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속에 내가 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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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속에 내가 핀다
  • 관리자
  • 승인 2009.07.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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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심시심
 세상에 꽃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있을까. 꽃보다 더 신비스러운 것이 있을까. 흙과 돌 밖에 없는 검붉은 땅속에서 그토록 아름답고 고운, 여러 모양과 다양한 색깔을 지닌 향기로운 꽃이 피다니 실로 신비와 경탄, 그것 밖에 할 말이 없다. 고금동서의 시인묵객(詩人墨客)들이 자연소재 가운데 무엇보다도 꽃을 즐겨 노래한 사실은 바로 꽃의 아름다움과 신비스러움 때문이리라.

 그런데, 꽃을 읊은 시작품들을 보면 우리는 대체로 두 가지의 서로 다른 관점을 느낄 수 있다. 하나는 꽃을 객관적 대상으로 보는 관점이요, 하나는 꽃과 자아를 일치시키는 자연합일의 관점이다. 전자는 꽃의 아름다움을 찬탄하면서 꽃이 지는 것을 아쉬워하거나, 꽃을 사랑하거나 그리워하는 이로 생각하는 경우이고, 후자는 꽃과 내가 하나된 경지에서 꽃속에 자아가 몰입된 경우이다. 그리고 일반 시가(詩歌)가 전자에 해당하고, 선적인 관조(觀照)를 바탕으로 한 불교인들의 시가 후자에 해당한다.

 선(禪)을 서구에 소개하는데 크게 기여한 일본의 스즈키 다이세쓰 영목대졸(鈴木大拙)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선의 방법은 대상 그 자체로 들어가서 그 내부에 있는 바 그 대로의 사물을 보는 것이다. 어떤 꽃을 안다는 것은 그 꽃잎이 되어 그 꽃잎으로 있는 것이오, 그 꽃과 같이 피는 것이며, 꽃과 같이 비를 맞고 햇빛을 받는 것이다.(중략) 꽃을 알게 된 나의 인식에 의해서 나는 전우주의 신비를 알게 되며 이 우주의 신비는 실로나 자신의 온갖 신비를 아는 것도 된다···.” 결국 꽃을 객관적 대상으로써가 아니라 꽃과 내가 하나가 되어 내가 꽃으로 피는 물아일치(物我一致), 주객일여(主客一如)의 선경(仙境)을 말하고 있다.

 신라 이래 역대 선승들의 선시에서는 꽃을 대상으로 한 이와 같은 작품이 많다. 꽃을 진여(眞如)의 나타남으로 보든가 꽃 그 자체를 무르녹은 선지(禪旨)로 묘사한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고려시대 경한(景閑)스님의 다음 시도 여기에 해당한다.

 석가가 세상에 나오지 않고
 달마가 서쪽에서 오지 않았어도
 불법은 천지에 두루 퍼져서
 봄 바람에 꽃들은 활짝 피었으리

 釋迦不出世
 達磨不西來
 佛法遍天下
 春風花滿開

 여기서 꽃은 불법의 상징이다. 범상한 이들이 보고 느끼는 그런 꽃들이 아니다. 다음의 두 현대시 두 편은 꽃과 합일된 자아를 보여준다.

 (전략)
 섬돌 우에 문득 석류꽃이 터진다 / 꽃망울 속에 새로운 우주가 열리는 파동 ! 아 여기 태고적 바다의 소리 없는 물보래가 꽃잎을 적신다 / 방안 하나 가득 석류꽃 속으로 들어가 앉는다 /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다.

 (전략)
 그래 이 마당에 / 현세의 모란꽃이 제일 좋게 핀 날 / 처녀와 모란꽃은 또 한번 마주 보고 있다만 / 허나 벌써 처녀는 모란꽃 속에 있고 / 전날의 모란꽃이 내가 되어 보고 있는 것이다.

 앞의 시는 조지훈의 시 ‘화체개현(花體開顯)’의 뒷부분이고, 다음 시는 서정주의 ‘인연설화조(因緣說話調)의 뒷부분이다. 석류꽃과 모란꽃 등 모두 꽃과 자아의 일치를 통하여 선적인 투시를 통한 관조의 세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즉 ‘화체개현’은 한 송이 꽃속에 우주를 보면서 자아가 자연인 꽃속에 들어가 일념불생(一念不生) 무심합도(無心合道)로 통일되는 선정(禪定)의 경지를 보여주고 있고, ‘인연설화조’는 윤회와 전생의 불교적 진리를 바탕으로 윤회와 전생의 불교적 교리를 바탕으로 시공(時空)을 초월하는 삼생(三生)을 궤뚫는 선적 직관을 통하여 나와 객체와 꽃이 영원의 투명성 속에 합일되어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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