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음식기행] 푸른 하늘, 붉은 수수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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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음식기행] 푸른 하늘, 붉은 수수밭
  • 박찬일
  • 승인 2015.10.07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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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명 스님과 함께 수수 찾아 떠난 여행길
 
 
 
 
 
“아직 탈곡은 좀 있어야 해요. 올해 수수가 아주 좋습니다.”
 
시원시원하고도, 날카로운 눈매의 농민 경동호 선생이 설명한다. 수수는 이르면 9월 중순부터 수확하는데, 아직 마지막 곡기를 알에 채우고 있는 중이다. 경 선생은 한살림의 생산자 회원이자 괴산한살림연합회의 회장이다. 우리나라 생협 운동의 중심에 있는 단체에서 일하는 것인데, 물론 그 일이란 게 농사요 농민의 일이다. 흔히 대처에는 ‘유기농 농작물’을 생산하는 것으로 일단 저명하긴 하다. 
 
“유기농이 농약 안 쓰고 작물 기른다는 사전적인 의미는 맞습니다. 한 걸음 더 가서 보면, 사람답게 농사짓고, 그걸 나눠 먹자는 뜻이기도 합니다.”절에서 보자니, 그 말씀이 부처에 이른다. 부처께서 골고루 중생들이 옳은 것을 먹어서 세상이 다 이로울 것을 말씀하셨으니 말이다. 
 
괴산은 산지가 우뚝우뚝하고, 우리가 들른 칠성면이 그렇지만 유달리 이 마을이 너르고 기름져 보인다. 뭐랄까, 말갛고 환한 얼굴의 들판이 품도 너르게 벌어져 있는 것이다. 
 
“여기도 다 노인들이 많아요. 농사도 힘들지요. 환갑 넘은 제가 어린 축에 듭니다. 우리 마을은 사평리라고, 모래땅이 많았는데 원래 너르고 좋은 땅이었어요.”
 
경 선생은 벼와 잡곡이 주 생산품이다. 가장 힘들고 ‘영양가 없다’는 그 농사다. 이앙기다 콤바인이다 사람 손을 줄이는 농사가 전개되어 온 벼와 달리 잡곡은 기계화도 거의 안 되어 있고 단위면적당 수확량도 아주 적다. 게다가 돈도 별로 안 된다. 그나마 한살림 회원을 중심으로 잡곡에 대한 수요가 꾸준하게 늘고 있어서 그저 지키고 있는 농사이기는 하다. 나중에 누가 이 농사를 더 지어갈지 사실 앞이 캄캄한 일이라고 한다.  
 
차를 타고 수수밭으로 간다. 가는 길에 논에는 피가 삐쭉삐쭉하다. 예전 같으면 남 보기 창피하다고 말끔히 피사리를 해서 없어질 것들이 꽤 보이는 것이다. 김 매기할 인력이 없어 저렇다. 경 선생 댁 수수밭이 잘 정돈되어 키가 훌쩍하게 자라 있다. 
 
“옛날에 누가 수수를 지어요. 그 정성 있으면 벼를 하지. 빗자루나 하려고 밭둑 같은 데 한 줄 심는 게 고작이었지요.” 스님도 고개를 끄덕인다. 수수에 대한 기억이 한껏 일어난다. 
 
“빗자루 묶는 게 일이었어. 그치. 알곡은 털어먹고 빗자루 묶고, 그때는 동물 털이나 수수밖에 방 빗자루 재료가 없었어요. 수수는 대단한 곡식이 아니었지. 얼추 익으면 다들 가서 툭툭 털어서 구워먹곤 했어요. 간식이 없을 때니까. 먹고 나면 검불 탄 게 얼굴에 까맣게 묻었다고(웃음).”
 
경 선생도 옆에서 옛기억이 나는지 함께 파안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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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한 잡곡에 정 도타운 잡담일세
잡곡은 문자 그대로 벼가 아닌 다른 곡식류를 말한다. 보리, 조, 기장, 수수, 팥, 녹두, 메밀, 귀리, 옥수수에 콩이 그런 종이다. 밥에 두어 먹고, 각종 대체 곡물류도 쓰고 반찬도 했다. 잡곡이 없었으면, 한반도에서 음식다운 음식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맞아요. 잡곡이 힘겨운 농사인데 저것들 없으면 우리 밥상에 올릴 게 뭐 있겠어.”
 
