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우리 산동네, 키가 작은 최씨 할머니는 구멍가게 주인인데 라면을 아주 잘 끊이기로 소문이 났습니다.
손가락 마디만한 골파와 맵싼 고춧가루 양념에다가 달걀을 먹음직스럽게 풀어서 끊인 라면이 속을 개운하게 합니다. 얼큰한 국물이 시원하고, 큼지막하게 썰어 놓은 깍두기가 감칠맛이 나는 게 400원짜리 라면치고는 근사해서 톡톡히 본전을 뽑고도 남습니다.
그러기에 배가 출출하거나 입안이 괜시리 심심하다 싶으면 할머니의 얼큰한 라면 한 그릇에다 간단히 소주라도 두어 잔 곁들이면 산동네에 사는 우리들에겐 딱 그만인 것입니다.
이왕 말이 나왔으니 좀 더 밝히자면, 할머니는 마음 씀씀이도 너그럽고 넉넉한지라 호주머니가 가벼운 사람에겐 외상도 곧잘 주곤 합니다. 그래선지 몰라도 동네 총각들은 할머니에게 수양딸도 있겠다 해서 할머니를「장모님, 장모님」하고 부르면서 가까이 따르는 것입니다.
언젠가 동네 사람들 여럿이 좁은 구멍가게를 온통 차지하고서 술을 마신 적이 있습니다. 그때 내 이웃에 사는 건실한 청년이 소주를 한 병 더 청하면서,
『할머니, 아니 장모님, 올해 따님의 나이가 몇이지요?』
하고 진지하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짐짓 화난 척하면서 청년을 나무랐습니다.
『아니 이 사람이 남의 처녀아이 나이는 왜 묻니? 자네같이 술이나 잘 마시는 장사꾼에게 내레 딸을 줄 것 같니? 혹시라도 앙큼한 생각일랑 품지 말라구야, 알갔니? 우리 딸아이레 비록 배우지 못해서 지금 메리야스 공장에는 다니지만 누구보다도 착하고, 정신이 똑바로 박힌 숙녀야요, 기럼, 숙녀고 말고…』
그러면서도 할머니는 움푹 패인 양쪽 볼에 잔잔한 웃음을 감쪽같이 지울 수는 없는가 봅니다. 말은 말라빠진 장작개비처럼 거칠게 하는 것 같지만 장모님 소리를 듣는 게 싫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어쩌면 벌써 누군가를 슬쩍 눈여겨 두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무튼 우리 동네 남자들을 모아 놓고 인기투표라도 한다면 할머니가 거의 일등 할 게 틀림없습니다.
싱거운 소리일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나는 요즘 들어서 할머니에게 담배나 술 한 병쯤은 공짜로 얻는 기술을 가끔 부려봅니다. 즉,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서 남북대화가 부드럽게 되어 간다는 소식이 들리면 그런 날은 기술을 발휘해도 좋은날입니다.
『할무이, 요새 기분이 산뜻하신가 봐요, 그나저나 담배가 떨어졌는데 은하수 한 갑만 주이소 』
『맞아요, 내레 오늘 기분이 매우 좋아요, 좋고말고, 긴데 싱싱하게 젊은 사람이 비실비실하니 은하수 한 갑 주이소가 뭐니? 자, 기분이니까니 솔을 그냥 주갔어. 대신 돈 많이 생기걸랑 갚으라구. 알갔니, 모르갔니?』
그렇습니다. 할머니는 오랜만에 다시 세상 살맛이 생긴 것입니다. 10여 년 만에 재개된 남북 적십자 회담과 앞으로 있을 고향 방문단, 예술단의 상호교환이 벌써부터 할머니의 감춰진 눈물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국민학교 때 배운 노래에도 있듯이 우리의 소원은 한결같이 통일입니다.
1 · 4 후퇴 당시 고향인 황해도 사리원을 떠나 월남하다가 아버지를 포탄에 잃고, 어머니와 동생들까지 뿔뿔이 흩어져 헤어진 후 고아아닌 고아가 된 채 결혼도 하지 않고 지금껏 살아온 할머니의 유일한 소원도 통일 뿐입니다.
우리 산동네 사람들이 돈을 모아서 고향을 찾아가는 할머니의 여비라도 보탤 수 있는 날이 언제 올는지 아무도 모르는 노릇이지만 할머니는 항상 맛있는 라면을 끊여 주면서 그날을 기다릴게 틀림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동네 사람들도 그 얼큰한 라면 한 그릇 속에 소중하게 담겨 있는 희망 한 그릇씩을 비우면서 얼씨구절씨구 좋다 하고 춤출 날을 기다립니다.
[보리수 그늘] 희망 한 그릇
- 관리자
- 승인 2007.12.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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