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하고 천한 예인을 극락행 반야용선에 태운 까닭
가난하고 천한 예인을
극락행 반야용선에 태운 까닭
눈송이를 떨구는 하늘과 드문드문 패인 아스팔트길 사이로 보이는 것은 포도나무 밭들과 공장건물이었다. 260여 년 전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안성은 경기도와 호남 바닷가 사이에 위치하여 화물이 모여 쌓이고, 공장工匠과 장사꾼이 모여들어 한양 남쪽의 도회지가 되었다.”라고 한 평이 무색한 풍경이었다. 조선시대 안성은 호남로와 영남로가 만나는 접점이자 삼남三南의 각종 물산이 모여드는 곳으로 특히 유기그릇과 꽃신이 유명해 ‘안성맞춤’이란 말이 여기서 나왔다. 박지원의 한문소설 『허생전』에서 남산골 딸깍발이 허생이 만 냥을 변통해 곧장 내려온 곳이 바로 안성이고, 제수용 과일들을 매점매석해서 열 배의 이윤을 남기는 것만 보아도 상공업도시로서 당시 안성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안성이 세월의 흐름 속에서 주춤거린 것은 경부고속도로가 비켜났기 때문만은 아니다. 옛 안성의 영화榮華는 산업사회로 쉽게 이행될 수 없는 전통기술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장인들이 그랬고, 안성평야가 그랬고, 남사당이 그랬다. 남사당패는 농경사회의 마을과 장터를 떠돌며 춤과 노래, 기예를 펼쳤던 유랑연희집단이다. 안성지역 남사당, 특히 청룡사에 기대어 살던 남사당패는 구한말 전국적 명성을 떨쳤는데,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며 동원한 백성들을 위로하기 위해 그들을 불러 공연시키고 옥관자(관자는 망건을 졸라매는 끈인 당줄을 거는 동그란 고리)를 하사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당시 청룡사 남사당패를 이끌던 꼭두쇠는 김암덕金岩德, 바우덕이라고 불리는 스물이 채 되지 않은 여성이었다. 바우덕이의 가무와 줄타기는 보는 이들의 혼을 송두리째 앗아갔던 모양이다.
안성청룡 바우덕이 소고만 들어도 돈 나온다 /
안성청룡 바우덕이 치마만 들어도 돈 나온다 /
안성청룡 바우덕이 줄 위에 오르니 돈 나온다 /
안성청룡 바우덕이 바람을 날리며 떠나가네
가사에 반복되는 “안성청룡 바우덕이”라는 말뭉치처럼 남사당패와 청룡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청룡사는 고려 원종 6년(1265)에 명본 대사明本 大師가 작은 암자로 창건했다가 공민왕 13년(1364)에 나옹 화상이 크게 중창하면서 청룡사라 칭했다. 공양왕의 진영을 모셨다는 『조선왕조실록』 기사나, 인조의 아들 인평대군이 원찰로 삼았다는 「청룡사중수사적비」의 기록은 청룡사가 왕실과 깊은 관계를 맺은 대찰이었음 말해주지만, 현재 청룡사는 지금의 안성이 그러하듯 다소 쓸쓸하고 소박한 절집이다. ‘서운산 청룡사’란 편액을 단, 일주문이자 천왕문의 역할을 맡고 있는 문간채 하나만 지나면 늙수그레한 대웅전(보물 제824호)이 모습을 곧장 드러낸다. 빛바랜 기와와 단청에서 배어나는 아취가 예사롭지 않으나, 대웅전의 진면목은 측면에서 바라볼 때 드러난다. 뒷산 나무들을 무심하게 그러모아 세운 듯한 기둥들이 뿜어내는 파격과 박진감은 선사들이 제자를 제접提接할 때 쓰는 고함소리(喝)나 몽둥이질(棒)과 닮아 있다. 불가에선 멋대로 행동해 근본을 잃어버린 것을 막행莫行이라 하고, 규율을 넘나들어도 어그러짐 없는 자재함을 도행道行이라 한다. 청룡사 대웅전은 틀에 얽매이지 않으면서도 종교적 건축이 지녀야 할 멋을 잃지 않았으니 도력이 상당히 높은 건축물이다.
