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여지도에는 어떤 사찰이 기록되었나?
대동여지도와 사찰 지명 세미나
19세기 한반도의 국토 지리 정보를 담은 ‘대동여지도’에 242개의 사찰이 표기됐다는 연구결과가 발표됐다. 지난 2월 6일 불교사회정책연구소(소장 법응 스님)가 주관한 ‘대동여지도와 사찰 지명’ 세미나에서 류명환 전임연구원(한국학중앙연구원)과 김기혁 교수(부산대학교 지리교육과)는 공동 연구해 발표한 ‘대동여지도의 사찰 지명 연구’를 통해 “대동여지도에 기록된 242개의 사찰 중 출처가 불분명한 곤양 고점사와 장흥 선암사, 2개가 중복 기록된 북청 백암사, 배방사와 중목 기재된 배왕사 등 4개의 사찰을 제외한다면 대략 238개 내외의 사찰이 실려 있는 것으로 사료된다.”고 밝혔다.
| 대동여지도와 사찰 지명
지도에 사찰 지명이 기재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 후기 때부터다. 그 중 영조 대代 대표적인 지도인 규장각 소장본 『해동지도』(보물 제1591호)에서 사찰 지명이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전체 사찰 지명이 기재되지는 않았다. 전국 지도를 제작하면서 지도에 모든 사찰을 기록할 수 없어 김정호가 제작한 1861년에 제작한 대동여지도에서도 사찰들에 대한 선택적 수용이 이루어졌다.
이번 연구에 따르면 “대동여지도에는 11,000 ~ 13,000여 개의 지명이 수록된 것으로 연구되고 있다. 수록된 지명은 유형별로 분류해 볼 때, 자연지명은 산지(山, 峰, 岩), 고개(嶺, 峴, 峙), 하천(川, 江, 灘) 지명 순으로 비중이 높다. 인문지명으로는 행정(邑治, 洞, 里), 진보(鎭, 保, 城), 창고, 역참, 봉수 지명 순으로 분포하고 있는데, 사찰 지명은 봉수, 포구(津, 浦) 지명 다음으로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자연, 행정, 군사 지명을 제외하고는 사찰이 대표 지명으로 실려 있다.”고 한다.
그들의 연구에 의하면 대동여지도에는 242개의 사찰이 표기되어 있다. 이것은 대동여지도에서 사寺 자와 암庵 자로 표기된 지명과 함께 『여지도서輿地圖書』와 『가람고伽藍考』(영조 대), 『범우고梵宇攷』(1799) 등에서 사찰로 기록되어 있는 양양의 관음굴觀音窟, 곡산의 고달굴高達窟, 희천의 금선대金仙臺 등 3곳을 포함한 수치이다. 지역별로는 함경도 57개, 경상도 35개, 전라도 32개, 강원도 31개 순으로 실려 있다. 『가람고』에 수록된 함경도 128개, 경상도 315개, 전라도 205개, 강원도 140개와 비교해볼 때, 함경도와 강원도 지역에 월등히 많은 사찰 지명이 대동여지도에 수록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대동여지도에는 335개 군현 중 115개 군현에만 사찰 지명이 기록되고 있다.
