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나는 산에 오른다. 기척에 놀라며 푸드득 거리다가 하늘로 날아가는 산비둘기, 풀벌레 울음, 싱그러운 풀잎들과 교감(交感)하다 보면, 머리 구석에 머물러 있던 일상의 생활의 찌꺼기가 스물스물 가라앉고 산바람이 정수리를 통해 힘차게 들어온다. 온몸 구석구석까지 상쾌함이 번져오고 이미 하루 생활은 그러한 기분으로 유지된다. 하지만 나는 산에 나흘을 계속 올라가 본 적이 없다. 새벽녘 게으름이 나의 의지를 어김없이 짓뭉게 버리기 대문이다. 산에 올라가야 한다는 생각만 마음에 지닌채 열흘이고 보름이고 그냥 지나가 버린 적도 있다.쉽사리 포기하지도 않고 좀 더 강한 진념으로 생활화 시키지 못하면서 어정쩡한 가운데 벌써 한해가 저물어 간다. 이러한 나의 생활의 단면은 어느 의미에서 내가 지니고 있는 본질적 속설중의 하나인지도 모른다. 무신론자 앞에서 유신론자가 되고, 유실론자 앞에서 무신론자가 되어 한없이 양쪽을 들락거리면 때로는 철저하게 무장된 이기주위를 본다.
얼마전에 가깝게 지내던 한 친구의 죽음을 보았다. 처음엔 신경쇠약증세였다. 나는 친구의 형으로 가장하여 친구 어머니와 뒤쪽에 앉았고 의사의 질문은 시작됐다.
[죽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느냐?][죽는 방법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느냐?]자식보다 더 창백해간 어머니의 경련, 친구의 증세는 더욱 악화되고 무더운 여름내내 병원을 순례하며 알지 못할 병명들이 첨가 되더니 결국 뇌에 기생충이 들어 갔다는 최후 통첩을 받고 집으로 옮겨졌다. 그는 항상 잠에 취해 있었고 깨어도 완전히 촛점을 잃은 두눈이었다. 나는 소리 지르고 악다구리 썼다. [나를 모르겠니? 이 새끼야] 그의 입술이 씰룩거리더니 말이 구역꾸역 기어 나왔다. [.......나, 식물............. 인간야..] 어느날 그는 누운채 계속 눈물을 쏟았다. 그리고 이틀 후 죽었다. 자기의 죽음을 예감한 것이다. 그의 죽음은 나에게 그저 슬픔, 그것 뿐이었고 나의 생활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단지 어린 시절을 제외 하고는 용이주도하게 기피 해왔던 [죽음] 그 뿌리에 대하여 부딪쳐보곤 고독감에 전율을 일으킨다. 그리고 바른 속도로 일상의 테두리로 돌아가려고 애를 쓴다. 그리하여[목련화] [사랑]을 듣기 위해 레코드판에 쌓힌 먼지를 털든가 고우영의 [삼국지]나 [수호지]를 보면서 키득거린다.
아아, 내일은 다시 산에 올라야지..
(숭실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