괴산은 우리나라 유기농 잡곡의 최대 산지이고, 그 혈맥은 경 선생이 이어왔다. 그의 수수밭에 오니, 옛날 장예모 감독과 여배우 공리를 유명하게 만든 ‘붉은 수수밭’이란 영화가 생각난다. 그 장엄한 도입부만큼은 아니어도 붉은 수수가 도도하게 펼쳐져 있다. 
 
“요새 수수는 작아요. 키를 왜소화시킨 거죠. 벼도 그렇고 키를 줄여서 수확을 늘린 거예요. 수수는 9월에 터는데, 대개 그 시기 전에 태풍 불고 그러잖아요? 키 큰 수수는 남아나질 않았어.”
 
그렇다 해도 키가 제법 훌쩍하다. 참새 떼가 연신 몰려와 신이 났다. 
 
“어, 별 수 없어요. 머리가 얼마나 좋은데, 허수아비로는 턱도 없지(웃음). 알곡에 양파망 같은 걸 씌우기도 하는데, 저 많은 수수에 언제 씌워. 할 사람이 없어요.”
 
수수는 붉다. 그 붉은 기운을 우리 민족은 상서롭게 봤다. 잡곡 중에 또 하나의 붉은 색 팥을 함께 써서 멋진 음식을 만들어냈다. 스님의 수수팥떡. 수수밭에서 돌아와 경 선생의 부엌으로 가니, 벌써 익반죽으로 수숫가루를 치대고 계신다. 
 
“붉은 색은 액막이로 쓰는 것이고, 두 가지 붉은 색의 곡물을 쓰니 액막이로 최고지. 그보다 실은, 맛이 좋아요.”
 
스님이 새알만큼 떼어낸 수수반죽을 금방 찌고 삶아서 팥고물을 묻혀낸다. 촬영은 뭐, 연신 사람들에게 권하느라 바쁘시다. 절에 딸린 수천 평 농사일까지 관장하고, 상좌들에 물릴 때가 지난 지금도 스스로 공양주로 갈무리에 나서는 스님의 마음이 여기 있다. 
 
입안에 가득, 고물 묻은 수수팥떡 경단이 씹힌다. 구수하고 맛있다. 얼마 만에 이런 구수한 음식을 먹어보는지 모른다. 얄팍하고 온갖 양념의 맛으로 점철한 도시의 음식에서 내가 굴러왔던 시간들이었다. 
 
“수수부꾸미도 많이 해먹었지. 수수깡 알죠? 안경 만들던 거. 수수를 우리가 꽤 농사 많이 지었던 거야.”스님의 말씀. 초등시절, 학교 앞에서는 늘 수수깡을 팔았다. 
 
“그때 농가에서 그걸 내다팔아서 수입을 좀 얻었어요. 요즘에야 뭐 장난감이 좀 많아? 수수깡을 누가 사가(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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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 자라라고, 나이만큼 꿰어 먹이던 수수경단
수수는 시비를 많이 안 해도 잘 자라는 고마운 곡물이다. 최소의 노력에 최대 생산으로 보답한다. 연속으로 지어도 잘 자라고, 따로 모종을 내지 않고 직파해버려도 쑥쑥 싹이 올라온다. 일손 모자라는 요즘 농업에서 이런 효자가 따로 없다. 더구나 요즘 국산 잡곡이 인기도 올라가니 더 다행스럽다. “여기만 해도 고령 농민이 많아서 고추 농사조차 어려워요. 그걸 허리 굽히고 수시로 김매고 하기 어려워요, 유기농으로 하는 한에는. 그래서 수수가 너무도 고마운 거예요. 그냥 놔둬도 잘 자라니까 말이야.”
 
수수는 원래 5월에 씨를 뿌리는데 올해는 가뭄으로 한 달이 늦어졌다. 6월 10일에 직파한 것을 10월에 수확한다고 한다. 스님과 함께 온 노보살님이 종자 삼는다고 밭에서 수수를 한 대 꺾어다 들고 계신다. 이 놈은 벌써 알이 거의 다 찼다. 알곡을 씹어 먹어보니 구수한 곡물의 단물이 나온다. “올해는 가물어서 파종을 제때 못했어요. 보식(추가로 더 심는 것)도 하고 아주 고생이 많았어요.” 수수는 앞서 액막이로 먹는 고유 음식이라고 했다. 그것은, 사람의 운명에도 작용했다. 백일잔치, 돌잔치에 놓는 수수경단이나 팥 음식이 그러했다. “어려서 수수경단을 주는데, 참 특이한 풍습이 있어요. 생일날 해뜨기 전 어머니가 꼬챙이에다 경단을 꿰 가지고 문구녕으로 들이밀어요. 자다가 들이미니까 얼마나 먹기 싫던지. 그걸 열 살 때까지 해주셨어요(웃음).”
 
