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전법의 종교와 월간 「불광」의 발자취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성취하고 가장 먼저 하신 일은 5비구에게 달려가 법을 설한 것이다. 그리고 제자들이 승단을 이루었을 때 가장 먼저 한 일도 전도선언을 하고 전법傳法을 떠나게 한 것이다. 불교가 중국으로 전래되는 순간도 백마에 불상과 경전을 싣고 오는 전법의 풍경으로 그려지고 있다. 심지어 불립문자不立文字와 이심전심以心傳心을 지향하는 선종조차 초조를 ‘달마達磨’라고 부른다. ‘달마(Dharma)’란 곧 ‘법法’을 의미함으로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 즉 ‘달마가 서쪽에서 오신 뜻’은 법을 전하기 위함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불교는 ‘전법傳法의 종교’이며, 불교사는 ‘전법傳法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법의 종교로서 불교의 특징은 진리의 말씀을 널리 전하여 중생에게 해탈과 열반을 얻게 하는 것이다. 광덕 스님의 불광운동 역시 ‘전법으로 믿음을 삼겠다.’는 전법운동이었으며, 월간 「불광」은 그와 같은 전법의 전통과 원력으로 창간되었다.
1974년 가을 종로 대각사에서 창간이 착수된 「불광」은 그해 9월 광덕 스님을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잡지 등록을 마치면서 창간이 본격화되었다. 당시 스님을 보필해 창간을 도운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 후에 조계종 기본선원장을 지낸 지환 스님과 동국역경원에 재직했던 박경훈 선생이 편집자문을 맡았고, 지견 스님이 편집장을 맡아 실무를 진행했다. 제자題字는 여초 김응현 선생이 맡았지만 표지 디자인은 당시 이화여대 불교학생회장이, 홍보는 대불련 서울지부장이 맡는 등 청년 불자들까지 힘을 보탰다. 이렇게 해서 1974년 11월, 78쪽 짜리 「불광」 창간호가 탄생했다.
「불광」의 창간은 불교계로부터 큰 호응을 받았다. 그해 종정으로 취임한 서옹 스님, 전 종정 고암 스님, 통도사 조실 월하 스님 등 종단의 어른들은 축사를 보내 힘을 실어주었다. 특히 경봉 스님은 고령임에도 휘호와 함께 10회에 걸쳐 법어를 연재했다. 또 월주 스님, 고산 스님 등은 구독회원으로 힘을 보탰고, 동국대와 조계종 종립학교에서는 「불광」을 ‘교학법회’ 교재로, 전국의 주요사찰들도 포교지로 채택하며 전법지의 창간에 화답했다.
창간 초창기에는 재정난 등으로 매회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불광」은 발전을 거듭했다. 1980년 1월 원색화보가 처음 등장했고, 2년 뒤에는 화보를 16면으로 증면한 데 이어 1984년에는 본문을 전면 가로쓰기로 전환했다. 2008년 1월 144면이던 지면을 160면으로 증면하였으며, 2012년 1월부터는 판형을 크라운판으로 확대하고 전면 4도 인쇄로 전환하여 이미지 시대에 부응하는 잡지로 변신했다.
그동안 「불광」은 교계 안팎으로부터 여러 차례 권위 있는 상을 수상하면서 불교계를 대표하는 잡지로 성장해왔다. 1997년 ‘전국어린이부처님그림그리기 대회’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봉축위로부터 받은 특별상을 시작으로 2005년 포교사단의 감사패를 받고, 2012년에는 제10회 대원상(포교대상)을 수상함으로써 교계에서 전법지로서의 위상을 인정받았다.
「불광」에 대한 이런 평가는 교계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1994년 문공부 선정 우수 잡지 표창을 시작으로 2005년 한국잡지협회로부터 우수 잡지 표창을, 2010년 문체부 장관 표창을 받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2011년과 2013년 문체부 선정 ‘우수콘텐츠 잡지’에 선정됨으로써 대외적으로도 최고의 잡지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2 불광운동의 발신자
광덕 스님은 「불광」을 ‘소리 없는 깃발’이라고 했다. 「불광」은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전법의 깃발이며, 한 권의 「불광」을 한 사람의 전법사로 인식했던 것이다. 「불광」이 갖는 이런 위상과 역할 때문에 「불광」은 정보전달과 담론생산이라는 잡지의 역할에 머물지 않고 실제적인 전법운동으로 확산되어 갔다.
