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있을 때의 일이다. 변호사인 미국인 친구가 근무를 마치고, 뉴욕시내로 저녁식사를 하러 가자고 전화를 걸어왔었다. 그 친구나 내가 운전해서 한 시간쯤 걸리는데 근처에도 좋은 곳이 많건만 구태여 시간을 돌려서 복잡한 그곳까지 저녁을 먹으러 가야 하는데는 한국 음식에 환장하다시피한 그나 내나 그곳에서만 그 음식을 먹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서로가 자기 일들을 마치고 떠나자니, 밤 아홉시가 넘어 도착하게 되었고, 그러자니 잠깐 들러 우동이나 해장국 한 그릇 먹고 나오는식이 아닌, 한 잔 해가며 이것 저것 다 해 치우고 나오자니 밤 열 한 시가 넘은 것이다.
뉴욕시내에서는 밤 열 한시가 넘으면 다음날 조간신문이 나온다. 나야 나 혼자니 누가 뭐라 할 사람도 없지만, 전화로만 연락을 해놓고 이렇게 늦도록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걱정해 주는 친구인 나나, 본인 자신의 심정은 한시라도 빨리 돌아 가고픈 것이다. 돌아오다가 신문파는 곳을 일부러 들러서 신문을 사가지고 왔고, 그 이후에도 그런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번도 빼놓지 않고 신문을 사오곤 했던 것이다.
다음날 새벽이면 집에 신문이 배달되어 받아 볼 수 있으면서도 적어도 몇시간 후인 다음날 아침에 보는 사람들보다 먼저 소식을 알기 위해서 그랬던 것이다. 그럴때마다 싸워서 이겨야만 살아갈 수 있는 전쟁터와 같은 각박한 세상의 삶을 그리 달갑지않게 새삼 느끼곤 했었다. 그런 속에서 살아온 나를 보고 마음의 여유란 글을 쓰란다.
역시 미국에 있을 때의 일이다. 맡겨진 일 배워야 하는 일 가르쳐야하는 일들을 하다보면 정해져 있는 저녁식사 시간에 미안쩍게 늦는 일이 한 두번이 아니라서 , 그때마다 묘한 웃음으로 미안을 표시하는 것도 귀찮을 정도였다. 그리고나서 좀 어물 어물하다가 책상에 앉다 보면 밤 열 두시가 되는 것이 예사였고 그 시각만 되면 무슨 일이 있어도 책을 덮고 일어나는 버릇이 있었는데 일어나선 잠자리로 가는 것이 아니라, 술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주제에 차를 몰고 술집을 찾아가서 한잔하고 돌아오거나, 커피집으로 가서 커피 한 잔 들고 들어와야만 무엇인가 풀려 잠을 이룰 수 있는 묘한 습관이 있었다.
이곳에서야 충청도나 제주도에 가서 살면 모를까 이곳에서는 파출소에서 신세를지기 전에야 그 아름답지 못한 습관을 누가 그대로 놔두겠는가! 같은 지붕 밑에서 매순간마다 쫓기며 살아가는 줄 알던 그 사람들, 아침이면 아침커피를 들 시간이 없어 커피잔을 차속으로 갖고 들어가서 한 손으로는 운전을, 또 한 손으로는 커피를 마시며 출근하는 그 사람들이 나의 그 어리석은 짓을 곱게 봐주었을 리 없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