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두수상
봄이 오면 골치가 아프다. 흩날리는 먼지도 싫고 꽃가루도 싫다. 남들은 봄철 행락(行樂)이라 해서 산ㅇ로 들로 모두들 들떠 떠나는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방구석에 틀어박혀 봄을 앓는다. 가을은 가을대로 조악의 궁상이 못마땅하다. 봄은 봄대로 눈부신 햇살과 주책없이 설레는 가슴앓이가 싫다. 무성한 녹음, 한여름의 찌는 더위와 살을 에는 바람, 한겨울의 맵고 짠 추위가 차라리 이 어설픈 봄앓이 보다야 낫지 않으랴.
내가 봄앓이를 하기는 아마 나의 생리적 조건에 연유하는 바가 많을 것이다. 나의 봄앓이는 봄철마다 터져 나오는 대학가의 데모 열품과도 무관하지 않다. 또 이 나라의 짧은 역사적 연륜에도 봄앓이는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본다. 이제부터 나의 생리적 봄앓이를 연결 짓는 무슨 고리가 있는가, 살펴보아야 하겠다.
태어나면서부터 나는 선병질(腺病質)적인 생리적 결함을 지니고 이 세상에 나왔나 보다. 생장샘의 잘못인가 봄철이면 입가에 허연 생채기가 아물 줄을 모르고 몇 달을 두고 계속되었다. 초등학교 신입생을 한 줄로 늘어세운 교장선생님은 구부정하게 애늙은이 모양 허리가 굽고 얼굴색이 노오란 나에게 ‘선병질’이란 딱지를 붙여 주셨다. 그 뒤로 나의 별명은 ‘애할아범’이었다. 나가 놀 줄도 모르고 늘 방구석에 박혀 들입다 책만 보았다. 가뜩이나 병약한 체질에 운동도 모르고 책만 보는 나에게 별다른 영양도 없이 짜고 맵기 만한 푸성귀 음식은 나의 입병을 가속화 시켰을 것이다. 아무튼 이 입가의 찢어져 헐은 자국은 흔히 남들은 입이 커지느라고 그런다는 식으로 예사롭게 얼버무려졌는데, 나에게는 늘 육체적 고통뿐만 아니라 심리적 수치감마저 안겨주는 고약한 애물이었다.
봄이면 극심한 일교차 때문에 걸핏하면 감기가 들어 약간의 신열이 있다하면 다음날 아침 입가에 스멀스멀 물집이 잡히고 벌겋게 부풀어 오르며 끈끈한 진물이 흘러내리면서 바깥 먼지와 잡균의 서식처를 제공한다. 일단 부풀었다하면 진물이 꾸덕꾸덕 마르고 그 딱지가 떨어질 때까지 심하면 일주일에서 보름을 걸리니 짓궂은 아이들의 놀림감을 물론이요 입을 벌릴 적마다 찢어지는 아픔하며, 그래서 그런지 늘 이맛살을 찌푸려 버릇해서 어릴 적부터 이마 한 가운데 흉터에다가 두 눈썹 사이에 내천(川)자를 그리고 다녔다. 가뜩이나 구부정한 허리에 이마의 주름살은 영락없이 할아버지 형국이렷다. ‘애할아범’ 소리 듣기 딱 알맞은 것은 나 스스로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생장샘의 미숙으로 인한 선병질이 가져다 준 입가장이의 솔이 이마를 찡그려 주름살을 짓게 하고 급기야 육체적 모습이 노령의 할아버지를 연상케 하였으니 미숙(未熟)솨 노숙(老熟)이 교차하는 인생의 야릇한 아이러니를 어릴 적부터 몸에 타고난 것인가? 생각이 생각을 낳고 곱씹고 되씹어 궁리하는 철학은 그때부터 시작했는가보다. 그러니 봄이 오면 더더욱 밖에 나가 놀기를 꺼려했다. 아예 봄이 오는 것이 귀찮고 두려웠다.
사춘기에 들면서 여드름은 다행하게 심하게 솟지는 않았지만 입가의 솔과 주름살은 적극적으로 이성과의 교제를 개척하는 길을 억제하여, ‘사랑’이라는 단어와의 사랑을 책을 통하여 교감하는 묘한 버릇을 붙였다. 그렇다, 나의 봄앓이는 이제 신체의 미숙에 연유한 솔에서 출발하여 사랑조차 책을 통하는 기형적 심리적 봄앓이로 반전(反轉)하였다. 특히 대학 입시 준비를 앞두고도 침식을 잊다시피 몰두한 프로이드의 책들은 가뜩이나 내성적 책버러지로 하여금 세상을 리비도와 이드의 변형으로 관찰하는 훈습(薰習)의 종자를 내 장식(藏識) 가운데 일찍이 심어 놓았다.
