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를 느껴야 한다
저녁예불을 마치고는 함께 예불한 대중들과 너른 마당에서 큰 원을 그리며, 한 걸음 한 걸음 고요하고 평화롭고 가볍게 걷는 수행을 한다. 마당을 세 바퀴쯤 돌다 보면 발걸음도, 호흡도, 마음도 서로 소통함을 느낀다. 온 도량에 붉은 노을이 감싸 안을 때는 신비롭기까지 하다. 잠시지만 같이 만들고 나누는 공동체의 자비심이 느껴지기도 한다.
산사의 너른 마당은 산의 빈 공간이기도 하다. 모든 것들이 올바름으로 향하는 밝은 기운을 내뿜는다. 숲의 나무들도, 새들도, 바람도, 햇살도 비어 있는 공간으로 그 밝음을 보낸다. 그 마당을 걷노라면 마치 산이 주는 맑고 밝은 자비심으로 온몸을 씻어 내는 듯하다. 이렇듯 자비의 기운은 온 세상에 가득하고 그 복을 누리는 것은 비어 있기에 가능하다. 부처님의 경전인 『증지부』에서는 자비의 공덕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수행자들이여, 마음을 해탈로 이끄는 보편적 사랑(慈悲解脫 mettā-cetovimutti)을 열심히 닦고, 발전시키고, 꾸준하게 다시 챙기고, 그것을 탈 것으로 삼으며, 삶의 기반으로 삼으며, 완전히 정착시키고, 잘 다지고, 완성시키면 다음과 같이 열한 가지의 복을 기대할 수 있다. 편안히 잠자고, 즐겁게 깨어나며, 악몽을 꾸지 않는다. 사람들의 아낌을 받고, 사람 아닌 존재로부터도 아낌을 받는다. 천신들이 보호해주며, 불이나 독극물, 무기의 해를 입지 않는다. 그의 마음은 쉽게 정定을 이룰 수 있으며, 얼굴 모습은 평온하고, 임종 때도 흐트러지지 않는다. 그리고 설혹 더 높은 경지를 못 얻더라도 최소 범천의 세계에는 이를 것이다.”
보편적 사랑은 평등한 자비심이다. 그 옛날 석가모니 부처님은 계급적 차별이 고착화된 시대에 길에서 길로 걸식하고 다니며 가장 평등하고 이상적인 승가공동체라는 모델을 만드는 데 전심전력을 기울였는데 그것이 다름 아닌 자비의 마음이다.
선禪 역사의 시작은 무문 혜개 스님의 『무문관』 제6칙에 있는 ‘세존이 꽃을 들어 보이자 가섭 존자가 미소 짓는 이심전심의 미묘한 법’에서였다.
“세존인 석가모니불이 영산회상에서 법을 설하셨다. 그때 세존이 한 송이 꽃을 들어서 대중에게 보였다. 이때 대중은 말없이 잠잠한데, 다만 가섭 존자만이 빙그레 미소 짓는다. 이에 세존이 말씀하시기를 나에게 정법의 안목이 갖추어졌고, 열반에 이른 미묘한 마음이 갖추어졌으며, 상相이 없는 실상인 불가사의한 법문이 있느니라. 이는 문자를 세우지 아니하고 말 밖에 따로 전하는 법이니 이를 마하가섭에게 부촉한다.” 하였다.
깨달음을 얻은 부처님의 모든 모습과 행동은 부처의 행위이다. 쉽게 이야기하면 말하고, 걷고, 앉고, 눕고, 밥을 먹는 그 모든 순간마다 깨달음의 행위와 깨달음의 마음 아님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중들 앞에 또다시 꽃을 일부러 들어 보이신 것은 큰 자비심이다. 또한, 그 행위가 2,500년이 지난 지금의 시대에도 어리석음을 깨우는 큰 화두가 되었을 때는 그 자비가 살아 있음을 느끼게 된다. 수행자는 그 자비심을 만날 줄 알아야 한다.
