지극한 발원(發願)을 머금은 사심(私心)없는 가슴들이기에 마주치는 눈길마다에 심심(甚深)한 합장을 보내고 싶을 뿐이다.
더우기 촌박(村朴)한 할머니 보살님이 그 거친 손등을 애써 감추려 하면서 따스한 양말을 조심스럽게 내놓으며,
『스님 발 시려울 때 신으시우.』
하고 치어다 보는 그 눈길엔 새삼 자신의 뒷모습을 돌아다 보며, 잿빛 옷자락의 무게를 다시 한번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몇 해 전부터 이 때가 되면, 모르는 결에 손가락을 헤어보는 버릇이 생겼다.
다섯 손가락에서 손을 바꿔야 하는 해를 보내면서 그간 무심히 살았던 두고 온 노부모님이 생각키우기도 한다. 공기에 쌀을 항상 담아 두신다던, 바람 소리만 크게 들려도 밖을 내다 보신다는 어머님의 아픈 가슴에 비추어, 어제와 또 내일의 나의 행을 채찍질 해보며 남모를 부끄러움을 느끼기도 한다. 한때는 거칠어진 손과 단련된 신체로 열심히 정진함을 자랑하고 싶었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해가 바뀜에 따라 어머님의 아픈 마음에 비해서 반도 채 미치지 못하는 여린 마음이었음을 느끼게 됨은 겹쳐지는 연륜의 탓일런가.
유구개고(有求皆苦)라 해서 어떠한 욕망도 갖지 말자던 바램으로, 그리하여 오직 신심만으로 산과 들을 누볐던 행자시절은, 전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다시는 그처럼 살 수 없으리 만큼 최선을 다해 살았으면서도 지금보다 더 큰 아집(我執)을 버리지 못한 채 고심하고 있을 때였다.
하루는,
『이 세상은 누가 만들었읍니까?』
하고 간절히 여쭈었을 때,
『네가 만들었지, 누가 만들었냐.』
는 별당 지선(智禪) 노스님의 일할은 그간 옳다고 국집하며 부둥켜 안고 살아온 많은 생각들을 일시에 와르르 무너지게 하였다. 그 집착(執着)으로 하여 가지가지 떠 올렸던 것들이 모두 한갓 알음알이에 지나지 않음을 느꼈을 때, 문득 하늘을 치어다 보며, 자꾸만 웃음이 나오고 그러다간 목이 메 이고 괜스레 혼자서 고갤 끄덕였던 기억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그 뒤론 이제까지 보아 온 세상과는 다른 안목으로 모든 사물을 접할 수 있었고, 되도록이면 마음을 머무르지 않기 위하여 노력하며 살고저 했다.
화두(話頭)가 무엇인지조차 모르면서도, 울고 웃으며 생각하는 내가 무엇인가 하는 숙명적인 의심을 품고서 묵묵히 살았던 초심(初心)의 시절이 생각키운다. 삭발한 머릴 보며 의혹의 눈길로 쳐다보는 사람들과 마주칠 때마다 문득 산중 재상 도홍경의 시귀를 읊조리고 싶어진다.
산중(山中)에 무엇이 있는가?
고개 위에 흰구름만 많도다.
다만 스스로 즐거워 할 뿐이언정
가져 그대에게 줄 수는 없노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