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벽화이야기]선암사 원통전 가루라·긴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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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벽화이야기]선암사 원통전 가루라·긴나라
  • 강호진
  • 승인 2018.08.31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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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하는 것엔 날개가 있다
사진 : 최배문

잉게보르크 바흐만(1926~1973)의 시 「놀이는 끝났다(Das Spiel ist aus.)」에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구절이 등장한다. “대추야자 씨에서 싹이 움트는 아름다운 시절! 추락하는 것들은 저마다 날개를 지녔네요.”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란 말이 한국에서 회자한 것은 바흐만의 시구에서 빌려온 이문열의 동명同名의 소설이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영화로 만들어진 덕분이다. 바흐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또 다른 국내문학을 뽑으라면 90년대 중반을 달구었던 최영미의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를 들 수 있겠다. 시대와 실존적 고통을 바탕으로 한다는 점에서 바흐만과의 연관성이 이문열의 소설보다 깊은데, 시집 제목에 바흐만의 소설 「삼십 세」와 「놀이는 끝났다」를 교묘히 배치해 놓은 것만 보아도 그렇다.

바흐만의 시구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은 아니다. 바흐만은 그리스 신화 중 ‘이카로스의 추락’에서 모티프를 얻었다. 밀랍 날개를 달고 태양 가까이 날아오르다 지중해에 떨어져 죽은 이카로스 말이다. 그렇다면 그리스 신화는 서구문화의 독자적 원형일까? 고대 그리스 문화가 이집트를 위시한 오리엔트 문명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상식이 되어버렸다. 문화와 텍스트는 무시무종無始無終으로 서로가 서로를 인용하고 모방하며 직물처럼 짜여나간다. 20세기 서구에서 ‘저자의 죽음’이나 ‘상호텍스트성’ 같은 말로 한동안 호들갑을 떨었던 것이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런 말이 불교에선 그리 새롭지 않은데, 신라 의상이 『화엄일승법계도』의 마지막 부분에 ‘연으로 생겨난 모든 것은 주인이 없다(緣生諸法無有主者故)’라고 쓰면서 저자를 밝히지 않은 것이 대표적인 예다. 

사진 : 최배문
사진 : 최배문

사찰벽화엔 그린 이의 이름이 없다. 불전에 모셔놓은 각종 탱화에는 그림 하단에 연화질緣化秩이라고 해서 화사畫師와 시주자 등의 이름이 빼곡히 들어가 있는 것에 반해 벽화는 그저 그림만 있다. 화사의 이름이 빠지게 된 이유가 ‘연성무주緣成無主’를 드러내려는 심오한 의도는 아닐 것이나, 벽화만큼 문화적 상호텍스트성을 활발하게 드러내는 것도 없다. 불보살과 아라한, 도교의 신선, 삼국지나 서유기 같은 중국 고전, 산수화와 민화가 얽히고설켜 종교를 넘어선 문화적 용광로 역할을 하는 것이다. 벽화의 잡스러운 특성은 마치 화엄華嚴의 철학이 들판에 피어난 온갖 잡화雜華를 끌어들여 스스로를 장엄하는 전략과 다르지 않다. 보통 사람들은 안과 밖, 나와 너, 성과 속을 살뜰히 나누면서 ‘안’과 ‘나’와 ‘성聖’을 챙기느라 여념이 없지만, 근기가 수승한 이는 경계 자체를 허묾으로써 모든 것을 나로 품는다. 일상에서 쓰이는 ‘대승적大乘的 차원’이란 말은 바로 이런 의미일 것이다. 그러니 「신묘장구대다라니」에 묘사된 관세음보살의 모습이 힌두신인 시바나 비슈누와 겹쳐진대도, 대승경전에 등장하는 팔부신중八部神衆이 『리그베다』나 『마하바라타』에 기원한 인도신화 속 존재라 해도 눈을 동그랗게 뜰 필요는 없다. 힌두교도들이 석가모니를 비슈누의 아홉 번째 화신으로 모신다 해도 마찬가지다. 연緣으로 생겨난 것엔 본디 주인이 없는 법이다. 

