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사의 그 생애와 활동 . 업적 등이 다채로운 만큼 그 사상도 단조롭지는 않았다.
그의 불교관 . 국가관을 비롯하여 인생에 대한 관찰 . 구세에 대한 사상 내지 문학 . 예술에 대한 조예와 표현까지도 그의 사상의 생동하는 일면임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그러한 광범한 사상면을 여기에서 자세히 펴낼 수는 없으므로 대체로 그의 불교관, 곧 선에 대한 관찰과 교에 대한 관찰을 간단히 소개하고 그의 국가관과 구세정신에 대한 것을 그 요령만 간추리기로 한다.
사명대사의 선 . 교관 (禪.敎觀)
대사는 불교인인만큼 그가 본 불교 사상은 어떤 것이었던 가를 잠깐 살펴보자.
사상이란 주위의 환경과 자기의 성격 취미 등에 의하여 구성되는 것인데 첫째로 그 주위의 환경, 곧 생활 주변이나 교육 환경 또는 역사적 . 사회적 환경의 영향력을 받아 이룩되는 것인데 대사는 일단 당시의 세속적인 현실을 떠나서 불교적인 수련과 그 교육을 쌓아온만큼
그의 중심사상은 불교적인 교리와 또는 선(禪)적인 실천 수련에 의한 사상으로 그 인격을 형성하였던 것을 부인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처음에는 그의 은사인 신묵화상의 훈도를 받았을 것이고 다음에는 청허대사의 심법을 받아 그 수제자가 된 만큼 청허대사의 사상과 인격적 영향은 거의 80-90 퍼센트를 옮겨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청허대사가 임제종 대현선사가 창도한 간화선을 최상종승으로 신봉하여 모든 교의(敎義) 밖에 별전선지(別傳禪旨)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였고 특히 사명대사를 위하여 선교결(禪敎訣)이라는 약 일천자의 글을 써서 보이었는데 「교외별전」의 심법(心法)이 있다는 것을 재삼 강조했다. 또 서산 금선대(金仙臺)에 있을 적에 행주(行珠), 유정(惟政– 四溟), 보정(寶晶) 등을 위하여 「교외별전선지」를 밝히는 글을 써서 주었는데 그것이 곧 선교석(禪敎釋)이다.
한국불교는 모든 교학을 등지는 것은 아니고 먼저 불조(佛祖)의 여실한 가르침에 의하여 찾은 지견(知見)을 세우고 그 뒤에 그 지식과 이론에 그쳐있지 말고 경절문(徑截門)의 어구에 의하여 지견의 병을 쓸어버리고 화두를 잡아들어 모든 이론과 지해(知解)를 뛰어넘어 자기의 본분(本分= 自性의 본바탕)을 사무쳐 체득하라는 것이 고려이래 조계종의 지도이념이다.
청허대사도 그 지도이념을 그대로 준수하여 오면서 특히「 교외별전」의 선지를 힘차게 내세웠다.
그런데 사명대사도 꼭 그와 같이 모든 제자와 후배에게 또는 일부의 여러 선승들과 문답하고 시구(詩句)를 써줄 적에 임제광풍(臨濟狂風)이니 「교외별전」이니 하는 어구를 많이 썼다. 그것은 청어대사의 사상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다. (그 문구는 생략함)
그리고 대사는 모든 경전 가운데 「화엄경」을 대우주적인 이법(理法)의 전체를 발현으로서 우주만상과 인간만사가 이 화엄경(華嚴經)의 이치에 벗어남이 없다고 하였다. 그 일부를 소개하면 화엄경간행발문(刊行跋文)에
「대저 화엄의 돈교(頓敎) 됨이여 본바탕은 본디 생겨난 것이 아니어서 시작도 없고 끝남도 없으며 그 작용은 실로 없어지는(滅) 것이 아니어서 이루는 것도 무너지는 것도 아니다. 이것이 모든 교의 근본이요 만법의 종(宗)이다. 하늘이 이 때문에 맑고 땅이 이 때문에 안정하며 산천이 이로써 흐르고 우뚝 솟으며 새와 짐승이 이로써 날고 달린다...... 부처님이 말씀한 것이 대개 이것을 말씀한 것이고 오십삼 선지식이 사람에게 보인 것이 대체로 이것을 보였다. 임금은 어질고 신하는 충성하며 아버지는 사랑하고 자식은 효도하며 형은 우애하고 아우는 공경하며 부부가 화한 것이 또한 이 이치를 얻어서 그러하다. 이것을 확충하면 모든 물건이 비로자나불의 참 모습이요 미루어 실행하면 한걸음 한걸음이 보현보살의 묘행(妙行)이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문구가 허응보우 대사의 글에도 있기는 하나 그 뜻을 사명도 찬동하기 때문에 인용한 것이라고 보겠다. 「이조불교」를 지은 일본인 고교형은 이것을 보고 사명대사는 큰 화엄교가(敎家)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선을 종골(宗骨)로 하는 청어사상과 다른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대사의 불교관은 교외별전을 종골로 하면서 또한 화엄경의 교리를 우주. 인생의 전체를 싸 지닌 보편의 진리라고 찬양하였다.
