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렇게 못생긴 부처님도 계십니까?” “당신의 마음은 잘 생기셨나요?”
“저렇게 못생긴 부처님도 계십니까?”
“당신의 마음은 잘 생기셨나요?”
청양 칠갑산 장곡사
무른 것 몇 알 남은 포도송이처럼, 백일홍의 홍꽃이 몇 잎 안 남았다는 것은, 이제 백일이 다 돼 간다는 뜻이다. 절 마당에 낙화의 흔적만 있고, 나무에 붉은색은 거의 없다. 몇 번이나 피고 지고, 피고 지고를 반복하다가 나무는 이제 더 피우지 않는다. 꽃이 진 나뭇가지는 노인의 등뼈처럼 메마르게 보인다. 나무는 이제 껍질을 벗을 것이다. 구각舊殼의 탈피, 그것을 청렴과 무욕의 상징으로 보아 절에 이 나무를 많이 심는다. 원래 배롱나무인데 ‘배롱’의 발음이 ‘배기롱’이 되었다가 ‘백일홍’으로 불렸고, 멕시코산 작은 꽃 ‘백일홍’과 구별하여 ‘목백일홍’이라 부른다고 한다.
백일홍이 처음 피었을 때는 늦봄이었다. 사람들은 그 무렵 모를 심었다. 백일이 흐르는 동안 모가 자라서 벼가 되었다. 마지막 꽃이 질 때, 벼는 베여 알곡이 된다. 백일홍의 백일은 벼의 생육과 같고, 벼의 생멸과 같다. 저 지독했던 여름을 벼와 꽃이 견디는 동안 스님들은 안거를 마치고 떠났다. 안거는 시간이 그냥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공부라는 것이 어렵고, 손에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는다. 벼가 하루 볕에 익는 것이 아니고, 꽃이 하루아침에 피지 않는 것처럼, 몇 날 며칠을 두고두고 쌓아야 쌀이 되고, 꽃이 되고, 고생고생해서 진일보하는 것 아니겠는가. 나는 안거야말로 삶의 가장 치열한 순간이고, 직장으로 치면 상여금을 지급해야 하는 시간이 아닌가 생각한다. 해제하고 떠날 때, 바랑에 무엇이 담겼을까 하는 것은 각자의 몫일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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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가고 스님들이 떠난 장곡사는 곱게 가을 색이 들고 있다. 나는 장곡사에 들를 때마다 상 대웅전에서 한참을 보낸다. 거기에는 부처님이 세 분 있는데, 그것을 들여다보는 것이 즐겁다. 아마 우리나라에서 제일 못생긴 부처라 해도 딱히 할 말이 없을 한 분하고, 그렇게 못생기지는 않았어도 잘 생겼다고 할 수도 없는 평범한 얼굴의 한 분하고, 그렇게 말하면 서운해 할 단정한 용모의 한 분하고, 셋이 나란히 앉아 있다.
오른쪽, 눈코입이 가지런하고 단아한 얼굴에 약단지를 들고 있는 부처가 철조약사여래좌상이다. 좌대까지 묶어 국보 58호다. 가운데, 얼굴은 삼각형에 눈은 작고 가늘지만, 그럭저럭 봐 줄만 한 부처가 지권인을 취하고 있는 철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174호)이다. 왼쪽, 눈이 짝눈인데다 한쪽이 처져 얼굴이 틀어진 것처럼 보이고, 이마는 좁고, 코는 빈약하고, 입은 작고, 피부도 울퉁불퉁한 부처가 여원인與願印을 취하고 있는 소조아미타여래불이다. 제일 잘 생긴 것이 국보고, 그다음이 보물이고, 제일 못난 것은 뭐라고 붙어 있는 것이 없다. 셋 다 고려 시대이고, 금박이 되어 있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국보와 보물은 철불이고 나머지 하나는 소조불이다. 소조불塑造佛은 나무나 쇳조각으로 뼈대를 만든 뒤에 진흙을 덧붙여 형태를 만들고, 속을 흙이나 자갈로 채워 봉한 다음 말리거나 굽거나 해서 완성한 것이다. 말하자면 소조불은 출신 성분이 다르다.
“왜 저 부처님은 저렇게 못생겼답니까?” 하고 장곡사 성덕 스님에게 물었더니, “자주 와서 보세요. 자주 보면 정 들어요.”라고 말한다. “제 눈에는 잘 생긴 순서대로, 하나는 귀족이고, 하나는 평민이고, 하나는 노비처럼 보입니다.” 그랬더니, “다 같은 것이지, 뭘 또 구분하고 그러냐.”면서 “그러고 보니 그 앞에서 절을 올린 사람들이 좀 못생긴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네요.” 하면서 웃는다.