| 불국사와 수덕사가 빠진 이유
이번 연구에서는 대동여지도에 송광사, 해인사, 통도사, 쌍계사, 마곡사, 봉은사 등의 사찰들은 기록되어 있지만 경주 불국사, 예산 수덕사, 김천 직지사 등의 사찰이 대동여지도에서 빠진 게 밝혀졌다. 김정호가 더욱 정확한 지도를 만들기 위해 당시까지 축적된 조선의 여러 자료를 참고하며 끊임없이 수정한 점을 고려할 때 불국사 같은 주요 사찰이 빠져 있음은 의아한 점이다. 류명환 교수는 “사찰들이 누락된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지도 발달사 과정에서 영조 대 빠진 게 이어지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또한, 다른 지역들에 비해 함경도 일대의 사찰이 많이 기록된 것에 대하여 류명환 교수는 “당시의 함경도 지역 승려들이 승군으로 외세에 맞서며 호국불교 역할을 했다. 이 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해 개발이 늦었으며, 지도의 빈 공백을 채우기 위하여 상대적으로 많은 사찰 지명이 들어갔다.”고 전했다. 또한 대동여지도에 사찰 지명이 242개가 기재된 것과는 상반적으로 서원의 표기는 단 한 곳도 없었다. 이에 대하여 류 교수는 “전국의 서원들이 당시 세금과 군역을 회피하였기 때문”이라고 언급했다. 류 교수는 이번 연구를 통해 “대동여지도에 실린 사찰 지명은 기존에 편찬된 지리지와 지도 등에 수록된 사찰 지명에서 선택이 이루어졌음을 확인했다. 하지만 지도 제작에서 사찰 지명이 왜 중요한 항목으로 편성되었는지, 또 어떠한 기준으로 사찰 지명이 선정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차후 과제로 남았다.”고 밝혔다.
| 숭유억불 때 수많은 사찰이 표기된 까닭
발제가 끝나고 토론이 이어졌다.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만든 것에 상업적 목적이 있는가?”는 청중의 물음에 장상훈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은 “그 당시 상업 목적의 가장 중요한 점은 시장”이라며, “대동여지도에는 장시가 들어서는 날 등의 시장과 관련된 표기가 없어 상업의 목적은 없어 보인다.”며 말했다. “숭유억불의 조선에서 실제로 그렇게 많은 사찰이 있었으며, 지도에 표기된 것인가?”라는 청중의 질문에 김기혁 교수는 “지금의 종교라는 측면에서 사찰의 의미와 당시 사찰이 가지고 있던 기능이 달랐을 것”이라 말했다. 또 “당시 사찰의 기능 중 하나는 지식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며, 어린 백성들이 배움을 얻을 수 있는 곳이다.”라고 전했다. 토론의 좌장을 맡은 흥선 스님(문화재청 문화재위원)은 김기혁 교수의 말에 의견을 더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이라는 국가가 불교를 바라보는 관점이 크게 변했다.”고 언급하며, “임란 이후 시신을 수습하고 천도재를 지내거나, 집단의식을 거행하기 위하여 사찰의 모양과 구조 등이 변화하였다. 전쟁의 피해를 감내하는 승가의 모습에서 사대부들과 백성들의 인식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한 청중은 “함경도 지방에 사찰 지명이 많은 이유는 풍부한 산림과 종이의 공급 관계 때문”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류명환 교수는 “그럴 가능성도 있다. 그렇지만 그 당시에 목재는 충청도와 전라도, 경기도 등지에서 많이 올라왔으며, 저의 관점에서는 함경도의 승병이 더 고려되었다.”라고 반론했다.
이번 ‘대동여지도와 사찰 지명’ 세미나는 불교계에서 대동여지도를 살펴본 첫 학술연구였다. 대동여지도는 불교계에 있어 폐사지와 사찰 지명 및 전통사찰 등의 연구에 활용될 수 있는 독보적인 연구 자료다. 또한, 당시의 역사와 문화를 짐작할 수 있는 정보의 보고이다. 발제자들은 “고지도와 사찰의 관계는 사료로 남은 기록이 많지 않기에 모든 방면에 가능성을 열어두며 앞으로도 꾸준한 연구가 필요할 것”이라 의견을 모았다. 세미나를 주최한 불교사회정책연구소 법응 스님은 “흥미로운 주제인 만큼 역사학계와 지리학계, 또 불교학계의 많은 관심을 가질 것으로 보이며 이번 세미나 이후 깊은 연구가 진행되리라 생각한다.”고 정리하며 폐회사를 마쳤다.
이번 세미나에서는 오상학 교수(제주대학교)의 ‘조선지도학의 금자탑, 대동여지도의 가치와 의의’가 함께 발제됐고, 토론자로는 장상훈 학예연구관(국립중앙박물관)와 최연 교장(인문지리기행 ‘서울학교’)이 토론자로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