그런데 연으로 생겨났으되 주인을 가리느라 시끄러운 곳에 우리가 만날 벽화가 있다. 태고종 총본산인 순천 선암사다. 태고종과 조계종은 선암사 소유권에 관한 문제로 60여 년간 분쟁을 이어왔고, 지금도 재판이 진행 중이다. 나는 선암사가 어느 종단으로 귀속 되는가에 별 관심이 없다. 다만 어떤 결론이 나더라도 절집에 살고 있는 승려들이 무작정 내쳐지는 일은 없길 바랄 뿐이다. 그리고 선암사가 최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는 낭보에 덧붙이자면, 국보급 문화재가 많아서 관광객이 넘쳐나고 그 보존과 수리에 막대한 국민세금이 들어가는 조계종의 몇몇 대찰들이 문화재에 대한 취재나 정보공개를 별다른 이유 없이 거부하는 권위주의적 행태를 선암사가 답습하지 않기를 빌 따름이다. 

습한 날씨에다 매표소에서부터 바지런히 걸어 오른 덕분에 선암사 도량에 도착했을 땐 온몸이 땀으로 젖어있었다. 에어컨 바람이라도 잠시 쐬라는 종무원의 배려를 마다하고 나는 곧장 원통전으로 향했다. 원통전 내 오른편 창방에는 성인 손바닥보다 약간 크게 그려진 두 점의 벽화가 있다. 왼쪽은 새 머리에 사람 몸을 지녔고, 오른쪽은 인간의 얼굴에 새의 몸통을 가지고 있다. 행여 사람들이 모를까봐 ‘迦樓羅가루라’, ‘緊那羅긴나라’라는 글까지 옆에 써놓았다. 이들은 대승경전에 등장하는 천룡팔부天龍八部, 혹은 팔부신중八部神衆에 해당하는 이들이다. 팔부신중은 천신天神, 용, 야차, 건달바, 아수라, 가루라, 긴나라, 마후라가로 불법佛法을 찬탄하고 보호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들 대부분은 인도신화에 기원을 두고 있지만, 한국불교의 신행현장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은 결코 작지 않다. 80권 화엄경을 압축한 게송인 「화엄경 약찬게」에서 가루라, 긴나라를 포함한 39류類를 화엄성중으로 일일이 호명하고 있다든지, 『삼국유사』에 기록된 의상을 호위하던 호법신중의 일화, 그리고 전국의 사찰에서 매달 신중기도를 빠트리지 않는 것을 보면 한국불교와 신중신앙은 긴밀하다 못해 끈끈하다. 그런데 선암사 원통전의 그림은 우리가 알고 있는 팔부신중의 모습과 동떨어져 있다. 신중탱 속 팔부신장八部神將은 번쩍이는 무기와 갑옷을 갖춰 입고 근엄한 표정으로 보는 이를 두렵게 하는 반면, 여기 두 신장은 아이의 낙서마냥 허술하고 정겹게 그려져 있다. 19세기 무렵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소박한 그림은 이상하게도 상상력의 시원始原을 끊임없이 자극한다. 

원래 가루라(가루다)는 인도신화에서 비슈누가 타고 다니는 새로 깃털이 태양처럼 밝아 금시조金翅鳥라고도 불린다. 가루라는 용을 잡아먹는 존재인데 인도신화 속 용(뱀)과의 악연을 여기서 상술하진 않을 것이다. 나는 이문열의 중편소설 『금시조』를 통해 가루라를 처음 접했다. 소설 속 금시조는 예술이 개인의 재능과 기교를 뽐내는 도구가 아닌 도道와 전통에 합치할 때 비로소 발현되는 불멸성을 상징한다. 다시 말해 연으로 이루어진 것은 개인이 사라져 역사의 피륙이 될 때 영원한 진리성을 획득한다는 뜻이다.

긴나라는 노래와 연주로 부처의 설법을 찬탄하는 신장이다. 긴나라는 반인반마半人半馬나 반인반조半人半鳥의 모습으로 나타나거나, 신중탱에선 머리에 뿔이 돋은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하는 등 도상적 정립이 명확하지 않다. 선암사 원통전의 긴나라는 평창 동계올림픽 개막식에 등장해 세계인의 눈길을 사로잡았던 인면조, 그 인면조의 근거가 된 고구려 벽화 속 그림과 매우 유사하다. 인면조에 대해 누구는 도교의 서물瑞物이라고 하고 누구는 불교의 가릉빈가(극락조)라고 해석하지만, 설령 긴나라라고 주장할지라도 허물이 되진 것이다. 인면조는 특정 종교나 문명의 전유물이 아닌 고대문화의 상호텍스트성이 담긴 아이콘이기 때문이다.      

