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寺의 향기] 충남 장곡사-심인법륜 (心印法輪)의 도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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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寺의 향기] 충남 장곡사-심인법륜 (心印法輪)의 도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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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9.05.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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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의 향기

(1) 위치와 창건 

서울서 남으로 차를 몰아 2시간 예산이다. 다시  서쪽으로 한 시간을 달리니 충청남도 서해를 굽어보는 청양이다. 이 길은 태백산에서 뻗어나간 차령산맥이  원주 천안을 거쳐 충청남도 서해안으로 달린 산맥의 끝이 된다. 충청남도 서쪽에 들면서 마곡사가 위치한 금계산, 장곡사가 웅거한 칠갑산, 무량사가 의지한 마수산으로 이어진다. 금계산이 표고 570m, 칠갑산이 561m, 만수산이 572m라 하니 가히 충청남도 서해안을 두룬 한폭의 병풍이다. 청양에서 칠갑산을 따라 10km 이곳이 장곡리다. 거기서 장곡사까지는 2km 남짓하다. 부드러운 산줄기 사이를 흘러 내리는 계곡을 따라 논 사이로 길은 이어진다. 장곡사는 그 끝 칠갑산 서쪽 중턱에 있다. 충남 청양군 대치면 장곡리에 위치한다. 이곳이 1130여년 전 신라의 향기를 가득 담고 우리의 굳건한 정통정신의 뿌리를 형성하고 있다. 1,130여년 전이라 하면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2백년이 된다. 그 사이 융성한 민족의 기개는 마음껏 뻗어나고 당과의 평화로운 교류로 우리의 문화가 한껏 피어나는 때다. 구산선문(九山禪門)도 이 무렵부터 자리를 잡기 시작하는 것이다. 장곡사는 가지산문의 웅찰로서 그 제3조가 되는 보조체징(普照體證) 국사에 의하여 창건 되었다. 때는 서기 850년 신라 제 46대가 되는 문성왕(文聖王) 12년이다. 보조국사가 당에서 돌아온 것이 840년 인데 귀국후 10년 만에 지은 것이다.

 (2) 開山祖 보조국사

우리 앞에 우뚝 솟은 역사의 뿌리 장곡사는 어떤 절인가. 우리는 그 면모를 알기 위하여 이 사찰의 개산조를 살필 필요가 있다. 개산조의 시대와 성격과 그 생애를 살핌으로서 장곡사의 창건정신. 그리고 시간을 넘어 고동치는 역사의 맥박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보조국사는 신라 애장왕 10년 (서기 804년)에 탄생하여 헌강왕 6년 (서기 880년)에 입적하고 있다. 속성은 김씨, 법명은 체징(體證), 지금의 공주에서 났다. 이름난 명문거족 출신이다. 23세에 출가하여 제방 선지식을 찾고 도의(道義) 선사의 선풍을 배웠다. 당에 들어간 것이 837년 34세 때다. 수학을 마치고 돌아온 것은 신라 문성왕 2년인데 귀국후에는 지금의 전남 광산군에 있던 황악난야에 머물으니 도성은 일세를 풍미했다. 헌안왕(憲安王)이 사의 도명을 듣고 입내를 청하였지만 병을 칭탁하고 굳이 사양했다. 왕은 조칙을 내려 국사가 머물던 가지산 사면에 장생표(長生標)를 세우게 했다. 국사의 문하에는 8백여명의 제자가 있어서 크게 종풍을 떨쳤는데, 이 일문이 가지산문(加智山門)이요, 심인종(心印宗)이라고도 한다. 사가 입적한 것은 헌강왕 6년(서기 880년) 인데 세수 77세 법랍은 55세라 한다. 미루어 보건대 국사가 당에서 돌아와 광산(光山)에 얼마 동안 머물다가 장곡사를 지은 것으로 보이는데 헌안왕이 국사를 청한 것을 857년으로 본다면 장곡사 창건 당시 국사의 도명이 크게 떨쳤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국사의 비는 오늘날 전라남도 장흥에 있는 보림사 터에 전해 온다.

   (3) 오늘의 주요 가람

 오늘의 장곡사는 전면에 운학루(雲鶴樓), 정면이 하대웅전( 下大雄殿) 그리고 그 서편에  설선당(說禪當)이 있다. 그리고 하대웅전 위에 상대웅전이 있다. 현존하는 가람은 거의 모두가 근세에 개축 재건된 것이다. 하대웅전은 동남을 향하고 있는데 1977년에 중수하여 오늘날까지 여러차례 보수한 기록이 있다. (보물 181호) 정면3칸, 측면에 2칸의 다포식 건물이다.

 상대웅전은 역시 보물 제 162호로 지정된 가람이다. 바닥에 박돌을 깔았는데 여기에 연화문이 새겨진 것이 섞여 있어 주목을 끈다.

 약사여래존상 : 하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는 약사여래존상은 좌상(坐像)인데 높이 88cm, 고려시대의 조성이다. 온후한 원만상은 정교한 보의 무늬와 함께 찾는이의 흠앙심을 불러 일으킨다. 왼손에는 약호를 들고 고달픈 중생들을 맑혀 주고 죽음의 병을 치료해 주신다. (보물 337호)

 철조 비로자나좌상 : 상대웅전의 본존이다. (보물 174호) 고려시대의 조성으로 알려지고 있다. 불상을 바치고 있는 길죽한 좌대는 우아한 조각이 눈에 띈다.

  철조 약사여래좌상: 상대웅전에 비로자나불과 함께 봉안된 절불인데 통일신라시대의 조성으로 알려져 있다. 불상 뒤에는 나무로 만든 광배(光背)가 있는데 매우 섬세한 조각이다. 아마도 나중에 보충한 것 같다. (국보 58호)

 또 주목을 끄는 것이 이 부처님의 좌대다. 큼직한 화강암으로 된 우수한 작품이다.

  (4) 영원한 심인(心印)의 광명(光明)

 오늘날 장곡사가 위치한 칠갑산은 지난 1974년부터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그래서 산은 비교적 잘 보호되어 있다. 그러나 장곡사의 맥박은 어떠한가. 보조국사의 창건의지가 오늘날 어떻게 드러나고 있으며 보존되고 있는 것일까.

 상대웅전에 비로자나불과 약사여래불을 봉안하고 하대웅전에  역시 약사여래불을 봉안한 것으로 보아 장곡사의 근본 성격을 짐작하게 한다. 문자를 세우지 않고 언어에 의지하지 않으며 곧바로 근원에 사무치는 선종의 특징은 장곡사에 있어서 본존불로서 비로자나불을 봉안한 뜻을 헤아리게 한다. 동시에 약사불을 함께 봉안한 것도 사량과 문자연어가 끊인 도리가 구체적 형태로 세간에 나타나매 육바라밀이 되고 약사 12대원이 되며 무량무변한 대비 방편으로 열리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그러므로 장곡사는 근원청정의 도리가 구세대비로 현출하여 약사대원으로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심인종의 진면목은 이와 같은 역사로 살아 움직이는 구체성에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상대웅전 비로자나불은 약사불 보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이 점에서 장곡사는 원래부터 비로자나불이 봉안 되었을 것으로 생각 한다.

 우리들은 오늘날 장곡사를 찾으면서 보조국사의 심인법륜(心印法輪)이 영원을 흐르는 우리의 역사정신의 근원인 것을 새로이 깨닫는다. 정적에 묻힌 장곡사는 역시 영원한 목소리로 중생의 분발을 일깨우며 긴 미래로 역사를 밝혀가고 있는 것이다. 다시 고개를 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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