많은 사람들의 눈길은 철불에 머문다. 그러고는 스쳐 지나갈 뿐, 소조불은 누가 눈여겨보지 않는다. 장날, 이발소 앞에서 참외를 깎아 먹고,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마시고, 약장수 기타 소리에 발장단을 치다가, 어느새 긴 여름 해도 저물어, 고무신 한 켤레, 조기 한 마리 들고, 달이 환한 길을 쩔뚝이며 돌아오는 ‘파장’, 신경림이 말한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던, 그런 한통속의 서러운 눈으로 봐야 저 소조불은 비로소 부처로 보일 것이다. 그러니까 저 부처를 빚은 사람은 아마도 저렇게 생긴 사람이고, 자기처럼 하층의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리라고 저렇게 빚은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한다. 한 손은 들고 한 손은 내린 여원인은 모든 두려움을 사라지게 하고 어떤 원이든 다 들어준다는 뜻이니, “이 생이 서러운 사람들이여 내게로 오라.”고 말하는 그 얼굴에 그 수인手印이다.
장곡사는 칠갑산 남쪽 아늑한 곳에 앉아 있다. 신라 문성왕 12년(850) 보조 선사 체징이 세웠다고 전해진다. 체징은 조계종 종조 도의 선사의 법을 받아 장흥 보림사에 구산선문 가지산파를 부흥한 조사여서, 장곡사에도 나말여초의 비로자나불, 유문전석 같은 옛 선종 고찰의 흔적이 많다. 대웅전이 2개라는 점이 특이하다. 50m 거리를 두고 상 대웅전 하 대웅전 하는데, 둘 다 맞배지붕 속에 약사불이 앉아 있고, 각각 보물이다. 왜 대웅전이 2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작은 절 2개가 합쳐졌다는 설을 비롯하여, 여러 추측이 있을 뿐이다.
이번 장곡사행은 사진작가와 함께 드론 전문가 한 분이 동행했다. 우리는 하 대웅전 마당에서 드론을 띄웠고, 밀짚모자 크기의 기체는 “붕붕” 하더니 새처럼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손에 든 모니터에서는 놀라운 풍경들이 펼쳐졌다. 절의 지붕들이 점점 작아지더니 방사선으로 뻗은 수많은 능선과 계곡들, 절로 이어진 장곡천과 지류들, 노을이 지기 시작한 하늘, 멀리 차령산맥과 칠갑산 정상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새가 되어 날아다니는 착각을 들게 할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손가락을 까닥이는 그 순간순간마다 고공의 풍경이 사진이 되어 태블릿PC에 저장되는 이 놀라운 세상을 저기 고려 시대의 부처님은 알고 계실까?
목탁소리가 들린다. 저녁 공양 시간이다. 장곡사는 주지 서호 스님과 성덕 스님, 처사님, 보살님 해서 다섯이 산다. 된장국과 나물 몇 가지에 공양을 마치고, 내가 스님에게 물었다.
“장곡사는 상하 대웅전에 전부 약사불이 계신데 몸이 아픈 신도분들이 많이 오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스님, 그런데 부처님이 들고 있는 약단지 안에는 무엇이 들어 있답니까?”
“약단지하고 약뚜껑하고 붙어 있어서 나도 못 열어 봤습니다.” 스님이 덧붙이기를, “아픈 것은 몸만 아픈 것이 아니지요. 마음도 아파요. 그것을 아픔과 슬픔이라고 합니다. 약사여래는 세상살이에 고통이 되는 것을 12가지로 나눠 원願을 세웠습니다. 질병과 먹고 입고 자는 것, 살면서 짓는 업業과 돌아오는 액厄, 아픔과 슬픔으로부터 벗어나기를 기원하는….”
“그러니까 12가지의 약이 들어 있는 셈이네요.”
“약단지 안에 무엇이 들어 있겠습니까? 약사불이 그것을 치료해 주겠습니까? 다 마음이지요.”
약단지 안에 무엇이 들어 있을 리 없다. 하지만 무엇이 들어 있을 것 같고, 그것이 무엇인지 나는 못내 궁금하다. 안거를 마치고 떠난 스님의 바랑 속에 들어 있던 것, 소조불의 열망 같은 것, 그런 것은 아닐까? 부질없는 생각에 가을바람 불고, 장곡사는 밤이 깊어 가고 있다.
이광이
전남 해남에서 1963년에 태어났다. 조선대, 서강대학원에서 공부했고, 신문기자와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산과 절이 좋아 늘 돌아다녔다. 한때 조계종 총무원에서 일하면서 불교를 더욱 가까이 하게 됐다. 음악에 관한 동화책을 하나 썼다.
사진 : 최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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