우리가 만나야 할 청룡사 반야용선 벽화는 대웅전 내부 좌측 내목도리 윗벽에 그려져 있다. 가로 220cm, 세로 90cm의 큰 그림이지만 천장 가까이 위치해 있어 고개를 젖히고 올려다보지 않으면 놓치기 일쑤다. 반야용선도는 용 모양의 배, 혹은 배를 등에 인 용을 타고 극락으로 향하는 왕생자들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다. 청룡사 반야용선도는 배 중앙에 돛처럼 아미타불, 대세지, 백의관음을 세워 중심을 잡고 좌우로 극락왕생자들과 음악을 연주하는 천녀, 천동 무리를 균형감 있게 배치해 안정감을 준다. 뱃전에 부딪친 포말을 구름문양으로 표현하는 섬세함과 구불거리는 용의 몸통에서 느껴지는 긴장감과 탄력성은 벽화를 그린 화사의 수준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청룡사 반야용선도는 조선후기에 그려진 반야용선도의 도상적 특징을 묘하게 벗어난 데가 있다. 우리는 조선 후기에 불렸던 불교가사를 통해 당시 그려진 반야용선도의 구도를 엿볼 수 있다.
반야용선 내어보내 염불중생 접인할제 /
팔보살이 호위하고 인로보살 노를저며 /
제천음악 가진풍류 천동천녀 춤을추며 /
오색광명 어린곳에 생사대해 건너가서….
‘왕생가’
반야용선 한가온데 아미타불 관음세지 /
압임물른 인노왕보살 접인중생 하옵시고 /
뒨임물른 지장보살 교화중생 하옵시고….
‘용선가’
우리나라에서 고려 말부터 그려진 반야용선도는 조선 후기에 이르면 ‘용선가’의 가사처럼 선수船首, 중앙, 선미船尾 세 부분으로 도상적 정형화가 이루어진다. 뱃머리에는 삿대를 든 인로왕보살, 가운데는 극락삼존인 아미타불, 관음보살, 대세지보살, 선미는 중생을 호위하는 지장보살이 배치되고, 배의 빈 공간은 승려, 남녀불자 등 왕생자와 천동, 천녀의 풍악대로 채워진다. 흥미롭게도 청룡사 반야용선도에는 인로왕보살이나 지장보살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노를 쥔 남녀가 등장한다. 현재 남은 다른 반야용선도에서 이런 예를 찾기 어렵다. 게다가 배 앞부분에 타고 있는 이들의 모습도 여느 반야용선의 승선자들과는 확연히 다르다.
뱃머리에서 힘차게 노를 젓는 여인 뒤로 주황색 모자와 굵은 염주를 목에 건 한 무리의 사람들이 뭉쳐 앉아 있다. 여인 셋과 사내 하나는 단정히 합장한 채 아미타 부처님을 향하고 있는데, 나머지 사내 둘은 뱃머리 쪽으로 몸을 틀어 앉았다. 돌아앉은 사내들 중 하나는 벅구(소고)를 머리 위로 들고 두드리려는 모습이고, 다른 사내는 방금 접은 부채를 얼굴 가까이 대고 무어라 말할 것 같은 모양을 취하고 있다.
대체 이들은 누구일까? 청룡사 벽화의 왕생자에 대한 정밀한 연구는 아직 없지만, 청룡사 역사에 대한 지식과 약간의 눈썰미만 있다면 이들의 정체를 밝히지 못할 것도 없다. 200여 년 앞서 그려진 청룡사 감로탱(보물 제1302호. 무주고혼을 위로하는 수륙재나 조상천도를 위한 우란분재 등에 쓰이던 의식용 불화)에 해답의 실마리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현재 수장고에 보관 중인 청룡사 감로탱은 1900년대 초반까지 법당에 걸려 있었다. 반야용선 벽화를 그리러 온 화사가 이를 눈여겨보고 자신의 그림에 참조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본디 전통이란 선대의 레퍼런스에 대한 눈치보기와 변용을 통해 재창조되며 이어지는 것이다.
