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마음을 그리며 걷다
사진 = 최배문
삶 속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이 모두 내 뜻대로만 같으면 얼마나 좋을까.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일체의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에 있다는데. 단단하고도 유연한 심지를 품고 싶었다. 그 마음을 그리며, 그 마음과 꼭 닮은 팔공산 은해사銀海寺 산내암자로 향한다. 푸르른 송림과 깎아지른 기암괴석 사이에 내려앉은 암자들이다. 은해사 산내 여덟 곳의 암자 중 백흥암, 묘봉암, 중암암, 운부암으로 발 머리를 내딛는다.
은해사를 지나 북서쪽으로 향한다. 초록이 싱그러운 숲길을 따라 2.5km. 산란한 마음이 내딛는 발걸음으로 집중될 무렵, 채색되지 않은 예스럽고도 소박한 암자가 모습을 드러낸다. 오래된 나무의 결이 세월을 말해주는,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백흥암百興庵이다. 신라 경문왕 9년(869년) 잣나무가 많아 백지사栢旨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한 후, 조선 명종 1년(1546년) 인종태실仁宗胎室의 수호사찰로 정해져 지금의 이름이 됐다.
백흥암의 입구인 보화루 앞, 도량을 둘러싸고 있는 담장에 걸린 팻말이 눈에 들어온다. “이 곳은 참선 정진하는 수행도량이오니 외부인 출입을 금합니다.” 비구니 스님들의 수행도량이라. 일 년에 두 번, 부처님오신날과 백중에만 외부인의 출입을 허락하는 곳이다. 세상과의 단절, 비구니 스님들의 법을 향한 엄숙한 결의가 묻어난다.
백흥암의 안과 밖을 나누는, 낮지만 단단한 담장 너머에는 단아한 도량이 자리하고 있다. 가지런히 비질돼 있는 아담한 마당에는 전각이 모여 앉았다. 비 오는 날 처마 밑으로만 다니면 옷 젖을 일 없을 만큼 극락전·심검당·보화루·진영각이 오밀조밀한 공간을 이룬다. 아늑할 뿐 답답하지 않다. 극락전極樂殿(보물 제790호)의 팔작지붕 끝이 하늘을 향해서일까. 세계의 중심에 있다고 하는 수미산이 새겨진 수미단(보물 제486호)이 있기 때문일까. 가득차고도 공하다.
서방 극락정토에 머물며 법을 전하는 아미타 부처님은 정교하고 아름답기가 으뜸이라는 백흥암 수미단 위에 좌정해 계신다. 수미단 위 부처님이 내다본 시선 끝에는 현판 하나가 걸려있다. ‘산해숭심山海嵩深.’ 한없이 높은 산 끝없는 깊은 바다처럼, 부처님의 자비와 지혜도 그와 같다는 추사 김정희의 글씨다. 진영각에 걸려있는 ‘시홀방장十笏方丈’ 편액과 『유마경』의 내용을 인용한 6폭의 주련도 추사의 묵향이라 한다.
사시예불을 마치는 내림목탁소리가 청아하게 퍼진다. 극락전이겠지. 때를 기다려 다시 찾으리라. 삼보三寶 가득한 절을 뒤로하고 다시 발 딛음에 마음을 집중한다.
| 바위를 품은 절 묘봉암, 바위가 품은 절 중암암
백흥암을 지나 이제 묘봉암妙峰庵으로 오른다. 백흥암에서 2km 남짓. 잘 포장된 도로를 따라 휘어지고 굽이친 길을 나아간다. 휘어지고 휘어지고, 굽이치고 굽이친 그 길의 끝으로 고개를 들어 올리면 몇 개인지 세다 잊어버릴 만큼의 계단이 보인다. 은해사 산내 암자 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암자라는 명성에 걸맞게 가파르다. 한 계단 한 계단 차분히 오른다.
숨을 고르고 고개를 드니 원통전圓通殿과 요사채가 나란히 있다. 건물 밖에서부터 뻗어 나온 큰 돌이 원통전 법당을 가로질러 관세음보살님의 머리 위를 장엄한다. 그래서 묘봉암을 두고 ‘돌 낀 절’이라 부르기도 한다고, 묘봉암 주지 덕원 스님이 일러준다.
계단을 조금 더 올라가 원통전을 뒤에서 내려다본다. 날씨가 좋으면 영천 시내가 한 눈에 보이는 장소다. 거사님 한 분이 휴대폰을 내밀며 사진을 보여주는데, 원통전을 걸치고 떠오르는 일출 모습이 그야말로 절경이다. 옛부터 나라에 큰 일이 있거나 은해사에 행사가 있을 때 대중스님들이 묘봉암에 모여 산신 기도를 올렸다. ‘과연 산신이 이곳에 자리했겠구나.’ 싶은 장소다. 계단을 조금 더 올라 산령각으로 향하자 목덜미에 시원한 바람 한 점 훅하고 스쳐간다. 산령각에 올라 샘솟는 석간수를 떠 마셨다. 김유신 장군이 수련하며 마셨다는 ‘장군수’다. 산신이 내어준 물이라 그런지 물맛이 옹골차다.