「불광」을 읽은 독자들은 광덕 스님이 주관하는 대각사 법회로 모여 들면서 전법지로서의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이즈음 광덕 스님은 잡지만으로는 전법에 한계가 있음을 느끼고 있던 터였다. 스스로 등불이 되어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되기 위해서는 보다 실천적인 신행조직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1975년 12월호에서 광덕 스님은 “행동으로 뛰어나오지 못하는 불법은 불법 이해의 지식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불광은 행동을 통하여 인간 본성의 무한성을 소리 높이 외쳐왔지만 그것은 아직은 지상을 통한 절규 밖을 넘지 못했다.”고 술회하며 불광법회의 창립취지를 밝혔다. 이후 광덕 스님은 매주 목요일 대각사에서 야간법회를 열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불광법회라는 신행조직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대각사 법회는 날이 갈수록 성장을 거듭하기 시작했다. 「불광」을 통해 꿈꾸어왔던 전법의 열정과 메시지는 소리 없는 깃발로 끝나지 않고 ‘도심전법’이라는 역동적 에너지로 분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3 근대불교를 기획해온 불교잡지
혹자는 ‘근대불교를 기획하고 실현해간 동력은 8할이 불교잡지’라고 평가한 바 있다. 실제로 나라가 위기에 처하고, 불교가 역경에 직면했을 때 각종 불교잡지가 발행되었다. 1912년 원종 종무원에서 발간하고 권상로 선생이 편집을 맡았던 「조선불교월보」가 발간된 이후 해방을 맞이할 때까지 20여 종에 달하는 불교잡지가 발간되었다.
근대불교의 산물로 등장한 불교잡지들은 단순히 불교를 소개하는 차원을 넘어 다양한 개혁론과 불교의 비전을 제시해왔다. 그러나 이 잡지들은 대부분 통권 10호 내외를 발간하다가 폐간하기를 되풀이했고, 100호 이상을 넘긴 잡지는 3개에 불과하다. 1924년 조선불교단에서 발간한 「조선불교」가 지령 121호로 제일 오랫동안 명맥을 유지했다. 다음으로 역시 같은 해에 조선불교중앙교무원에서 발간한 「불교」가 지령 108호로 뒤를 이었고, 1935년 불교시보사에서 발간한 「불교시보」가 지령 105호까지 발간되었다.
하지만 해방 이후 이들 불교잡지는 극심한 침체기에 접어든다. 외적으로는 한국전쟁이라는 난관에 부딪치고, 내적으로는 불교정화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불교잡지들은 이 시기에 명맥이 끊어지기 시작했다. 불교잡지가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로 접어들면서부터이다. 1963년에 창간된 「법시」와 1968년에 창간된 「법륜」이 바로 그 주인공들이다. 이 두 잡지는 비록 중간에 결호가 생기긴 했으나 90년대 초까지 발간되며 불교잡지의 명맥을 지켜왔다.
한국에서 불교잡지의 전성기는 1980년대 이후에 열렸다. 이 시기부터 종단이나 불교기관은 물론 각 사찰단위에서 사보 형식의 불교잡지를 발간하기 시작했다. 이들 잡지 중에는 알찬 내용과 기획으로 기대를 모은 잡지도 있었으나 단명했고,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대부분의 잡지는 기관홍보나 사찰의 소식지 등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전국을 커버하는 불교잡지로 분류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따라서 전법이라는 창간정신, 지령 500호에 이르도록 한 호의 결호도 없이 발행해온 지속성, 매호마다 알찬 기획과 내용을 담아내는 성실성, 42년간 창간정신을 고집해온 편집방향 등에서 「불광」은 한국불교사에 한 획을 긋는 잡지로 평가할 수 있다.