프로이드 ‘할아버지’의 책을 통해 훈습 받은 나의 심리적 봄앓이는 대학에 들어오고서도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뒤로 몇 년의 군대생활과 신문기자 생활을 빼놓고는 내처 대학을 중심으로 삶을 영위해 온 나에게 또 한의 사회적 봄앓이를 덧붙여 주었을 뿐이다.
4.19와 5.16이라는 역사의 전환기에서 나는 초연할 수 없었다. 억병으로 술을 마시고 게걸게걸 씨가 먹지 않는 말을 뱉어내고 날이 서지 않은 행동을 서슴지 않던 나는 얼결에 장가를 들어 아이를 키우는 어른이 되고서도 집단의 버릇처럼 무서운 대학가의 봄철 데모열풍을 보면서 나 한 개인의 행동거지와 마음가짐을 어떻게 다잡아야 할는지를 아직도 가늠하지 못한다. 이 무슨 무책임한 행동이요 발언인가? 나이 사십 불혹(不惑)도 훨씬 넘어 쉬지근한 지천명(知天命)을 내일 모래로 두고 있는 장년(長年)의 교수가 어쩌자고 자기의 행동과 신념의 잣대조차 아직 바로 세우지 못하고 있다니 ···. 이것이 바로 이 글에서 내가 이야기하고자 벼르는 것이다. 결론부터 질러 말하자면, 나의 생기 - 심리적 개인적 봄앓이와 사회·역사적 봄앓이를 연결하는 고리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오천년의 역사를 자랑한다지만 우리가 몸담고 사는 이 삶의 틀을 새로 세운지는 겨우 오십년이 안 된다. 나는 대한민국의 일천(日淺)한 역사를 말하고 있다. 오백년의 유교문화를 성숙시킨 민족의 저력도, 그 두 배가 넘게 일천년의 불교문화를 찬란하게 꽃피웠던 문화민족의 긍지도, 이제 아사리 판같이 그저 살아남기만을 안간힘 하는 동물적 경쟁의 한마당 속에서 흙탕물에 휘저어지고 있다. 어찌 저 나이 어린 대학생과 노동자만을 탓하랴. 저들이 부르짖는 유치한 구호와 어리석은 행동은 바로 미숙한 우리나의 역사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 아닐 손가? 나라 전체가 커다란 봄앓이를 앓고 있는 것이다. 시대가 아직 어린 나라의 체제를 굳건히 다지기에는 이른가보다. 솔같이 하찮은 상처가 아물려해도 시간이 걸리거늘 한 나라의 기강이 송두리째 빠진 채 남의 노예 살이 반백 년과 동족상쟁의 피비린내를 맡은 지 한 세대를 건너뛰지 않았는데 어찌 단숨에 성숙한 모습을 보려고 성급한 진단과 처방을 내릴 것인가?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 두 손끝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기다릴 것인가? 우리는 앓을 만큼 앓은 다음 한 가지 재주를 배우고 툭툭 털고 일어서는 어린 아이의 재롱을 기다려 보듯이 느긋하게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부처님은 어떤 분이신가? 시절인연(時節因緣)을 기다리는 분이다. 성급하게 설익은 과일을 따려는 미숙의 극단과 너무 지루하게 오뉴월 뭣 떨어지는 것 기다리는 체념의 극단을 떠나 시절 호인연(好因緣)을 성숙하게끔 적당히 기다릴 줄 아는 분이다.
지금도 교정에는 성숙하게 이 나라의 운명과 인류의 장래를 두 어깨에 걸머지고 한시도 아깝게 공부하고 연구에 진력해야 할 대학생들이, 무슨 출정식을 앞두고 ‘해방춤’이라는 몸짓에 어울려 희희낙락 한다. 그렇다면 이 나라를 책임진 중견인 들은 어떠한가? 걸핏하면 크기를 앞세워 몰아붙이는 자동차 운전 같은 물량과시주의의 현란한 정책과 그 뒤를 뿌옇게 흐리는 집단이기주의의 정치현상, 하나같이 미숙의 극치를 보인다. 오천년 문화는 어디로 간데없고, 오늘 벌어 오늘 먹고 즐기는 이 동물적 생존경쟁의 야바위판에 부처님의 가르침 - 팔정도 - 은 설 자리가 없다. 오호라 시일야방성대곡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든 봄앓이를 앓으며 나는 성숙을 기다리는 부처의 인내와 중도(中道)를 생각한다. 나무 중도(中道) 부처님, 나무석가모니불.