청룡사 감로탱 하단에는 두 부류의 연희집단이 묘사되어 있다. 감로탱 오른편 하단에는 가사를 걸친 세 명의 승려 뒤로 일곱 명의 굿중패(사찰과 관련된 신표信標를 지니고 염불과 가무 등의 연희를 통해 불사금을 모았던 집단)가 보이는데, 맨 앞의 사내는 감투를 쓰고 염주를 두 손으로 높이 받쳐 들었고, 다음 사내는 오른손으로 부채를 쥐고 덩실덩실 춤을 추는데, 바로 뒤에서 다른 사내가 벅구를 쥐고 둥둥 장단을 넣고 있다. 사내들의 뒤로 주황색 모자를 쓴 네 명의 여인이 합장한 채 기러기처럼 줄지어 따라간다. 반야용선의 배 앞부분에 탄 독특한 왕생자들은 바로 감로탱의 연희집단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다.
감로탱 왼편 하단에는 사당패(사당패도 절과 깊은 관련을 맺은 연희집단으로 남자인 거사와 여자인 사당으로 구성되며 불사금을 모았다. 후대로 갈수록 예인집단의 합종연횡으로 인해 사당패와 굿중패, 남사당을 명확히 분리하기 어렵다.)들이 앉아서 장구가락에 춤을 추고 땅재주까지 부리며 한바탕 신나게 놀고 있다. 사당이라 불리는 여자 재인才人들의 머리장식이나 복색은 벽화 속 뱃머리에서 삿대를 잡은 여인과 닮아 있다. 우리는 여기서 인로왕보살과 지장보살을 밀어내고 삿대를 잡은 남녀가 사당 패거리란 사실을 알 수 있다. 벽화가 1900년대 초반에 그려졌음을 감안한다면 뱃머리에 세운 여장부가 청룡사 남사당을 이끌던 전설의 바우덕이라고 해석한들 무슨 흉이 되겠는가.
그런데 화사는 왜 부유한 시주자들이 아닌 가난하고 천한 예인들을 극락행 반야용선에 태웠던 걸까? 민초들의 연대의식이나 예술가들의 동질감 같은 가슴 뭉클한 스토리를 상상하기에 앞서 알아두어야 할 것은 남사당패들이 청룡사 불사의 최대공로자였다는 사실이다. 1674년에 조성된 청룡사 감로탱의 시주질에는 ‘박동질이’라는 재인의 이름이 올라 있고, 같은 해 제작된 청룡사 동종(보물 제 11-4호)의 시주자들 가운데도 ‘정어질산’이란 재인이 등장한다. 1720년에 세워진 ‘청룡사중수사적비’에는 ‘사당’과 ‘거사’를 이름 앞에 붙인 사당패 시주자들이 보인다. 기록을 통해 청룡사에 큰 중수불사가 있을 때마다 유랑예인들이 매번 전국을 떠돌며 시주금을 마련해주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청룡사는 이들에게 살 곳을 제공하고, 일이 없을 때는 절집의 불목하니로 고용하며 서로를 품어왔다. 이런 사실에 비추어 보면 청룡사 반야용선에 연희패 대신 양반이나 돈 많은 상인을 그려 넣는 것이야말로 제 삶과 역사에 대한 부정이자 모멸이 아니면 또 무엇일까?
일상에 터 잡지 않은 이론이 허약한 책상물림이듯, 현실과 역사를 도외시한 종교적 구원은 사람을 미혹하는 허공꽃(空花)에 불과하다. 안성 땅과 청룡사에 스며 있는 민중들의 삶, 가장 바닥에서, 가장 치열하게 스스로의 운명에 침을 뱉으며 춤추고 노래해온 이들이 만들어온 도저한 역사의 힘은 대보살들이 있어야 할 신성한 자리에 가장 천한 재인을 허락했다. 역사에 비약은 없다. 비약이 있다면 그건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역사일 뿐이다.
강호진
한양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에서 불교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중학생 때 어머니를 따라 해인사 백련암에 올라가 삼천 배를 하고 성철 스님에게 일각 一角이란 불명을 받았다. ‘오직 일체중생을 위해서 살라’는 성철 스님의 가르침에 깊은 감명을 받았지만 지금껏 별달리 일체중생을 위해 살아본 적이 없다. 좋은 스승을 만나고도 그 가르침대로 살지 못한 마음의 빚을 조금이나마 갚는다는 심정으로 『10대와 통하는 불교』,『10대와 통하는 사찰벽화이야기』를 썼다.
사진 : 최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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