4 한국불교의 진단과 비전 제시
2016년 6월로 지령 500호를 달성한 「불광」은 한국의 그 어떤 불교잡지도 오르지 못한 높은 봉우리에 올랐다. 그러나 「불광」 500호의 의미는 긴 역사와 권수가 아니라 42년 동안 견지해왔던 문제의식과 알찬 내용에 있다. 「불광」은 창간 초기부터 한국불교가 직면해 있던 각종 현안을 다각도로 분석하며 불교의 미래에 대한 고민을 내려놓지 않았다.
이런 고민과 방향은 창간 1주년을 맞아 잡지 발행이 궤도에 오르면서 내용으로 녹아나기 시작했다. 1975년 9월 ‘불광논단’을 기획하여 ‘한국불교의 당면과제’와 ‘해방동이 불자의 현주소’를 다루었다. 뒤이어 ‘오늘의 포교를 점검한다’와 ‘한국불교 포교혁명론’ 등을 연이어 게재하며 전법에 대한 열정을 담아내기 시작했다. 1977년에는 ‘승가교육’, ‘전통 속의 불교를 점검한다’, ‘불교와 현대의 제문제’를 다루었고, 1978년에는 ‘한국불교 회고와 전망’, ‘오늘의 불교 어떠해야 하는가?’ 등을 다루면서 종단, 포교, 교육, 신도조직, 역경사업 등 불교 전반에 걸쳐 문제를 진단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내용을 다루어왔다.
한국불교에 대한 「불광」의 이런 책임의식은 80년대와 90년대로 계승되었다. 1980년 ‘한국불교 무엇을 할 것인가?’를, 1983년 100호 특집으로 ‘오늘의 보살, 무엇을 할 것인가?’와 ‘이것이 불교 중흥의 길이다’ 등을 기획했다. 1986년에는 ‘2000년대 중생불교 도약의 해’를, 1994년에는 ‘불교 내일을 위한 제언’ 등을 다루며 불교의 미래를 제안하기 시작했다.
「불광」의 이런 전통은 2000년대로 접어들어 ‘불교와 21세기’라는 코너를 거쳐 2013년 조성택 교수의 ‘21세기 한국불교를 위한 교판敎判을 기대하며’ 등으로 계승되었다. 이렇게 「불광」이 지속적으로 다루어왔던 한국불교에 대한 진단과 미래전망은 당대 지식인들이 가지고 있던 미래 불교에 대한 밑그림이 되어왔음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불광」은 현대 한국불교의 모습을 기획하는 싱크탱크로서의 역할을 해왔다고 평가할 수 있다.
5 교리의 재해석과 현대적 신행론
한국불교에 대한 문제의식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난해한 교리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시대적 분위기에 부합하는 신행론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첫째, 경전과 불교교리에 대한 현대적 재해석을 들 수 있다. 1976년 11월 광덕 스님은 ‘보현행원품 강의’를 시작으로 다양한 경전 강좌를 지속적으로 게재했다. 스님은 뛰어난 문학적 재능으로 불교교리를 쉽고 명확하게 설명했다.
학자들이 필진으로 참여하는 불교교리 해석과 경전강좌는 이와 같은 광덕 스님의 정신에 부응하는 것이었다. 1980년 ‘화엄경의 세계’를 시작으로 다양한 ‘경전의 세계’가 연재되기 시작했다. 1985년에는 한국불교사를 다룬 김영태 교수의 ‘한국불교의 새벽’, 1986년에는 고익진 교수 등 당대의 이름난 불교학자들이 참여하는 ‘바라밀 교학강좌’가 연재되기 시작했다. 2000년대로 접어들어 최봉수 교수의 ‘교학강좌’와 2012년에는 ‘불교, 정확하고 명쾌하고 자유롭게’로 계승되어 오던 교리강좌는 2016년 현재 ‘불교를 만나다’와 ‘중론에게 길을 묻다’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둘째, 현대적 신행방향의 제시다. 「불광」이 다루어왔던 기획이나 연재물을 살펴보면 신행과 수행관련 내용이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1977년 ‘믿음이란 어떤 것인가?’로부터 시작된 신행관련 내용은 이후 「불광」의 주요 콘텐츠로 자리 잡아왔다. 1979년 석주 스님, 일타 스님 등이 참여하는 ‘불교는 어떻게 믿는가’와 창간 5주년 기념으로 ‘불법은 행복의 문을 연다’ 등이 뒤를 이었다. 1994년에는 고우익 선생의 ‘불자가정의례’가 연재되고, 2001년에는 ‘개선되어야 할 장묘문화’ 등이 기획으로 다루어졌다.