근래의 큰 선지식이셨던 서옹 스님은 “참선은 불교의 근본으로 사람들의 많은 문제를 해결해 주는 수승한 공부법입니다. 생사生死가 없어지고 자비심으로 인간 행복의 길을 찾는 데 참선만한 것이 없습니다.”라고 말씀하셨다. 곧 참선의 목적은 자비심과 자비심의 실천에 있다.
모든 존재는 자비와 화합의 바탕으로 함께 공존해야 한다. 한량없는 자비심이 바탕이 되어 서로 신의를 지키며 존중하고, 서로 도와 평화로운 세계를 이룩해야 한다. 사람들이 서로를 속이거나 다치게 하고 착취하는 범죄와 전쟁, 인간과 자연 간의 마찰과 부조화로 파괴되는 환경과 생태계 오염까지 그 동체대비의 대상이다. 옛 어른들의 법문을 다시금 듣는 것 또한 지금 누릴 수 있는 큰 행복이다.
몇 해 전에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고려 불화를 한데 모아 특별기획전시를 한 적이 있었다. 너무나도 귀한 전시라서 땅끝 마을에서 세 번이나 올라다니며 관람을 했다.
두 번째 관람 때의 일이다. 한 초등학생이 나란히 붙여진 그림의 표제를 보며 “수월관음도와 천수천안관음도는 뭐지?”라고 내가 설명해주기를 바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천수천안관음도’는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으로 중생들의 염원을 살피고 돕는 대자대비한 관세음보살의 모습을 실제로 나타내기 위해, 천 개의 손을 그리고 그 손마다 눈을 그려 넣은 그림이다.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그에 비해 ‘수월관음도’는 선적禪的이다. 천강유수천강월天江流水天江月에서 온 말이다. 밤하늘의 달은 하나인데 천 개의 강에 천 개의 달이 떴다는 것이다. 우리는 무수하게 많은 것들로부터 보호받고 도움의 손길 속에 살아간다. 아침에 만나는 햇살, 부드러운 바람과 달고 맛있는 물, 단단한 땅과 포근한 집, 부드러운 옷과 다정한 사람들. 이 모든 것들이 어찌 천 개의 손길뿐이겠는가?
어느 날 얼굴에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낯빛이 고운, 나이 육십쯤 되는 보살님 한 분이 템플스테이를 왔다. 대화를 나누다가 몇 해 전에 떠나신 어머니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들려주었다. 살아생전에 어머니는 사람들이 모인 장소에 가면 습관적으로 그 사람들의 행복을 축원하곤 했다. 딸의 입장에서 그런 모습이 솔직히 달갑지 않았다. 돌아가시고 얼마 후 자신도 모르게 어머니가 생각나면서 어머니가 하던 타인의 축원을 자신이 하고 있더란다. 버스를 타면 버스 안의 사람들이 행복해지기를 축원하고, 영화관에 가면 지금 이 사람들이 행복하기를 축원하곤 한다는 것이다. ‘아하! 이런 사람들 덕분에 세상이 그래도 행복하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맑은 청정수를 올리고 새벽 예불을 하며, 나도 또한 이 몸으로 부처님과 역대 조사님들처럼 청정한 신심을 내어 세상 사람들의 근심 걱정을 덜어주는 감로의 차가 되기를 발원한다. 오늘 한 줄의 부처님 말씀을 만난 것은 수천 년 동안 이어준 역대 조사님들과 현생에 함께하는 지구공동체라는 승가 덕분이다.
부처님, 진리의 법, 승가시여
지극한 마음으로 감사드립니다.
금강 스님
미황사 주지. 조계종 교육아사리. 서옹 스님을 모시고 ‘참사람 결사운동’, 무차선회를 진행하였다. 홍천 무문관 프로그램을 개발하였고, 참선집중수행 ‘참사람의 향기’를 진행하며 일반인들과 학인스님들의 참선수행을 지도하고 있다. 저서로 『땅끝마을 아름다운 절』이 있다.
저작권자 © 불광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