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충정일보' 신춘문예에서 '역상'이 당선되던 때가 내 나이 스물여덟이었으니까 비록 지방지출신 문인이기는 해도 그리 늦은 데뷔는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이상하게 시보다는 소설을 쓰고 싶었고 이미 소설습작도 20여편을 해 낸 뒤라 소설에 대한 미련이 예사가 아니었다. 그 무렵 고향인 부여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나는 30이 되던 해 서울 한영고등학교로 전근온 뒤 동국대 선배인 작가 이범선선생님을 가끔 뵙게 되면서 소설공부에 더욱 몰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에지 추천이든 신춘문예 당선이든 모두가 하늘에 별따기라 도무지 소설로 데부힐 재간이 없었다. 서른두살에 동대부고로 옮긴 나는 닥치는 대로 읽고 쓰면서 주로 신춘문예에만 도전해 보았지만 한 두번 최종심사에 올랐을 뿐 고배의 연속이었다.
드디어 나는 소설을 작파하다시피 하고 고3 담임이니 하년주임이니 해가며 주로 훈장노릇에 틀을 잡아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술이나 마시며 작가가 못된 한을 악담과 저주로 풀면서 세월만 죽이고 있었다.
"김형, 그러지 말고 문예지 추천을 한번 받아 보시지, 내 오영수선생님을 소개해 드릴테니." 신춘만 고집했던 내가 보기에 딱했던지 같은 학교에 있던 작가 한상칠형이 그렇게 제안했다. 뿐만 아니라 한형은 내게 소설작법에 따른 많은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1975년 정초, 나는 드디어 오영수선생님을 찾아뵐 수 있었다. 그러나 와병중이시던 오선생님은 늙은(?) 문학청년에게 냉담하기 이를데 없었고 내가 가져간 단편도 거들떠 보지도 않은채 만사 귀찮다는 표정이셨다
하지만 나는 보름쯤 뒤에 또 다시 오선생님댁을 찾아갔다. 그날은 다소 건강이 호전되셨는지 응접의자를 권하시며 내 말상대가 되어주셨다. 나는 이때다 싶어 제법 당찬 소리를 했다. "선생님 저는 지난번에 보여드린 제 소설 평이나 듣고 싶어 선생님을 찾아뵌게 아닙니다. 다만 저 같은 사람도 소설가가 된 가능서이 있는지 없는지 그 가부만 정해주십시요. 괜히 되지도 않을 노릇응ㄹ 가지고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고 반거충이가 되느니 선생님이 단념하라고 하시면 저는 앞으로 교편생활에나 만족하겠습니다."
그 말끝에 선생님은 나를 한참 지켜보시더니 무겁게 입을 떼셨다. "김형 소설 쓰소! 하지만 이 작품 가지고는 아직 멀었소." 그 만남의 순간이 있었기에 나는 그날부터 확 달라진 것이었다. 나는 그때까지 습작한 40여편의 작품을 전부 꺼내 놓고 내 나름대로 잘됐다 싶은 것부터 다시 퇴고를 하며 정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꼭 2주에 한번씩 새 작품을 드고 선생님을 찾아 뵈었다.
"자네 웬 소설을 자꾸 가져오나?" 몇 달이 지나자 선생님은 손을 흔드셨다. 아뭏든 이렇게 선생님과 새로 시작한 공부 덕분에 내 나이 꼭 40에 <현대문학>지에 소설추천 완료가 되어 나는 작가가 된 셈이다. 나는 사람과 사람의 만남을 가장 신비스러운 것으로 생각한다. 아름다운 만남은 그 인생을 아름답게 꾸며주고 위대한 만남은 그 인생을 위대하게 변화시킨다고 생각한다.
그때 선생님과의 그런 만남이 없었던들 나는 아직 문학청녕(?)이거나 지방지 출신 시인으로 만족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않는가, 신비스러운 만남이 어디 인간과 인간의 만남 뿐이겠는가. 인간과 자연, 인간과 책, 인간과 부천.... 생각할수록 짧고 무상한 인생길. 그러나 우리가 어떤 만남을 갖느냐, 그리고 그 만남을 얼마나 자신의 바른 길을 위해서 잘 가꾸어나가느냐에 따라서 그 인생의 변화는 물론 전 생애의 성패까지도 좌우된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