신행과 관련된 내용으로 빼놓을 수 없는 분야가 신행수기 공모다. 1994년 창간 20주년 기념으로 시작된 신행수기 공모는 5년을 주기로 열렸다. 특히 1999년에는 창간 25주년 특집으로 신행수기 공모작과 함께 전국의 수행처, 전국의 불교서점, 불교상담전화 등 신행과 관련된 내용을 별책부록으로 발간하여 전법지로서의 역할을 다해왔다.
셋째, 신행 못지않게 비중 있게 지면을 채워왔던 분야는 수행이다. 광덕 스님 스스로가 참선 수행을 통해 불교에 입문하고 오랫동안 선방에서 수행한 이력 때문인지 「불광」에는 선에 대한 내용이 큰 비중을 차지해왔다. 1977년 ‘선의 원리’라는 주제 아래 경봉 스님, 구산 스님, 이종익 박사, 백봉 선생 등 당대의 쟁쟁한 선지식들의 글을 수록했다. 이밖에도 선과 관련된 주제에는 고형곤, 이희익, 김용정 등 관련 학자들도 두루 참여해왔다.
1981년 ‘선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광덕 스님의 연재가 시작됐으며, 1985년에는 서옹 스님의 ‘선불교의 근본성격’이 실렸다. 1993년에는 박영재 교수의 ‘재가의 선수행’이 연재되기 시작했고, 1997년에는 ‘불교수행 대중화를 위한 방편모색’ 등을 기획하며 수행불교의 길을 제시해왔다. 이후 1999년 혜봉 거사의 ‘수행합시다’를 시작으로 2004년 ‘1인 1수행법 갖기’, 2007년 ‘마음공부 이야기’ 등으로 이어졌다. 이런 전통은 현재까지 지속되어 2016년 6월 현재는 ‘금강스님의 선담’이 진행되고 있다.
6 인물탐방, 선지식과 사람의 재발견
정신적 가치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사람을 발굴하고 연결하는 것이다. 「불광」은 제방의 여러 선지식을 찾아가 법을 묻고, 열심히 활동하는 불자들을 발견하여 소개하는 역할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1978년 6월 ‘김불국생 보살님을 찾아서’로 시작된 인물 탐방기사는 1989년 5월 원로작가 김동리 선생을 소개했다. 이렇듯 인물탐방과 소개는 「불광」의 주요기사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1991년 7월 불교계에서 활동하는 인물들을 소개하는 ‘오늘을 밝히는 등불들’이 신설되었고, 첫 이야기로 안나푸르나를 등반하는 해종 스님이 소개되었다. 이후 1996년 2월 종정 월하 스님을 찾아 법을 묻는 것을 시작으로 선지식 탐방이 등장했고, 1999년 12월엔 ‘20세기 한국불교를 빛낸 스님들’이 수록되었다. 이렇게 불교계의 큰 스님이나 불자들을 찾아가 법을 묻거나 불자의 삶을 소개하는 내용은 2016년 현재 ‘어의운하’라는 코너로 계승되고 있다.
탐방과는 다소 결이 다르지만 대담기사도 인물과 관련된 분류에 해당한다. 1989년 11월엔 송석구 교수가 서옹 스님을 대담했고, 1993년 11월엔 문서포교를 주제로 박경훈 선생의 대담이 게재되었다. 1994년 1월에도 연속기획을 마련하여 주목받는 불교계 인물들의 대담기사를 수록했다. 이런 성격의 인물탐방은 2000년대 초 ‘어둠을 밝히는 촛불처럼’과 2010년대 ‘선불장을 찾아서’ 등을 거쳐 현재는 ‘만남’이라는 코너로 이어지고 있다.
