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쏭달쏭 불교생활탐구/삭발(削髮)
삭발
, 세속을 떠나 스님이 되는 필수의식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우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위의 시는 조지훈의 ‘승무(僧舞)’에 나오는 초반 구절이다. 어느 비구니 스님이 고깔을 쓰고 춤을 추는 모습을 묘사한 시이다. 머리털이 자라지 않고 박박 깎은 것을 ‘파르라니 깎은 머리’라 하였다. 실제로 단정히 삭발을 한 스님들의 두상에는 푸르스름한 빛이 나는 것처럼 보인다.
삭발은 세속을 떠나 스님이 되는 필수의식이다. 머리를 깎지 않고는 스님이 될 수 없으며, 삭발이라는 말 자체가 출가를 의미하는 말로 통한다.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된다고 해서 삭발위승(削髮爲僧)이라는 사자성어도 생겼다. 『치문경훈(緇門警訓)』에 수록된 「석문등과기서(釋門登科記序)」에는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가까운 시일 안에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라[勿棄時陰 近期於削髮爲僧].”는 말이 나온다.
삭발의식은 범어 문다나(Mundana)에서 비롯되었으며, 머리를 깎고 사미계를 받는 의식을 두고 이른 말이다. 때로는 체발(剃髮), 낙발(落髮), 축발(祝髮)이라고도 하는데, 옛날에는 절에서 머리를 깎아주는 소임을 맡은 사람을 발두(髮頭)라고 부르기도 했다.
왜 머리를 깎아야 스님이 될 수 있는 것일까? 일반적으로 머리를 깎는 것을 ‘무명의 풀을 자른다’는 뜻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중국불교의 논문선집(論文選集)이라 할 수 있는 당나라 도선 율사의 『광홍명집(廣弘明集)』에는 삭발의 의미를 이렇게 밝혀 놓았다.
“삭발은 속세를 등지는 절차이다. 도를 닦으려는 자는 속세를 등지는 데 힘써야 한다. 세속을 등지려면 머리부터 깎아야 한다. 머리를 깎고 용모를 바꾸는 것은 고상하고 소박하게 살려는 데 뜻이 있다. 부모와 이별하고 애착의 껍질을 벗겨 성인(聖人)이 계신 곳으로 가 탐욕을 떨쳐내고 소박한 마음이 되어 육신의 집착을 잊고 깨달음의 결과를 얻기 위하여 머리를 깎는 것이다.”
스스로에게 결의를 맺는 엄숙한 자기 선서
삭발을 하고 나면 염의(染衣)를 입는다. 염의란 원래 가사(袈裟) 색을 두고 한 말이지만, 출가 수행자가 입는 승복을 지칭하는 말로 쓰인다. 따라서 염의는 계율을 지키고 생활하는 수행자의 본분을 상징하는 옷이라고 할 수 있다. 삭발염의(削髮染衣)를 한 다음에는 서원을 세우며 입지게(立志偈)를 송한다.
자종금신지불신(自從今身至佛身) 지금 이 몸이 부처가 될 때까지
견지금계불훼범(堅持禁戒不毁犯) 굳게 계행을 지키며 훼손하지 않겠나이다.
유원제불작증명(唯願諸佛作證明) 부처님께서는 증명하여 주옵소서.
영사신명종불퇴(寧捨身命終不退) 차라리 몸과 목숨을 버릴지언정 마침내 물러나지 않겠나이다.
삭발을 함으로써 스스로에게 결의를 맺는 엄숙한 자기 선서를 하게 한다. 때로는 이 선서를 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경우도 있다. 새로운 인생관을 선택한 감격의 눈물일 수도 있고 끈적거리는 미련을 송두리째 뽑아버리기 위한 회한의 눈물일 수도 있다. 세속에서도 가끔 정치인이나 특별한 주장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자신의 결의를 삭발로써 나타내 보이기도 하는데, 이처럼 삭발은 대단한 각오와 결심을 알리는 행위이기도 하다.
총림이나 대중이 많이 사는 사찰에서는 삭발을 하는 날이 정해져 있다. 현재 우리나라 사찰에서는 음력으로 매월 14일과 29일이 삭발하는 날이다. 이는 옛날 사람들이 어떤 일을 할 때 좋은 날[吉日]을 택하던 풍습에서 정해진 것이다. 원래는 문수삭발일(文殊削髮日)이라 하여 매월 한 번씩 1년에 12일의 길일을 가려 삭발을 해 왔는데 월마다 날짜가 달랐다. 그러다가 14일과 그믐에 해당되는 날인 29일이 삭발을 하고 목욕하는 날로 정해지게 되었다.
요즘은 삭발을 할 때 면도기 종류가 많아서 편리하게 머리를 깎을 수 있지만, 옛날에는 머리를 깎는 삭도(削刀)가 별도로 있었다. 비구가 소지해야 하는 십팔물(十八物) 중 하나로, 스님들이 행각을 할 때는 반드시 이 삭도를 가지고 다녔다. 삭도는 계도(戒刀)라고도 불렀으며, 구리나 놋쇠로 만들고 칼집은 나무나 가죽으로 만들었다. 고려 때 만들어진 청동 삭도가 동국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통나무에 물고기 모양을 조각한 반달형 집이 달린 조선 후기 삭도가 직지사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월정사 단기출가 삭발식 모습. |
인생의 본질을 묻는 화두
머리털을 기르지 말라는 것은 번뇌와 망상을 키우지 말라는 뜻으로, 일로정진(一路精進)에 임하여 생사의 속박을 벗어나라는 것이다. 싯다르타가 출가했을 때도 스스로 머리털을 잘랐다. 무명의 거친 풀을 베어버린 것이다.
송나라 진종(眞宗) 때 양문공(楊文公) 대년(大年, 974~1020)은 여러 관직을 두루 거치며 벼슬에 종사하면서도 불교에 심취해 남다른 공부를 한 사람이었다. 그가 임종을 앞두고 자식에게 특별한 유언을 남겼다. 자기가 숨을 거두면 삭발을 하고 승복을 입혀 장례를 치러달라는 것이었다. 이때 삭발의 의미는 인생에 대한 설명할 수 없는 화두(話頭)와 같은 것이 된다.
수년 전에 어느 거사가 암(癌)에 걸려서 내가 사는 절에 와 7~8개월 머문 적이 있었다. 불심이 깊어 오랜 시간 불교청년회 활동을 하다가 나중에는 후배들을 지도하는 청년회 법사를 했던 사람이다. 불행하게도 그는 끝내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숨을 거두기 30분 전, 그는 누워 있던 침대에서 손가락으로 신호를 보내 몸을 일으켜 달라더니 손짓으로 머리를 깎아 달라고 부탁하였다. 후배 청년들이 머리를 깎아주고 반가부좌 자세로 앉혀주자, 그는 앉은 채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다음 생에 스님이 되고자 하는 서원을 세우고 간 것이라고 주위 사람들은 말했다. 여기서도 삭발은 인생의 본질을 묻는 하나의 공안(公案)이다.
지안 스님 : 1947년 경남 하동에서 태어났으며, 1970년 통도사에서 벽안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1974년 통도사 강원을 졸업하고, 통도사 강주, 정법사 주지, 조계종 교육원 고시위원 및 역경위원장, 조계종 승가대학원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조계종 표준 금강경 바로 읽기』, 『처음처럼』, 『학의 다리는 길고 오리 다리는 짧다』, 『왕오천축국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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