스님이 거든다. 
 
“그렇죠. 나이만큼 경단 만들어서(웃음).”
 
괴산 물 좋고 바람 좋은 땅에서 느릿하게 시간이 흘러간다. 모두들 평안한 웃음과 몸짓이다. 한 해, 농촌에 이런 여유가 어디 있으랴. 다 부처님의 공덕이다. “잡곡은 이제 우리가 얼마나 할지 몰라요. 수입이 80프로입니다. 벼나 그저 하고 있을 뿐이죠. 이러다가 우리 잡곡은 다 사라져 버릴 거예요.”
 
그러면서 농담 비슷하게 하시는 말씀. 
 
“어디 방송에서 수수니 뭐니 잡곡 같은 거 건강에 좋다고 한번 크게 나오면 좀 팔립니다. 몸에 좋다면 사지, 잡곡 쓰이는 용도가 많이 줄었어요. 수입 밀가루로 하는 온갖 음식이 넘쳐나니까.”
 
스님이 고개를 끄덕인다. 
 
“축서사 스님이 메주를 하시는데 그럽니다. 수입 콩이랑 우리 콩이랑, 값이 한 가마니하고 한 말 턱이라고. 그렇게 가격이 차이가 나니 누가 우리 콩 가치를 알아준대도 값이 세서 어려워요. 참 힘든 일입니다.”관세음보살이 이 소리를 두루 들으시길 그저 우리는 빌고 있을 뿐이었다. 
 
마을 탈곡 시설 앞에 작은 정자가 있고, 연못을 두었다. 거기 앉아 일행은 가을 온기를 몸으로 느껴본다. 보명 스님이 휴대폰을 꺼내 아이들 사진을 보여주는데, 눈이 크고 피부색이 까무잡잡한 인도 아이들이다. 십시일반으로 지은 학교에 이런 아이들 160명이 다니고 있단다.  
 
연꽃이 피었다 지니 연밥 안에 연씨가 까맣게 다 익었다. 스님이 꺼내어 나눠주신다. 돌아오는 찻간에서 잠깐 꿈에 들었다. 그 연씨가 크게 크게 자라 우리집을 가득 채우는 꿈이었다. 관세음보살.                                                           
 

 

 
 
박찬일
‘문학과지성사’가 운영하는 ‘로칸다 몽로夢路’의 헤드셰프이자 작가. 어머니 치맛자락 앞에서 콩나물과 마늘을 다듬으며 요리를 시작했다. 서울에서 몇몇 히트식당을 열었으며, 한국 식재료를 이용한 이탈리아 요리는 그가 최초이다. ‘글쓰는 요리사’로 『뜨거운 한 입』, 『백년식당』,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 『지중해 태양의 요리사』, 『보통날의 파스타』 등 그만의 따뜻한 시선과 감성어린 문장이 돋보이는 책들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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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명 스님의 그리운 어머니 손맛 수수팥떡
 
 
재료
수수가루 3컵, 찹쌀가루 3컵, 팥 2컵, 소금, 설탕
 
Tip_
수수와 찹쌀을 가루로 낼 때는 하룻밤 물에 담가 불렸다가 방앗간에 가져가면 소금으로 간을 맞춰 빻아 준다. 반죽을 미리 만들어 두고 냉동실에 보관했다가 필요할 때마다 꺼내 써도 좋다.
 
만드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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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수가루와 찹쌀가루를 5:5 또는 7:3 비율로 섞어 뜨거운 물에 익반죽한다. 소금 간을 하지 않은 가루일 경우, 약간의 소금을 넣어 간을 맞춘다.
 
 
 
 
 
 
2. 반죽을 한 입 크기로 떼어 동그랗게 경단을 빚는다.
 
 
 
 
 
 
3. 끓는 물에 경단을 넣어 익힌 다음 찬물에 씻어 체에 밭쳐 식힌다.
 
 
 
 
 
 
 
4. 삶아 놓은 팥을 으깨어 설탕을 섞어 팥고물을 만든다. 팥고물을 묻힌 경단을 손으로 쥐어 고물이 떨어지지 않게 해서 그릇에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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