7 성지순례, 불교의 공간적 재발견과 확장
오랫동안 비중 있게 지면을 채워왔던 내용 중 하나가 바로 국・내외의 불교성지에 대한 순례기사다. 첫째, 국내사찰을 순례하고 의미를 재발견하는 연재물이다. 1976년 4월 ‘명찰을 찾아서’라는 코너를 통해 통도사를 소개하는 것을 시작으로 사찰탐방 기사는 꾸준히 연재되기 시작했다. 같은 해 11월에 정영호 선생이 ‘신라 구산선문지를 찾아서’를 연재하면서 이는 새로운 장르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후 1982년 4월에 ‘고사의 맥박’, 1984년 1월에 ‘고사의 향기’, 1989년 3월에 ‘가람의 향기’라는 연재기사로 이어졌다.
그러다 1993년 3월 노승대 선생의 ‘바라밀국토를 찾아서’가 연재되면서 전국 곳곳의 명산대찰이 소개되기 시작했고,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설화가 깃든 산사기행’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2010년대 초반 ‘우리 절에 안기다’를 거쳐 현재는 ‘이광이의 절집방랑기’가 이런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불광」이 다루어온 사찰탐방은 불교적 공간에 대한 재발견이었으며, 아름다운 자연과 전통사찰을 담은 화보로 인해 보는 잡지로서의 재미를 더하게 했다.
둘째, 해외성지 순례를 통한 불교의 공간적 확장이다. 1987년 1월 ‘한국 비구 모스코바를 가다’라는 주제로 동구권 불교 상황을 소개하면서 「불광」의 시선은 해외로 확장되었다. 그러다가 1991년 5월 노승대 선생의 ‘카투만두 기행’이 해외성지 순례기사의 서막을 열었고 이듬해인 1992년 5월 ‘불국토순례기’가 본격 연재되기 시작했다.
해외불교 순례는 각 지역별로 약 6개월에서 8개월 정도의 분량으로 소개되었다. 1992년 노승대 선생의 ‘미얀마 불교기행’과 이병주 선생의 ‘중국 사찰 기행’이 연재되었다. 1993년 7월 홍순태 선생의 ‘청정불심의 나라 부탄’이, 1994년 1월 안정헌 선생의 ‘인도네시아 찬디보로부드르’와 김형균 선생의 ‘세계의 불가사의, 캄보디아의 불교유적’과 1995년 1월 김용복 선생의 ‘스리랑카에 현존하고 있는 고대도시 아누다라푸라’가 연재되었다.
1995년 7월부터는 이거룡 선생이 ‘부처님이 나신 나라, 인도’를 주제로 16회에 걸쳐 인도의 불교성지를 소개했다. 1996년에는 이상일, 이상원 선생의 ‘불교의 나라 태국’, 1996년 12월에는 이혜연 선생의 ‘베트남 불교’가 연재되어 불자들의 안목을 넓히는 데 기여했다.
해외성지 순례기사 중에 가장 오래 연재되었던 것은 1997년 11월부터 시작된 김규현 선생의 ‘수미산 순례기’로 2000년 11월까지 37회에 걸쳐 지면을 장식했다. 3회에 걸친 후기까지 합해 총 40회에 걸쳐 실크로드의 불교성지를 소개하여 성지순례의 신기원을 열었다. 그리고 2001년 4월부터는 혜초의 발길을 따라가는 ‘신왕오천축국전 별곡’을 통해 중앙아시아 지역의 불교성지에 대한 새로운 안목을 넓혀주었다. 이런 기획은 2012년에는 작가 하지권의 ‘지구촌 불교 성지’로 명맥을 이어왔다.
8 불광을 빛낸 필진들
「불광」 500호를 되돌아보면 빛바랜 지면에는 당대의 선지식들과 저명인사들의 옥고가 빼곡히 담겨 있다. 첫째, 당대를 대표하는 스님들이다. 1975년 경봉 스님은 ‘겁외가’와 ‘선의 원리’ 등을 기고했고, 석주 스님의 ‘선전촬요연의’와 일타 스님의 ‘불광의 성좌’를 비롯해 서옹 스님, 고암 스님, 구산 스님 등 당대 고승들의 글이 「불광」의 권위를 더하게 했다.