내가 봄앓이를 하기는 아마 나의 생리적 조건에 연유하는 바가 많을 것이다. 나의 봄앓이는 봄철마다 터져 나오는 대학가의 데모 열품과도 무관하지 않다. 또 이 나라의 짧은 역사적 연륜에도 봄앓이는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본다. 이제부터 나의 생리적 봄앓이를 연결 짓는 무슨 고리가 있는가, 살펴보아야 하겠다.
태어나면서부터 나는 선병질(腺病質)적인 생리적 결함을 지니고 이 세상에 나왔나 보다. 생장샘의 잘못인가 봄철이면 입가에 허연 생채기가 아물 줄을 모르고 몇 달을 두고 계속되었다. 초등학교 신입생을 한 줄로 늘어세운 교장선생님은 구부정하게 애늙은이 모양 허리가 굽고 얼굴색이 노오란 나에게 ‘선병질’이란 딱지를 붙여 주셨다. 그 뒤로 나의 별명은 ‘애할아범’이었다. 나가 놀 줄도 모르고 늘 방구석에 박혀 들입다 책만 보았다. 가뜩이나 병약한 체질에 운동도 모르고 책만 보는 나에게 별다른 영양도 없이 짜고 맵기 만한 푸성귀 음식은 나의 입병을 가속화 시켰을 것이다. 아무튼 이 입가의 찢어져 헐은 자국은 흔히 남들은 입이 커지느라고 그런다는 식으로 예사롭게 얼버무려졌는데, 나에게는 늘 육체적 고통뿐만 아니라 심리적 수치감마저 안겨주는 고약한 애물이었다.
봄이면 극심한 일교차 때문에 걸핏하면 감기가 들어 약간의 신열이 있다하면 다음날 아침 입가에 스멀스멀 물집이 잡히고 벌겋게 부풀어 오르며 끈끈한 진물이 흘러내리면서 바깥 먼지와 잡균의 서식처를 제공한다. 일단 부풀었다하면 진물이 꾸덕꾸덕 마르고 그 딱지가 떨어질 때까지 심하면 일주일에서 보름을 걸리니 짓궂은 아이들의 놀림감을 물론이요 입을 벌릴 적마다 찢어지는 아픔하며, 그래서 그런지 늘 이맛살을 찌푸려 버릇해서 어릴 적부터 이마 한 가운데 흉터에다가 두 눈썹 사이에 내천(川)자를 그리고 다녔다. 가뜩이나 구부정한 허리에 이마의 주름살은 영락없이 할아버지 형국이렷다. ‘애할아범’ 소리 듣기 딱 알맞은 것은 나 스스로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생장샘의 미숙으로 인한 선병질이 가져다 준 입가장이의 솔이 이마를 찡그려 주름살을 짓게 하고 급기야 육체적 모습이 노령의 할아버지를 연상케 하였으니 미숙(未熟)솨 노숙(老熟)이 교차하는 인생의 야릇한 아이러니를 어릴 적부터 몸에 타고난 것인가? 생각이 생각을 낳고 곱씹고 되씹어 궁리하는 철학은 그때부터 시작했는가보다. 그러니 봄이 오면 더더욱 밖에 나가 놀기를 꺼려했다. 아예 봄이 오는 것이 귀찮고 두려웠다.
사춘기에 들면서 여드름은 다행하게 심하게 솟지는 않았지만 입가의 솔과 주름살은 적극적으로 이성과의 교제를 개척하는 길을 억제하여, ‘사랑’이라는 단어와의 사랑을 책을 통하여 교감하는 묘한 버릇을 붙였다. 그렇다, 나의 봄앓이는 이제 신체의 미숙에 연유한 솔에서 출발하여 사랑조차 책을 통하는 기형적 심리적 봄앓이로 반전(反轉)하였다. 특히 대학 입시 준비를 앞두고도 침식을 잊다시피 몰두한 프로이드의 책들은 가뜩이나 내성적 책버러지로 하여금 세상을 리비도와 이드의 변형으로 관찰하는 훈습(薰習)의 종자를 내 장식(藏識) 가운데 일찍이 심어 놓았다.
