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 스님의 禪談] 수행은 적적성성寂寂惺惺 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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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 스님의 禪談] 수행은 적적성성寂寂惺惺 하게
  • 금강
  • 승인 2015.12.10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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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지게 살 수 있는 절호의 시간
열일곱 살 그때, 가까운 친구들은 도시의 학교로 떠나고, 시골학교에 남은 나는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받았다.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틈만 나면 친구들과 어울려 춤을 추고, 술도 마시는 불량 학생이 되었다. 방황의 시간은 6개월 동안 이어졌는데 그때가 앞으로의 삶에 대해 처절하게 고민하고 깊이 있게 생각하는 계기가 되어 주었다.
 
그 무렵 우연하게 만난 혜능 선사의 『육조단경』을 보면서 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遇 처럼 ‘사람의 삶이 어렵고도 귀한 선택’이기에 ‘멋지게 살 수 있는 절호의 시간’이라는 생각과 함께 인생을 소모하지 않고 귀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바빴다. 그 해 겨울에 암자에 머물며 은사스님을 좇아 산 생활을 하게 되었다. 차가운 물로 빨래를 하고, 석유곤로로 밥을 짓고, 도시락을 싸들고 학교에 다녔다. 선생님을 졸라 특별활동 참선반을 만들기도 하고, 학교공부는 하지 않고 오로지 불교와 철학 관련 서적만 탐독했다. 
 
비록 어린 나이에 출가했지만 나는 그때의 선택을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 출가 수행자는 나의 운명임을 믿으며 감사하게 생각한다. 평상시 시비 분별하는 마음의 작용이 없고, 현재의 것에 생생하고 열려있는 마음에 늘 즐겁다. 그런데 나의 이런 성향은 출가 후에 공부를 통해 얻어진 것은 아니라고 가끔 생각한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성격은 타고난 부분이라고 부러워하기도 하지만, 나는 고등학교 시절의 단순함이 원인이 아닌가 생각한다. 열일곱 살에서 열아홉 살까지 나이는 한 가지를 선택하면 어떠한 방해가 있다 해도 고집스럽게 오로지 그것에 몰입하는 시기라는 특성이 있다. 그 성품이 살아있으면 나이를 먹어도 그 코드로 수행을 하거나 일을 처리하게 되는데 내 경우가 거기에 해당하지 않나 싶다.
 
본래 번뇌를 일으킬 필요가 없는 단순함의 적적寂寂이라는 코드가 있지만, 우리의 감각기관은 끝없이 비교하고, 분별하고, 욕심을 부리는 번뇌들로 가득하다. 그리하여 엉뚱하게도 먼 길을 돌아가거나 헤매는 경우가 많다.
 
 
| 티끌세상을 벗어남은 보통일이 아니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는 병실에서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비즈니스 세상에서 성공의 끝을 보았다. 타인의 눈에 내 인생은 성공의 상징이다. 하지만 일터를 떠나면 내 삶에 즐거움은 많지 않다. 지금 병들어 누워 과거 삶을 회상하는 이 순간 나는 깨닫는다. 정말 자부심 가졌던 사회적 인정과 부는 결국 닥쳐올 죽음 앞에 희미해지고 의미 없어져 간다는 것을. 어둠속 나는 생명 연장 장치의 녹색 빛과 윙윙거리는 기계음을 보고 들으며 죽음의 숨결이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제야 나는 깨달았다. 생을 유지할 적당한 부를 쌓았다면 이후 우리는 부와 무관한 것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죽음 앞에서 내려놓고 되돌아보기보다는 삶속에서 단순해지고 고요하면 좋겠다. 번뇌가 없는 고요 고요한 적적寂寂을 만들기 위해 화두의 의단이 필요하다. 낙엽이 다 떨어진 앙상한 가지만 남은 겨울 숲길을 걸으며 생각한다. 파란 하늘에 드러난 나뭇가지들과 듬직한 맨살을 드러낸 나무들이 마치 번뇌를 다 떨치고 난 선명한 고요의 언어 같다. 담백한 저 말을 하기 위해서는 한바탕 몸서리를 쳐야한다. 매년 홍역을 치르듯 꽃을 떨어뜨리고, 열매를 떨어뜨리고, 수많은 손들을 내려놓는다. 
 
