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처럼, 노이로제니 스트레스니 하는 상태가 팽창하는 세상에 마음의 여유란 듣기만해도 신선하고 황홀한 언어다.
내가 어릴 때는 학교에서나, 집에서 급하면 돌아서 가거라 혹은 화 나면 열까지 세어라 라는 교육을 받았는데 그 뜻인즉 마음의 여유를 가지라는 것이리라.
마음의 여유를 갖지 못해서 사람들은 얼마나 괴로워 하고, 잠 못 이루는 밤을 전전긍긍하는가. 쇼크로 쓰러졌다느니, 죽었다느니 하는 일까지 있지 않는가?
나더러 언제나 여유가 있어서 부럽다는 친구가 있다. 예를 들면 원고 마감이 지나고 지나서 단 한 시간의 연기도 어려운 때, 나는 잠깨기 시계를 새벽 두시쯤에 맞춰놓고 열시쯤 부터 잔다.
시계가 자는 중에 요란스럽게 울리면 물론 잠깐 잠이깬다. 잠은 깨나 머리가 띵하고 컨디션이 좋지 않다. 그러면 자문자답한다.
너는 살려고 글을 쓰는가?
그야 살려고 쓰지.
그러면 푹 자는게 낫겠다.
그렇지!
이리하여, 노상 쓸려고 마음 먹고, 메모까지 완전히 해 놓은 소설을 차일 피일 미루고, 금년 들어서 아직 단편 한편 밖에 발표하지 못했다. 이런 것을 과연 마음의 여유가 있다고 할 수 있을런지?
일제시에 체력장이 있었다. 600미터 달리기를 하는데 교정을 두 바퀴를 돌으니까, 눈앞이 캄캄하고 숨이 가파서 금방 죽을 것만 같았다. 내가 열두살 때의 일이다.
한참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러 모든 규울이 엄하기 이를 때 없었다. 달리기를 포기하거나하면 그야말로 어떤 벼락이 떨어질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어린 마음에도
제기럴, 달리기하는 것도 건강하기 위해서라는데 달리다 죽다니 본말전도야! 하고 생각하게 되자, 그만 코스를 이탈해 버렸다. 심판관은 내가 여섯바퀴 돈줄 알고
한말숙 일등! 하고 소릴를 치며 칭찬을 했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그를 쳐다보고 나와 함께 달리던 친구들은 허덕거리면서도
아니에요, 재는 포기한거예요 하고 소리를 쳤으나 심판관의 귀에는 안 들렸다. 친구들이 약이 올라 죽겠다고 법석을 치는 통에 심판관 선생님에게로 가서, 일등이 아니라 포기한 것이었다고 하니까, 그 일본인 선생님은
알았어, 알았어 하며 내 단발머리를 쓰다듬고는, 돌아서버렸다. 무엇을 안다는 것인지? 지금도 그 뜻을 알 수 없다. 일등이건 포기건 마찬가지라는 뜻인지. 체력장같은 것, 있으나 마나라는 뜻인지 지금도 그 표정을 상기하면 그야말로 여유있는 너그러움을 감득할 수 있다.
인생사 매사는 대소를 막론하고, 다 같이 소중해서 목숨을 걸고 성의를 다해서 대해야 하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손바닥으로 물을 푸듯이, 손가락사이로 더러 물을 흘려버리는 것도 유연한 인생의 멋이 아닌가? 인생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것이다. 나는 항상 인생은 길고 오늘 안 되면 내일 될 것이라는 기분으로 산다. 안된들 또 어떠냐? 다만 성의를 다해 노력을 하고 있는가가 문제지, 결과는 나중 문제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