장군이 마시던 물을 마시고, 장군의 기세로 오솔길 따라 약 1km, 15분을 걸으면 ‘돌구멍 절’ 중암암中巖庵이 나온다. 중암中巖이라는 기암절벽의 중턱, 바위 속에 자리 잡은 절이다. 암벽으로 된 천왕문을 지나야만 법당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데, 겨우 한 사람만이 드나들 폭이라 저절로 자세가 낮아진다.
중암암의 이모저모는 보물찾기처럼 곳곳에 숨어있어 하나씩 찾아보는 재미가 충분하다. 어찌나 깊은지 정월 초하루에 볼일을 보면 섣달 그믐날이나 돼야 떨어진 소리가 들린다는 ‘해우소’,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스님이 기도로 제자리에 돌려놓았다는 ‘건들바위’, 한 사람이 간신히 들어갈 만큼 좁은 암벽 사이 통로를 세 바퀴 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극락굴’, 인간의 탐욕을 경계하는 ‘쌀 구멍’ 등. 이야기가 서린 장소를 둘러보면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됐나 놀라게 된다.
삼인암三印巖 넓은 바위를 지나, 사람 한 명 옆으로 겨우 들어갈 큰 바위 틈새를 통과하면 오랜 세월을 살아온 만년송이 모습을 드러낸다. 흙도 보이지 않는 돌땅에, 큰 바위 작은 틈을 비집고 뿌리내려 살아가는 모습에 가르침을 얻는다. 만년송에게 허리 숙여 합장한다. 나무아미타불.
사진 = 최배문
| 구름 위에 떠있는 절, 운부암
중암암에서 내려와 운부암雲浮庵으로 향한다. 의상 대사가 창건했다고 알려진 운부암. 절을 세울 때 상서로운 구름이 일어났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탁 트이고 너른 대지의 운부암을 보니 ‘이곳이 좀 전까지 보았던 같은 팔공산인가.’ 하는 짧은 착각마저 일어난다.
절 입구에 들어서자 연못 위에 떠있는 커다란 달마 대사 입상이 어서 오라 객을 맞이한다. 고개 숙여 답례하자 달마 대사의 부릅뜬 눈이 연못에 비친다. ‘남운부 북마하연’이라 전해지는 이야기처럼 고승대덕이 거쳐 가는 유서 깊은 참선도량이다. 운부암에서 공부하는 스님들의 입지立志가 바로 저런 것이리라. 곳곳 서려있는 깨어있음에 대한 경책을 느끼며 불이문不二門을 지나 보화루에 닿는다. 보화루 맞은 편, 보물로 지정된 원통전 부처님(청동보살좌상, 보물 제514호)께 참배하고 나와 경내를 유유자적 걸어본다.
발길 닿는 대로 걷다 요사채 뒤 오랜 세월의 흔적을 품은 고목나무를 찾았다. 경내 쪽에서 보이는 나무줄기가 세 아름이 넘어 보인다. 저 얼마나 당당한 나무인가, 하고 나무의 뒤를 돌아보니 속은 텅 비어있다. 그럼에도 뻗어나간 가지에는 초록 잎이 성성하다. 운부암을 거쳐 간 고승대덕보다 오래 머물러서일까. 비워내고도 활기차다. 단단하고도 유연한 심지를 온몸으로 보여준다. 알고 보니 이 나무가 의상 대사의 지팡이라고 한다. “의상 대사가 운부암을 창건할 때, 자신이 짚던 지팡이를 바닥에 꽂으니 즉시 살아나 푸른 잎이 돋더라.”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고요히 하루가 흘러가고 있었다. 운부암 마당 한가운데 팔공산 산세의 기운이 모인 곳이라는 나무토막에 앉았다. 조선조 문인 유방선(柳方善, 1388~1443)이 쓴 시 ‘운부사雲浮寺’를 되새긴다. 그토록 그리던 그 마음 필경 시기대로 되리라.
혼자서 운부사를 찾아가니,
선방 고요해서 의지할 만하네.
골짜기는 깊어 말수레는 적고,
승려는 늙어 해는 더디 가네.
대나무 그림자 빈 걸상을 침노하고,
솔바람은 엷은 옷에 불어오네.
산신령 응당 어둡지 않으니,
집 짓는 것이 필경 시기대로 될 것이다.
獨訪雲浮寺 禪房靜可依
谷深車馬少 僧老歲年遲
竹影侵虛榻 松風透薄衣
山靈應不昧 結社會如期
사진 = 최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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