티끌세상을 벗어남은 보통일이 아니다.
고삐 끝을 꼭 잡고 한바탕 일을 치르라.
매서운 추위가 한 번 뼛속에 사무치지 않으면
어떻게 매화 향기 코를 찌르랴.
逈脫塵勞事非常 형탈진로사비상 
緊把繩頭做一場 긴파승두주일장
不是一番寒徹骨 불시일번한철골 
爭得梅花撲鼻香 쟁득매화박비향
- 황벽 선사(?~850)
 
얼마 전 프랑스에서 온 불교학자 피터 스킬링 교수는 “명상을 하고서야 내 삶의 고통, 그 뿌리가 집착임을 알게 됐다. 내가 붙들고자 하는 대상의 실체가 그림자임을 알게 되면 삶이 훨씬 경쾌하고 지혜로워진다. 화가 날 때도 전보다 덜 심각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집착의 강도가 약해지는 만큼 지혜로운 통찰이 생겨난다,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그림자처럼 바깥에 투영된 것임을 알게 됐다. 그걸 잡으려고 욕망을 일으키는 나를 보게 됐다. 전에는 그게 안 보였다.”고 한다. 
 
 
| 근원으로 돌아가는 오묘한 길(妙性)
번뇌가 고요해지는 적적寂寂이 되면, 또렷또렷 해지는 성성惺惺을 만난다. 스님들이 틈만 나면 부르는 노래인 증도가를 쓰신 현각 스님은 후학들에게 열두 시간 어느 때나 또렷한 맑은 정신으로 의심을 일으켜 참구하여 흐리지 말고, 앉거나 서거나 눕거나 다니거나 항상 자세히 광명을 돌이켜 스스로 마음을 살펴보라 당부한다. 
 
적적寂寂이란 외부의 좋고 나쁨을 생각하지 않음이고, 성성惺惺이란 흐리멍덩하거나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무기無記의 상相을 내지 않음이다. 만약 적적하기만 하고 성성하지 못하면 그것은 흐리멍덩한 상태이고, 성성하기만 하고 적적하지 않으면 그것은 무엇엔가 얽힌 생각이다. 적적하지도 않고 성성하지도 않으면 그것은 얽힌 생각일 뿐 아니라 또한 흐리멍덩함에 빠져 있는 것이다. 적적하기도 하고 성성하기도 하면 그것은 곧 성성하고 적적함이니, 이것이야말로 근원으로 돌아가는 오묘한 길(妙性)이다. 
 
고려시대의 선승 보조지눌 스님은 『정혜결사문定慧結社文』에서 “고요히 연려緣慮를 잊고 홀연히 홀로 앉아서 바깥 대상을 취하지 않고 마음을 거두어서 안으로 비추되, 먼저 고요한 것寂寂으로써 연려를 다스리고 다음 또렷한 것惺惺으로써 혼침昏沈을 다스린다. 혼침과 산란散亂을 고루 조성하여 취사取捨하는 생각이 없이 마음으로 분명하여 확연히 어둡지 않고 생각 없이 알며, 일체 경계를 취하지 않고 허명虛明한 마음을 잃지 말며 담연湛然히 상주常住하라.”고 하였다. 이때의 적적은 곧 정定에 해당하고 성성은 혜慧에 해당한다.
 
결국 수행은 번뇌를 쉬는 고요함과 본래면목이 살아있게 만드는 일이다.
 
그 마음
초롱초롱하고 고요 고요해야 하니
망상이 초롱초롱해서는 안 되네
그 마음
고요 고요하고 초롱초롱해야 하니
멍청히 고요 고요해서는 안 되네        
         
 
 
금강 스님
미황사 주지. 조계종 교육아사리. 서옹 스님을 모시고 ‘참사람 결사운동’, 무차선회를 진행하였고, 고우 스님을 모시고 한국문화연수원의 간화선 입문과 심화과정을 진행하였다. 홍천 무문관 프로그램을 개발하였고, 참선집중수행 ‘참사람의 향기’를 80회 넘게 진행하며 일반인들과 학인스님들의 참선수행을 지도하고 있다. 
저서로 『땅끝마을 아름다운 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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