1978년에는 관응 스님과 월하 스님이, 1979년에는 벽파 스님과 월주 스님이 ‘한국과 한국불교’라는 주제의 글을 기고했다. 1980년대로 접어들어서는 광우 스님, 일타 스님, 운학 스님 등도 옥고를 기고했다. 특히 1984년에는 당시 종정이었던 성철 스님이 ‘해탈에 이르는 길’과 1988년에는 ‘불교의 근본사상’을 연재했다. 이처럼 「불광」에는 종정, 방장, 조실 등 불자들의 존경을 받던 큰 스님들의 원고가 수록되어 잡지를 빛나게 했다.
둘째, 불교학자 및 불교계 인사들의 참여다. 1975년 정태혁 교수의 ‘우란분절의 의의’를 시작으로 1977년 이종익 교수의 ‘선의 원리’, 1978년 홍정식 교수의 ‘오늘의 불교 어떠해야 하는가’와 동국대 총장을 지낸 조명기 교수의 ‘부처님 오신 뜻은’ 등이 기고되었다. 1979년에는 ‘한국과 한국불교’라는 주제로 동국대 총장을 지낸 황수영 교수를 비롯해 김영태, 김운학, 문명대, 서창업 등의 학자와 불자들이 기고를 이어갔다. 이밖에도 이기영, 정병조, 박선영, 오형근, 고익진, 강건기, 박성배, 목정배 등 저명한 교수들과 최석호 법사 등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대부분의 학자들과 인물들이 두루 참여했다.
셋째, 사회저명 인사들을 꼽을 수 있다. 1975년 미당 서정주의 ‘자하문’ 연재를 시작으로 사회 저명인사들의 원고들도 수시로 지면을 장식했다. 고형곤 연세대 철학과 교수의 ‘현대사조와 선의 세계’, 양주동 동국대 교수의 ‘불광만필’, 김용운 한양대 교수의 ‘불교와 현대의 과학사상’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밖에도 함석헌 선생, 변선환 목사, 송건호 전 한겨레신문 사장, 고은 시인, 최범술 선생, 이희익 선생, 김용정 교수, 인권환 교수, 서돈각 박사, 이병주 교수, 황산덕 변호사, 남지심 소설가, 이규택 중앙일보 주필 등 교수, 문인, 언론인, 정치인 등 수많은 저명인사들이 옥고를 기고하여 말 그대로 ‘창조적 생활인을 위한 교양지’로 발돋움했다.
9 백척간두에서 다시 길을 묻다
지령 500호를 맞는 「불광」은 한국의 어떤 불교잡지도 오르지 못한 전인미답의 봉우리에 우뚝 섰다. 하지만 42년간의 전통과 500호의 경험이 미래에도 그와 같은 성취와 영광을 보장하리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그동안 달려온 과정이 종이에 활자를 인쇄하는 단일한 미디어 환경에서였다면 지금은 하루가 다르게 미디어 환경이 급변하고, 대중들의 콘텐츠 소비성향 자체가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불광」은 백척간두百尺竿頭의 꼭대기에 올라서 있지만 여기에 안주하지 않고 미래를 향해 진일보進一步해야 할 상황에 직면해 있다. 다행인 것은 「불광」은 물을 만나면 다리를 놓고, 산을 만나면 길을 여는 전통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42년 동안 고비 고비 많은 난관에 봉착했지만 결국은 슬기롭게 극복해왔다. 이는 ‘전법의 깃발’이 되겠다는 원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처럼 강산이 4번 바뀔 동안 「불광」은 많은 변화와 직면했고, 또 그것을 극복해왔다. 그동안 발행인이 3번 바뀌었고, 8명의 주간과 여러 명의 편집장이 탄생했고, 사무실은 9번이나 바뀌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변하지 않은 것은 ‘소리 없는 깃발’이 되겠다는 전법의 원력이다. 그와 같은 원력이 있는 한 「불광」은 1,000호를 향해 달려갈 것이며, 미래에도 ‘전법의 깃발’로 가장 높은 곳에서 펄럭이게 될 것이다.
서재영
동국대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선의 생태철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불교TV 제작PD를 거쳐 동국대 연구교수, 조계종 불학연구소 선임연구원, 불교신문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불교평론」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며 인터넷 사이트 ‘서재영의 불교기초교리(www.buruna.org)’를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