프로이드 ‘할아버지’의 책을 통해 훈습 받은 나의 심리적 봄앓이는 대학에 들어오고서도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뒤로 몇 년의 군대생활과 신문기자 생활을 빼놓고는 내처 대학을 중심으로 삶을 영위해 온 나에게 또 한의 사회적 봄앓이를 덧붙여 주었을 뿐이다.
4.19와 5.16이라는 역사의 전환기에서 나는 초연할 수 없었다. 억병으로 술을 마시고 게걸게걸 씨가 먹지 않는 말을 뱉어내고 날이 서지 않은 행동을 서슴지 않던 나는 얼결에 장가를 들어 아이를 키우는 어른이 되고서도 집단의 버릇처럼 무서운 대학가의 봄철 데모열풍을 보면서 나 한 개인의 행동거지와 마음가짐을 어떻게 다잡아야 할는지를 아직도 가늠하지 못한다. 이 무슨 무책임한 행동이요 발언인가? 나이 사십 불혹(不惑)도 훨씬 넘어 쉬지근한 지천명(知天命)을 내일 모래로 두고 있는 장년(長年)의 교수가 어쩌자고 자기의 행동과 신념의 잣대조차 아직 바로 세우지 못하고 있다니 ···. 이것이 바로 이 글에서 내가 이야기하고자 벼르는 것이다. 결론부터 질러 말하자면, 나의 생기 - 심리적 개인적 봄앓이와 사회·역사적 봄앓이를 연결하는 고리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오천년의 역사를 자랑한다지만 우리가 몸담고 사는 이 삶의 틀을 새로 세운지는 겨우 오십년이 안 된다. 나는 대한민국의 일천(日淺)한 역사를 말하고 있다. 오백년의 유교문화를 성숙시킨 민족의 저력도, 그 두 배가 넘게 일천년의 불교문화를 찬란하게 꽃피웠던 문화민족의 긍지도, 이제 아사리 판같이 그저 살아남기만을 안간힘 하는 동물적 경쟁의 한마당 속에서 흙탕물에 휘저어지고 있다. 어찌 저 나이 어린 대학생과 노동자만을 탓하랴. 저들이 부르짖는 유치한 구호와 어리석은 행동은 바로 미숙한 우리나의 역사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 아닐 손가? 나라 전체가 커다란 봄앓이를 앓고 있는 것이다. 시대가 아직 어린 나라의 체제를 굳건히 다지기에는 이른가보다. 솔같이 하찮은 상처가 아물려해도 시간이 걸리거늘 한 나라의 기강이 송두리째 빠진 채 남의 노예 살이 반백 년과 동족상쟁의 피비린내를 맡은 지 한 세대를 건너뛰지 않았는데 어찌 단숨에 성숙한 모습을 보려고 성급한 진단과 처방을 내릴 것인가?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 두 손끝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기다릴 것인가? 우리는 앓을 만큼 앓은 다음 한 가지 재주를 배우고 툭툭 털고 일어서는 어린 아이의 재롱을 기다려 보듯이 느긋하게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부처님은 어떤 분이신가? 시절인연(時節因緣)을 기다리는 분이다. 성급하게 설익은 과일을 따려는 미숙의 극단과 너무 지루하게 오뉴월 뭣 떨어지는 것 기다리는 체념의 극단을 떠나 시절 호인연(好因緣)을 성숙하게끔 적당히 기다릴 줄 아는 분이다.
지금도 교정에는 성숙하게 이 나라의 운명과 인류의 장래를 두 어깨에 걸머지고 한시도 아깝게 공부하고 연구에 진력해야 할 대학생들이, 무슨 출정식을 앞두고 ‘해방춤’이라는 몸짓에 어울려 희희낙락 한다. 그렇다면 이 나라를 책임진 중견인 들은 어떠한가? 걸핏하면 크기를 앞세워 몰아붙이는 자동차 운전 같은 물량과시주의의 현란한 정책과 그 뒤를 뿌옇게 흐리는 집단이기주의의 정치현상, 하나같이 미숙의 극치를 보인다. 오천년 문화는 어디로 간데없고, 오늘 벌어 오늘 먹고 즐기는 이 동물적 생존경쟁의 야바위판에 부처님의 가르침 - 팔정도 - 은 설 자리가 없다. 오호라 시일야방성대곡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든 봄앓이를 앓으며 나는 성숙을 기다리는 부처의 인내와 중도(中道)를 생각한다. 나무 중도(中道) 부처님, 나무석가모니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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