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龍成의 새 佛敎運動과 그의 主張
용성선사가 오도(悟道) 후 전개한 생애는 그것이 그 시대를 산 오도자의 자기실현(自己實現)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근원적 대도(大道)를 체득한 그로서 그가 전개한 운동은 그가 불교인이었으므로 불교적인 테두리에서 운동을 전개하였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 그보다도 그가 생애한 시대에 나라를 잃고 외세에 짓밟힌 상황 아래서 진리를 깨달은 자가 행하여야 할 근원적인 차원을 실천하였다고 보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물론 불교의 특유의 운동도 없지 않으나 그가 전개한 일대의 운동은 오직 민중을 깨닫게 하여 인간의 독존과 자유와 구체적 권능성을 알게 하며 그것을 개현(開顯) 실천케 하는데 중점을 두었었다. 이것이 민족의 자주독립정신을 함양하고 외세를 배격할 근원적 힘이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여기에는 종승(宗乘)의 선양이 있고 경전의 번역이 있고 포교방법의 개혁이 있고 교단기초를 확고히 다지는 작업이 있고 압박받은 민중의 구세가 있고 조국을 구출할 애국운동이 있었다 이하에 용성선사가 전개한 중요한 행적과 그의 주장을 열거해 본다.
(1) 大衆禪運動
용성선사는 오도후 동서남북 산야를 변답하며 오후수행(悟後修行)에 전념하더니 十八년이 되는 一九O三년 그의 나이 四O에 이르러 비로소 선회(禪會)를 개설하고 종주(宗主)가 된다. 그로부터 이르는 곳마다 선회를 창설하고 종승을 현양(顯揚)하였다. 그가 창건한 선회로는 비로암선회(毘盧庵禪會). 상석대선회(上石坮禪會). 망월사활구참선만일결사(望月寺活句參禪萬日結社). 내원사선회(內院寺禪會). 범어사삼처선원(梵魚寺三處禪院)등을 꼽을 수 있다. 용성선사는 선을 지관타좌(只管打坐)의 고선(枯禪)에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는 각성현발(覺性顯發)을 촉구하여 민중깊이 선신앙을 심어갔다.
(2) 포교의 쇄신
용성선사는 포교는 각행(覺行)의 실천이었다. 선. 염불. 진언. 모든 실천수행을 각(覺) 일점으로 이끄는 원융한 선포교를 고취하였다.
그리고 포교방법에 있어서 음악을 도입하고 한글로 간소화된 의식문을 창설하여 온대중이 함께 의식에 참여하게 한 사실은 오늘에도 미치지 못하는 바가 있다. 그리고 많은 포교문을 저술하여 반포하고 일요학교를 개설하여 어린이 포교까지 망라한 것은 특기할만한 일이다.
(3) 역경산업
용성선사가 현대역경운동의 비조(鼻祖)라 함에는 아무도 이의가 없을 것이다. 역경의 동기를 살펴 보면 다음 몇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시대의 추이가 능률과 경제의 시대임을 판단하고 난해한 한문경전은 유통하기 어렵게 되었고, 둘째 현대적 서구학문과 과학을 소화하는 것이 급선무이므로 한문공부에 바칠 시간이 없다는 것이며, 세째는 설사 한문공부에 전력하여 일대문장가가 되었더라도 문자가 불법이 될 수 없다는 것이며, 네째는 「조선사람들에게는 조선글」이 합당하고, 또한 한글은 평이하여 보급에 편리하다는데 있었다.
一九二一년 출옥과 동시에 역경을 시작하여 많은 진취가 있었으나 주변의 몰이해와 비방과 재정난으로 인하여 몇 차례 중단한적은 있었어도 끝끝내 임종 직전까지 역경. 출판을 쉬지 않았다. (약 四十여종의 저술을 남겼다.)
(4) 계율 진흥운동
부처님의 최후유교에서 「계(戒)로서 스승을 삼으라」하심은 누구나 아는 바이지만 용성선사가 주세한 시대는 계의 정신이 크게 도전을 받던 시기였다.
계율이 깨어질 때 불법수행도 교단도 불법도 망하게 됨을 확신한 용성선사는 계율운동을 크게 진작하여 계단을 설하고 극력계법을 선양하였다.
당시 계에 대한 도전은 두가지 측면에서 가해져 왔다. 하나는 「음주식육(飮酒食肉)이 무방반야(無妨般若)며, 행도행음(行盜行淫)이 불애보리(不애菩提)라」하여 부처님 계법을 송두리째 내버리고 막행을 감행하면서 지계자(持戒者)를 향하여는 집상소기(執相小機)라 비방 질시하고, 승려의 취처금지(娶妻禁止)는 국가와 불교의 발전을 저애한다는 주장이 있었던 것이다. (한용운 氏등의 주장) 또 하나는 개화(開化)의 이름으로 가취(嫁娶)의 자유를 주장하기도 하고, 한편 일본불교와 접하게 되자 저들의 풍습이 우리 교단 내에 감염되어 승풍(僧風)이 크게 문란하고 一九一一년 사찰령에서 주지취임의 요건 중에서 「비구계의 수지」까지도 삭제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 사이에서 계율을 호지하고 교단의 청풍(淸風)을 작흥(作興)하고자 하는 용성선사의 주장은 극진한 바가 있다.
一九二四년 대각교당에 계단을 설립하고 一九三一년 十二월에는 각설범망경(覺說梵網經)을 역출(譯出)하였으며 또한 기회 있을 적마다 당시의 파계행을 극력 경고하였다. 또한 주목할 것은 그 계맥(戒脈)은 이른바 칠불(七佛)계맥으로 이는 지리산 칠불사 대은(大隱)율사가 개창한 서상수계(瑞相受戒) 계맥인 바 선사는 이 계맥을 한국 고유의 계맥이라 하여 크게 중히 여겨왔다.
(5) 자주적 통일중단
선사는 종단을 절대자주적 종단이어야함을 역설한다. 종교는 독립적이어야 하며 결코 정치의 간섭을 받아서는 안되며 또한 본산 단위의 분권종단을 개혁하여 단결종단을 촉구한다. 그리고 정치에 부속되거나 간섭을 받는 것이 불교인 자신의 죄과(罪過)라고 하여 분발을 촉구하였다.
(6) 경제적 자립추구
용성선사는 산업선교와 경제적 생산종교를 강력히 역설한다. 옛 조사의 유풍을 따라 수행인이 스스로 생산에 종사하여 사회변천에 대응하고 안일한 생활에서 탈피할것을 촉구하였다. 「한 손에 호미를 들고 참선하라 」는 주장을 실천하기 위하여 만주 또는 국내에 농장을 시설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선사는 또 광산을 경영하여 독립운동을 뒷받침하였다는 설도 있으나 사실 종단이 공장을 경영하고 가득성(稼得性)있는 임산을 장려하며 북청(北靑)에 있는 금. 은. 동광을 경영하기도 하였다. 공장을 시설하고 포교사를 두며 농촌에 순회포교사를 두어 포교하되 상층보다 하층대중을 위주로 포교하고 구제운동을 펴라고 주장한다. 종단이 공장이나 농장 등 생산에 관여하며 포교할 것을 주장한 선사의 의도한 바가 무엇인가는 좀 더 연구할 과제라 생각된다.
(7) 농민의 자립. 조직화추구
용성스님의 농촌의 생산소비조합운동이 필경 농민의 경제적 자주성과 조직적 협동성을 배양한다는 점은 의심할 어지가 없는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