자비구세주의
대사가 임진왜란을 맞이하여 법복을 벗어 버리고 군포(軍袍)를 걸치고 적의 총검 앞에서 뛰어들어 바람앞의 등불과 같은 국운을 만회하고 생민을 도탄에서 구출한 그 생사를 초월한 희생정신과 용감한 활동은 줄잡아 말하면 국가와 민족을 위한 지극한 충의심이라 하겠지만 좀 더 깊고 넓게 찾아보면 그것은 부처님의 자비구세정신이며 소아(小我)를 내던지어 대아(大我)를 실현하려는 보살도 정신이다.
대사의 비문(碑文)과 행장기에 의하면 처음 왜적이 금강산 유점사에 침입하여 많은 승려를 묶어놓고 보물을 내놓으라고 협박할 적에 대사는 그 이웃 암자에 있다가 그 적 가운데 뛰어들어 슬기와 자비로 그들을 효유하여 돌려보내고 다음날 문도들에게 이르기를 「여래가 이 세상에 출현한 것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함이니 이제 적이 함부로 무고한 생명을 해치려 하니 내가 마땅히 적진 중에 가서 적을 효유하여 그 잔인한 것을 거두게 하는 것이 자비의 가르침을 저버리지 않게 됨이로다.」하고 곧 고성 적진 중에 들어가서 적을 효유하여 영동구읍의 인민을 해치지 못하게 하였다는 것은 참으로 위대한 자비정신의 발로요 보살도의 실천이다.
대사가 후에 법복을 벗고 군포를 떨쳐입고 적진에 뛰어든 것은 그 잔인한 왜적을 쳐 물리치고 무고한 동족을 도탄에서 구출하자는 자비정신이 그 바탕이 된 것이다.
물론 그것이 그대로 애국 애족의 정신인 것이다. 그러므로 비문에 이르기를 「선조가 의주에 파천했다는 말을 듣고 의분에 못 이기어 강개하여 여러 스님에게 말하기를 우리들이 이 국토서 살면서 편히 지내고 먹고 지내는 것은 다 임금님의 은덕이다. 이러한 국난을 당하여 어찌 차마 앉아 보겠느냐. 하고 곧 승려 수백 명을 모집하여 승군본부인 순안으로 나갔다.」고 한 것도 나라를 사랑하고 임금의 은혜를 감사하는 애국심과 충의심의 발로이면서 그것이 곧 불교의 자비구세 정신인 것이다.
그 애국정신과 충의심은 단순한 한 신민으로서의 충심에서 우러나오는 것과는 그 성질을 달리하여 부처님의 자비구세 정신을 그 원천으로 하고 있다.
그의 애국, 충군의 활동이 바로 자비구세정신에 뿌리박았다는 사실을 다시 그 행적과 언행에서 찾아보자. 대사가 일본에 사신으로 갔을 적에 덕천가강과 회담할 적에 우선 두 나라 생령들이 오랫동안 도탄에 빠졌기에 내가 건져내려고 왔다는 것을 선언하였다고 하였으며, 어떤 발문을 쓰는데도 선사의 생령을 널리 건지라는 유명을 받고 왔다고 하였다. 그리고 왜적이 붙잡아 간 포로동포 삼천오백명을 찾아왔고 또 귀국 한 뒤에 일본선승 원광 장로에게 편지하기를,
「나의 본디 원은 다만 적자(백성)를 다 찾아서 선사의 보제생령의 유명을 받들고서 할진데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왔으니 매우 유감스럽다.... 형은 본뜻을 어기지 말고 생령을 구제하려는 원을 대장군에게 말하여 우리 동포를 다 찾아 돌리어 옛 맹세를 저버리지 않기를 부탁한다.」
하였고 또 왜승 선소에게 주는 글에서도
「일본 갔을 적에 서소장로와 원광장로와 오산제덕과 종지를 논 한것은 좋았으나 본디 원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왔으므로 매우 유감스럽다. 형은 다시 힘껏 생령을 찾아 돌려주면 천만 다행하겠다.」
또 서소장로에게 보내는 서신에서도 똑같은 내용을 전하였다.
이런 문자와 또 포로를 찾아온 사실 등으로 보아서 대사가 일본에 간 진의는 포로된 동포를 찾아오는 것이 그 주된 목적이었다. 또 처음 고성의 적진중에 들어가서 적을 효유한 것도 자기의 신명을 돌보지 않고 생령의 구제를 그 근본사명으로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