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자는 술 마시면 안 됩니까 연애도 하면 안 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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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자는 술 마시면 안 됩니까 연애도 하면 안 됩니까
  • 관리자
  • 승인 2009.03.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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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모 / 효림 스님의 영원한 마음의 스승, 정영 스님

효림 스님에게 있어 정영 스님은 영원한 마음의 스승이다. 그러나 엄격히 말하면 정영 스님은 효림 스님의 사형으로, 조금 앞서거니 뒤서거니 출가한 도반과도 같은 스님이다. 다만 정영 스님은 마흔이 넘어서 출가한 늦깎이 스님이었고, 효림 스님은 열여덟에 출가한 터라 나이 차이는 어버이뻘 되는 사형이었다. 그러나 효림 스님에게 그리운 이를 물으면 언제나 주저없이 정영 스님을 말한다.
“소천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기 위해 인천 보각사로 갔을 때, 처음 정영 스님을 뵈었습니다. 정영 스님은 가만히 곁에 앉아있기만 해도 마음에 감화를 주었고, 수행자란 무릇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셨던 어른이었습니다. 입적에 드는 날까지 저는 그분에게서 수행자 외의 모습을 본 바가 없었습니다.”
정영 스님은 선객으로 선원으로만 돌았던 탓에 해제철이 아니면 만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간간이 은사스님에게 편지를 보내곤 했는데, 그때마다 정영 스님은 편지 속에 따로 효림 스님에게 보내는 쪽지를 담아 어린 효림 스님의 마음을 어루만져주곤 했다. 성격이 불 같던 은사 소천 스님도 정영 스님을 대하는 태도만은 사뭇 달라, 정영 스님이 보각사에 오면 선객으로서 예우를 했다. 저녁나절이면 은사스님과 사형스님은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말없이 몇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그 풍경은 마치 산사의 향기처럼 맑고도 참으로 그윽해보였다. 수행자가 어떻게 서로의 마음을 교감하는지 어렴풋이나마 배우던 시절이었다.

세상에. 절대란. 없다.

사미계를 받고 강원을 마친 뒤 효림 스님은 기회가 될 때마다 정영 스님을 찾아 선원으로 달려가곤 했다. 정영 스님은 주로 경북 문경에 있는 금선대에서 수행을 했는데, 어느날 금선대로 찾아간 효림 스님은 다짜고짜 정영 스님에게 다그쳐 물었다.
“스님! 수행자는 절대 술을 마시면 안 됩니까? 연애도 하면 안 됩니까?”
정영 스님은 청년 효림 스님을 한참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내 말문을 열었다. “세상에 절대란 없지. 그러나 세상엔 깡패들이 마시는 술이 있고, 학생들이 마시는 술이 있고, 선생이 마시는 술이 있고, 중이 마시는 술이 있다. 중이 깡패처럼 마셔서야 되겠는가?”
효림 스님은 이어 물었다. “중은 술을 어떻게 마셔야 합니까?” “수행의 정신을 놓지 않는 것이 중이 술을 마시고 연애하는 방법이다.” 정영 스님은 박수를 받더라도 그것이 남을 의식해 칭찬받기 위해 했다면 수행에 해가 되는 것이고, 남에게 욕을 먹더라도 수행의 정신을 놓지 않으면 어떤 행위라도 수행에 도움이 된다고 일깨워주었다고 한다. 효림 스님에게 가장 절실했던 살아있는 법문을 주었던 이가 정영 스님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영 스님과 효림 스님은 서로의 길이 달랐다. 정영 스님은 ’95년 입적에 드는 날까지 선승으로의 길만 걸었으나, 효림 스님은 사람들이 들끓고 울타리 빽빽한 세상 속으로 수행의 길을 찾아갔다.
때는 70년대 말, 효림 스님은 암울한 시대의 억울하게 핍박받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게 되었고, 그들에게 ‘사람이 부처입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인권을 보호 받을 권리가 있는 평등한 존재입니다’ 이 한마디를 ‘겁없이(?)’ 전하기 시작했다.
“제주도 선원에 있을 때, 우연히 청년법회를 맡게 되었습니다. 청년들이라 하면 이 땅의 주인공들 아닙니까? 그래서 당당히 이 시대와 삶의 주인공이 될 것을 당부했죠. 그런데 어느 날 사복 형사들이 와서 말조심하라고 합디다. 그게 어떤 경고였는지 그때는 몰랐죠. 저는 계속 저의 생각과 불교의 가르침을 전했습니다. 그 결과 감옥에 들어가 엄청난 고문과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전태일, 박종철, 5.18, 6월 항쟁. 그렇게 격랑의 세월을 겪으며 효림 스님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소위 말하는 ‘운동권 스님’이 되었고, 뜻하지 않게 전혀 보편적이지 않은 수행자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참선밖에. 몰랐던. 참수행자.