사진 : 최배문

그런데 원통전에는 왜 팔부신중 가운데 가루라와 긴나라만 한 짝으로 그려진 것일까. 「화엄경 약찬게」에서 “가루라왕긴나라”라고 부르기에 무의식적으로 함께 그린 것일까. 그럴 수도 있겠다. 사실 『화엄경』에 등장하는 신장들은 단순한 신중이 아니라 보살의 지위에 있는 존재다. 가루라는 큰 방편의 힘으로 선근이 익은 중생을 인도하여 열반과 법의 언덕으로 신속하게 안치하는 보살이고, 긴나라는 음악과 노래로 중생을 법열로 이끄는 보살이다. 그렇지만 이런 설명이 신장들 가운데 오직 가루라와 긴나라만 벽화로 그려진 이유를 충족시키진 못한다. 우리는 두 그림이 지닌 공통점을 찾아야 한다. 그것은 날개다. 팔부신중 가운데 날개를 지닌 도상은 둘인데, 그림 속 가루라는 매의 두상에 망토처럼 거대한 날개를 지녔고, 긴나라는 부드러운 여성의 얼굴에 걸맞은 앙증맞은 날개를 달고 있다. 날개는 인간들에게 희구의 대상이나 결코 지닐 수 없는 숙명을 반조反照하게 만드는 양가적 존재다. 날개는 억압으로부터 해방을 의미하지만, 날개를 실제로 소유하는 순간 비극은 시작된다. 이카로스의 날개가 그렇고, 애기장수 겨드랑이에 돋은 날개가 그렇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달려있는 법이다. 

인간에게 날개는 잠잘 때 꾸는 꿈과 유사하다. 해소되지 못한 무의식을 드러내는 동시에 은폐한다. 화사는 벽화 속 두 신장을 통해 중생이 삶에서 마주치는 은밀한 욕망과 금기의 이율배반을 무심하게 펼쳐내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천진난만한 필치로 말이다. 사람들이 이 미묘한 그림 앞에서 심사가 복잡해질 때쯤 고개를 왼편으로 돌리면 부드러운 미소로 맞아주는 존재가 있다. 원통전 중앙에 모셔진 관세음보살상이다. 이것이 어떤 의미인지 굳이 설명을 보탤 필요는 없을 것이다.  

윌리엄 포크너(1897~1962)는 ‘헤밍웨이의 독자들은 사전을 펼쳐볼 필요가 없다’면서 헤밍웨이를 비웃곤 했다. 헤밍웨이(1899~1961)는 ‘큰 단어에서 큰 감동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라며 받아쳤는데, 선암사 원통전 귀퉁이에 그려진 조촐한 벽화를 보면 헤밍웨이가 떠오른다. 그런데 포크너에게 노벨문학상을 안긴 『소리와 분노』는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에 나오는 “인생이란 바보가 들려주는 아무 의미 없는 ‘소리와 분노’로 가득 찬 이야기”란 문장에서 따온 것이다. 내가 「불광」의 편집에서 가장 흡족한 부분은 저자의 이름을 깨알같이 작은 글씨로 거의 보이지 않게 표기하는 방식이다.    

          

강호진
한양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에서 불교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중학생 때 어머니를 따라 해인사 백련암에 올라가 삼천 배를 하고 성철 스님에게 일각 一角이란 불명을 받았다. ‘오직 일체중생을 위해서 살라’는 성철 스님의 가르침에 깊은 감명을 받았지만 지금껏 별달리 일체중생을 위해 살아본 적이 없다. 좋은 스승을 만나고도 그 가르침대로 살지 못한 마음의 빚을 조금이나마 갚는다는 심정으로 『10대와 통하는 불교』,
『10대와 통하는 사찰벽화이야기』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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