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걸지령[人傑地靈)이라 하던가. 혐준한 산골 사람들은 성품이 끈질기고.넉넉한 들판 사람들은 성품이 푸근하다고 한다. 둥글둥글한 구룽과 그사이 사이에 펼쳐진 너른 들에서 자라온 이들이 대부분 모나지 않고 모질지 못한 것도 바로 그 땅의 영기 탓이리라.
충청도는 바로 그러한 고장이고 청주시를 둘러싸고 있는 청원군은 그 군의 이름에서 보듯이 들판이 많고 산이 적은 지역이다. 애써서 고개를 들고 바라볼 묏부리도 없고 눈이 부실만한무한대의 평야가 있는 곳도 아니다.
안심사(安心寺)로 들어가는 길목이 꼭 그러했다. 아스팔트 포장길을 벗어나 오리 남짓 되는 이길은 양편으로 빼어난 산세를 드러낸 곳도 아니요. 흐르는 물소리가 우리의 귓청을 시원스레 울러주는 계곡이 있는 곳도 아니다. 오히려 아름답다거나 뛰어났다는 형용사는 뚝 떼어놓고 그저 평안한 마음으로 길을 쫓아가면 막다른 분지에 닿게 된다. 나지막한 산으로 둘러싸인 이 분지 가운데에 조그만 산골 동네가 자리했고 길 좌측 언덕 위로 안심사가 조용히 솔숲에 싸여 있다.
우리말로는 절골. 절이 있는 골짜기이다. 절로 들어오는 길목에서부터 이미 마음은 평안해졌으니 안심사는 내 심중에 ‘마음 을 평안케 하는 절이 아니라 평안한 마음으로 당도하는 절’이어서 계단을 올라 경내에 들어서니 맞은편에는 소나무 숲을 호위신장으로 대웅전이 남향받이로 단정히 섰다.
보물 제664호인 이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기와에 써있는 강희(康熙)11년 (1672년)의 명문으로 그 건축 연대를 추정할 수 있으나 맞배지붕임에도 불구하고 공포가 앞면. 옆면, 뒷면까지 있는 것을 보면 애초에는 이 건물이 팔작지붕이었을 것이다. 법당외벽은 새로이 단청을 해서 그대로 두어 우리를 기쁘게 한다. 허나 그 보다도 법당에 모셔진 세분 부처님의 상호가 너무나 소박하고 자상해서 우리를 가까이 다가서게 한다.
엄숙함보다는 따스하고 자비로운 눈길. 딱딱하고 엄정한 앉음새라기보다 어딘가 기대고 싶은 모습이 더욱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게 한다. 영산전은 1613년(광해군5년)에 대웅전 앞 왼쪽 언덕 위에 세워졌다. 대웅전과 마찬가지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식 맞배집이나 이도 애초에는 팔작지붕이었을 것이다. 원래는 비로자나불을 모시기 위하여 건축되어 비로전이라 하였으나 지금은 영산전 현관이 걸려 있다. 안에는 나한님이 16분 모셔져 있고 마루에는 괘불함이 길게 누워있다.
이 괘불은 너비6m, 길이10.8m안에 이 절을 중창할 당시인 인조 때에 조성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매년 초파일 때에만 대웅전 앞 괘불대에 걸려져서 도량을 장엄하는 이 괘불은 가운데에 석가모니불, 그 밑으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자리했고 사천왕과 십대제자 들이 배열된 영산회상도이다.
안심사에는 대웅전 좌측에 특이할 만한 탑이 하나 있다. 세존사리탑으로 알려진 이 부도는 진표 율사가 이 절을 창건하면 서 직접 조성하여 석가모니 사리를 봉안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 후 탑이 유실되어 행방을 찾지 못하다가 이 산중에서 우연히 발굴되어 1900년에 다시 이 절로 옮겨왔다고 사리비에 기록되어 있다.
한 가지 의문은 사진에서처럼 돌종(石鍾) 모양의 부도는 고려시대말의 고승인 나옹 화상 부도-여주 신륵사에 있다-가 그 시초가 되는데 어떻게 신라의 진표율사가 이 사리탑을 만들었다는 것인가. 오히려 진표율사가 조성한 사리탑은 오랜 세월에 너무 마멸되어 다시 이 사리탑을 조성하고 석가모니 사리만을 옮기어 모셨다고 하였다면 그것이 훨씬 타당한 주장이 되지 않았을까. 이런 형태의 부도는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모습인데 어찌 시대를 거슬러 신라시대로 돌아가랴.
안심사는 진표 율사가 775년(신라혜공왕11년)에 창건한 절이라고 전한다. 진표 율사는 12세에 금산사로 출가하였다. 그 후 변산의 도량에서 낮과 밤을 잊고 참회기도하여 지장보살과 미륵보살로부터 교법을 받은 때가 762년 4월 27일 이었다. 이때부터 금산사에 다시 머물며중생교화하기 시작하였다. 후에는 금산사를 떠나 속리산을 거쳐 강릉을 경유. 금강산으로 옮겨가며 인연 닿는 대로 사람을 교화하였다. 진표 율사가 법주사에 머물며 중창불사를 한 해가 776년(혜공왕12년 )이니 만약 진표 율사가 속리산으로 가는 도중에 안심사터를 잡고 이 절을 창건했다면 775년의 창건설도 타당성이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진표 율사가 이 절을 창건하였다면 애초에는 이 도량도 미륵도량이었을 것이다. 금산사, 법주사가 미륵도량이 된 것은 진표 율사가 미륵보살로부터 간자를 받았고 가는 곳마다 점찰법회를 영어미륵산양을 고양하였기 때문이다.
안심사의 법당들도 모두 임진왜란 이후의 건물들인 점으로 보아 아마도 이 전쟁 중에 사찰과 함께 모든 기록이 소실되어 안심사의 내력도 알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안심사는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것도 일본 수입종인 시커먼 껍질의 리기다 소나무가 아니라 제멋대로 굽은 채로 법당을 감싸안은 듯한 붉은 껍질의 아름드리 적송[赤松]이다. 게다가 비로전 지붕 용마루 가운데에는 기와흙으로 만든 새가 한 마리 앉아있다. 마치 솟대 위의 새처럼 성스러운 지역임을 표시하는 듯이 법당에 엎드린 중생의 소원을 부처님 세계에 전하려는 전령인 듯이 오롯이 앉아 있다.
도량 뜨락에도 붉은 빛을 던질 듯한 소나무. 작지만 소박하면서 안정되어 보이는 법당. 지붕 용마루의 한 마리 새. 졸졸졸 흐르는 물소리. 신토불이(身土不二)라더니 몸과 땅만이 둘이 아닌 것이 아니라 도량 전체가 하나이면서 여럿이고 여럿이면서 하나이니 어느 것을 빼고 더할 수 없는 전경이 아닌가. 세상만사 다 쉬고 아무 생각 없이 평안한 마음으로 하루쯤 묵고 싶은 도량. 뒤돌아 나오는 발길이 천근인 듯 무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