사실 정영 스님은 당시 대학교까지 졸업하고, 상공부 특채 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한 재원이었다. 그러나 공무원들의 부패상을 보며 크게 실망하고 잠깐 교직에 몸담았다가, 당시 각(覺)운동을 펼치던 소천 스님의 법문을 듣고 출가를 결심했다. 이후 스님은 오로지 참선에만 전념하며 수행의 날을 벼려갔다. 그런데 딱 한번 주지 소임을 맡을 뻔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어느 땐가 정영 스님은 은사 소천 스님에게 태백산 각화사 대중들을 살피게 되었노라고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늘 그랬듯이 작은 쪽지를 통해 효림 스님에게 일간 찾아오라는 메모도 남겨두었다. 효림 스님은 각화사에 갈 계획에 마냥 들떠 있었는데, 그때 소천 스님이 ‘선객이 무슨 주지냐’는 말을 하셨고, 이 한마디에 정영스님은 주지직을 물리고 다시 선원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저는 그때 각화사에 갈 생각으로 마음이 들떠 있었는데, 그게 어긋나버리니까 되게 서운합디다. 그런 제 마음을 아셨는지. 정영 스님이 선물을 보내오셨습니다. 손목시계였는데, 누가 선물로 주셨던 모양입니다. 당시 손목시계는 웬만한 부자 아니면 엄두도 못 냈거든요. 제가 얼마나 신이 났겠습니까? 맨날 옷소매 걷어 올리고 시계 자랑하고 다녔더랬습니다. 하하하.”
효림 스님은 한때 정영 스님과 둘이서 남장사 중궁암에서 살았었다. 그런데 한참 동생뻘인 효림 스님이 정영 스님을 시봉해야 할 터였지만, 상황은 정 반대로 돌아갔다. 느긋한 성격의 효림 스님은 공양시간에 그닥 쫓기지 않았고, 배가 많이 고프지 않으면 한 끼쯤 건너뛰어도 된다고 생각했단다. 그러면 정영 스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당신이 공양 준비를 해서 나이 어린 사제를 다독여 밥을 먹이곤 했다. 찬거리가 떨어졌을 때도 정영 스님이 “장 보러 가세” 하고 말하면, 효림 스님은 “혼자 가시죠” 하고 어깃장을 내곤 했단다. 그러면 정영 스님은 “장 볼 게 뭐 있노, 그냥 바람이나 쏘이자는 말이지” 하며 구슬렸다고 한다.
“제가 어느 날은 물었습니다. ‘스님은 와 잔소리도 안 하고 화도 안 내십니까?’ 그러자 정영 스님이 빙긋 웃으며 말씀하시길, ‘잔소리를 기다렸다는 얘기니, 내가 거기에 말려들 필요야 있겠나!’ 하셨지요.”

한. 점. 구름처럼. 한. 줌의. 재가. 되어.

이후 효림 스님은 실천승가회를 이끌며 종단개혁과 사회운동을 꾸준히 펼쳐나갔고, 정영 스님은 불국사에서 마지막 정진을 회향해갔다. 거처만 달랐을 뿐 효림 스님은 도심 속의 선객으로 보다 밝고 따뜻한 불교를 만들어가고 있었고, 정영 스님은 불국사 한주로 학인들과 선원 대중들에게 수행자로서의 사표가 되어 늘 깨어있는 수행자가 될 것을 당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정영 스님은 열반에 들기 며칠 전 심한 감기로 고생을 하시다, 병원에 딱 하루 입원을 했다고 한다.
“불국사 스님들이 왜 이렇게 일찍 퇴원하셨느냐고 물으니, 스님이 다 나았다고 하시더랍니다. 그리고 그날 학인스님들에게 당신 물품들을 나눠주시고, 선원스님들과도 담소를 나누셨다고 해요. 물론 다음날 아침에는 예불도 잘 마치셨구요. 그런데 아침 공양에 안 나오신 게 이상해 들어가보니, 조용히 열반에 들어 계시더랍니다. 머리맡에 통장 하나 메모 몇 줄 남기고….”
메모는 효림 스님에게 남긴 것이었다. 첫째, 통장의 돈을 찾아 장례비용으로 쓸 것. 둘째, 화장하여 분골은 흩어버릴 것. 그렇게 다섯 가지 당부를 꼼꼼히 남기고 당신의 마지막 길을 떠났다고 한다. 상좌 한 명, 신도 한 명 없이 오로지 참선만 하다 스님은 한 줌의 재로 돌아간 것이다.
“제가 만난 최고의 수행자였습니다. 한 점 구름처럼 투명하고 맑게 떠나간 스님의 마지막 모습은 무서운 경책이고, 제가 스님을 지금까지도 흠모하는 까닭일 것입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

정영 스님 _ 1925년 출생. 부정부패에 찌든 세상을 한탄하며 소천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김용사 금선대와 상주 남장사 중궁암 등 깊은 산에서 정진하며 평생 수좌로의 길을 걸었던 선객이다. 세상에 당신 이름 한 줄 남기지 않았으나, 참사람의 향기로 수행자의 사표가 되었다. 1995년 스님은 바람처럼, 구름처럼 한줌의 재로 열반에 들었다.

효림 스님 _ 1968년 출가 후 전국선원에서 운수납자로 수행하였으며, 범승가 종단 개혁 추진위원회 집행위원장, 불교신문사 사장, 대한불교 조계종 중앙종회의원, 실천불교 전국승가회 공동의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는 성남 봉국사 주지, 만해마을 사무총장 소임을 맡고 있으며, 지금도 봉국사에서 ‘실천불교학교’를 개강하여 실천하는 불교, 실천되는 불교를 만들어가고 있다. ‘한 그루 나무올시다’ 등으로 계간지 「유심」 신인상을 수상하였으며, 시집으로 『흔들리는 나무』, 『꽃향기에 취하여』가 있다. 산문집으로는 『그곳에 스님이 있었네』, 『행복으로 가는 기도』, 『자유로 가는 길 道』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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