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향기 / 야! 여름이다
내가 태어나서 자란 곳은 서울 신림동이니 내 고향은 서울이다. 그러나 누군가 나에게 고향이 어디냐 물어보면 잠시 갸웃거리다 전라남도 나주라고 대답하곤 하는데, 여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어린 시절 부모님께서는 3남매 중 유독 나만 나주에 있는 외가댁에 보내시곤 하셨다. 방학이 시작할 때 옷가지 몇 개와 방학숙제 거리를 싸들고 내려가서 방학이 끝날 때쯤 서울로 올라오곤 했으니, 어린 시절의 방학에 대한 대부분의 기억은 시골이었던 나주에서의 기억이다. 그중에서도 어린 시절 시골에서 잠시 만났던 형에 대한 기억이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선명하기 때문이다.
외가댁에는 외할머니와 이모님이 계셨는데, 대부분의 시골 농가가 그렇듯이 새벽부터 농사일로 바쁘셔서 나를 따로 돌봐줄 시간이 없었다. 친구 하나 없는 시골에서 또래 녀석들이 ‘얼굴 허연 서울촌놈’에게 텃세를 부려대는 판에, 나는 녀석들과는 어울리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논이나 밭에 따라나가 뙤약볕에서 밭고랑 사이를 뛰어다니며, 혼자서 개구리나 여치, 메뚜기 등을 잡아서 노는 게 내가 시골에서 즐길 수 있는 유일한 놀이였다. 친구들과 뛰어놀아야 할 녀석이 밭에 따라나와 혼자 노는 모습이 안쓰러웠던 것일까? 어느 날 외할머니는 동네 까까머리 하나를 불러 동전 몇 닢을 쥐어주며, 나를 좀 데리고 놀아 달라고 부탁을 했다.
중학생쯤 되어 보였던 그 형은 서울 촌놈 손을 붙잡고 동네를 구경시켜 주었다. 동네 구경을 하다가 배가 고플 때는 개구리참외를 따서 함께 먹기도 했다. 그 당시 나는 매일 매일 마루 끝에 까치발을 하고 서서는 그 형이 집에 찾아오길 기다렸다. 언젠가 한 번 그 형은 자기 머리통보다 두 배는 커 보이는 수박 한 통을 밭에서 들고 나왔다. 그리고는 그 수박을 바닥에 떨어트려 반으로 쪼개었다. 수박을 잘게 쪼개 내게 나누어 준 형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여긴 고동아짐 밭잉께 그냥 먹어도 된당께.” 수박을 먹고 나서 한참을 그 형은 이 밭은 누구네 밭, 저 풀은 먹어도 되는 풀, 산딸기는 먹어 보았냐 등등의 이야기를 하며 내 손을 잡고 소나무가 우거진 오솔길 사이를 걸었다.
그때 갑자기 하늘이 흐려지더니 소낙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 형은 오솔길을 벗어나 인근 밭에 있는 원두막으로 나를 급히 데리고 갔다. 그리곤 “쪼매만 기다려봐이잉.”이라는 말만 남겨놓고 그 소나기 속으로 뛰어 나갔다. 원두막에 남은 나는 빗줄기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그 형의 모습을 두려운 마음으로 좇고 있었다. 잠시 후 그 형은 어디선가 따온 황도복숭아를 뒤집은 ‘난닝구’에 잔뜩 담고 비에 흠뻑 젖은 채로 뛰어서 돌아왔다.
“이건 아재네 과수원서 따온 건디 겁나 맛있어 부러야.” 그 형은 원두막 처마 아래로 흘러내리는 소낙비 줄기에 황도복숭아 털을 정성스레 닦아냈다. 그리고는 때가 꼬질꼬질 찌들은 ‘난닝구’를 벗어 물기를 쥐어 짜내고 내 얼굴과 복숭아를 닦아냈다. 그 형은 잘 익은 황도복숭아 하나를 집어 엄지와 검지를 이용해 껍질을 벗겨냈다. 자신이 건네준 복숭아를 맛있게 먹는 내 모습을 바라보며 그 형은 검게 그을린 얼굴에 하얀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하지만 그 형과의 만남은 그날 내렸던 소나기처럼 잠시뿐이었다. 다음번에, 그리고 그 이후에도, 외가에 들릴 때마다 나는 그 형을 찾곤 했다. 하지만 나는 그 형이 광주 어딘가로 공부하러 갔다는 말만 들었을 뿐이다. 20여 년이 훨씬 지난 요즘도 시장이나 마트에서 복숭아가 나올 철이 되면,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던 그 형 얼굴이, 그 복숭아가, 그 원두막이 생각난다. 그 형은, 이제는 당시의 내 나이쯤 될 만한 아들 녀석에게 복숭아를 쥐어 주며 예의 그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을지 모를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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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철 _ 바람이 기분 좋게 불 때면 회사에 사표를 내고 몇 개월씩 동남아 오지를 여행하곤 한다. 그러다가 경비가 떨어질 때쯤 되면 돌아와 여행에서 건져 올린 글과 사진을 자신의 블로그(http://mirrorc.egloos.com)에 올리고 있다. 지금은 기업의 부설연구소에서 일하며 다음 여행지를 꿈속에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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