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꽃
이재무
문배마을 구곡폭포는 가히 절경이었다
높이와 폭 모두 이름값을 하였고
때마침 얼어 있어서 그 위세는 더 당당하였다
빙벽은 추상같아 바라만 보아도 숨차올랐다
생동하는 추사 김정희 필체, 절대 위엄
하지만 그 앞에서 새삼스레 경의를 표하고
주눅든 어제오늘 읽는 일 따위는 접었다
거듭 눈길 묶는 빙벽 위의 거미인간들
저들의 무용한 놀이야 말로 지극한 아름다움 아니냐
목숨 거는 일에 꼭 이유가 있어야 하나
절경은 말 한마디 없이 사람을 빨아들였다
영하의 날씨 매섭게 눈과 바람 몰아왔지만
그럴수록 나는 홍역 앓는 듯 신열로 달아올랐다
어쩌면 위세당당한 것은 폭포가 아니라
무기교의 동작으로 순간의 방심도 허용치 않는
빙벽에 매달린 저 투명한 정신,
매순간의 인간 생사를 로프에 걸어두고
안간힘으로 내딛는 발걸음마다 하얗게
얼음꽃이 피었다 사라지는 게 보였다
- 시집 『저녁 6시』(창작과비평사) 중에서
이재무 ː 1958년 충남 부여 출생으로 동국대 국문과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1983년 「삶의 문학」으로 등단했으며, 난고문학상, 편운문학상, 윤동주상 등을 수상하였다. 시집으로 『섣달 그믐』, 『온다던 사람 오지 않고』, 『벌초』, 『몸에 피는 꽃』, 『시간의 그물』, 『위대한 식사』, 『푸른 고집』, 『저녁 6시』 등이 있다.
시. 평 .
사소한 일상에 얽매어 사는 ‘정신’이 언제나 피곤함에 지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그럴 때 그립고 생각나는 것이 바로 이 시와 같은 ‘야생의 힘’이다. 얼어붙은 폭포의 ‘추상같은’ 의지 앞에서 작은 이익과 손해에 연연하는 일상의 보잘 것 없음이 부끄러워지는 순간, 숨겨져 있던 야성의 정신, 불굴의 정신은 두텁게 얼어붙은 어둠을 깨고 빛나는 별처럼 살아나는 것이다. 생동하는 추사 김정희의 필체처럼, 타협없이 위태로운 절벽에 얼어붙은 폭포의 정신에서 문득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만나는 ‘위기’와 ‘위험’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는다.
빙벽 위의 ‘거미인간’처럼 하찮아 보이는 인간의 무용한 놀이가 사실은 목숨을 걸고 빙벽 위에 자신의 운명을 던지는 ‘아름다운 행위’임을 이 시는 보여준다. “위험을 무릎 쓰지 않은 삶이란 결국 얼마나 비겁한 것인가.”라는 깨달음을 불러내는 이 시는 화자가 홍역을 앓듯 신열에 들뜨는 이유를 잘 그려내고 있다. “무기교의 동작으로 순간의 방심도 허용치 않는/빙벽에 매달린 저 투명한 정신”, 바로 그 정신이 눈 먼 거북이가 바다 위에 떠다니는 구멍 난 널빤지에 머리를 한번 내밀기보다도 어렵다는, ‘인간으로 태어나 불법을 만난 인연’에 걸맞는 정신이 아닐까.
이 점에서 시인이 문득 발견한 빙벽의 추상같은 정신, 그 절대 위엄은 ‘인간의 존엄’에 대한 상징과 같은 것이다. 구차하고 비루한 인간이 아니라, 수천 겁의 인연으로 태어난 숙명적 존재인 인간의 ‘실존’, 그것의 가치를 시인은 ‘빙벽의 정신’에서 발견한다.
‘새삼스레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는 투명한 정신, 불굴의 정신에 대한 경외, 그것이 문득 시인으로 하여금 ‘얼음꽃’을 보게 하는 것이다. 환상처럼 “피었다 사라지는” 얼음꽃, 그것은 인간됨의 숙명과 비의에 대한 자각이 ‘두려움이 없는 불굴의 정신’으로 변화하는 순간 나타나는 ‘찬란한 별빛’과 같은 것은 아닐까. “목숨 거는 일에 꼭 이유가 있어야 하나”, 어쩌면 살아가는 것 그 자체가 빙벽 위에 목숨을 던지고 가는 아슬아슬한 일 아닌가. 타성에 젖은 정신은 깨진 얼음판 위를 걸을 때도 정작 그 위험을 모른다고 했다. 목숨 던지고 한 평생 아슬아슬 가로질러 가는 것인데도, 그 위험과 숙명을 모르는 것이 타성에 젖은 일상이다. 그 일상의 벽을 넘어 ‘투명한 정신’을 각성한 자의 발걸음 하나하나에서 얼음꽃이 피어난다는 것은 참으로 서늘하고 아름다운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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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식 ː 문학박사, 문학평론가. 1992년 「세계일보」 신춘문예에 문학평론이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현재 동국대 국문과 교수, 계간 「시작」 편집위원이며, 평론집으로 『불온한 정신』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