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 명법문]살포시 곡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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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의 명법문]살포시 곡조를!
  • 법현 스님
  • 승인 2018.11.23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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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최배문

안녕하십니까?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은 여유로운 삶, 곡조를 지닌 삶입니다. 시 한 수 읊어볼까요?

거문고는 천 살을 먹어도 곡조를 머금고
桐千年老恒藏曲 
매화는 평생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으며
梅一生寒不賣香 
달은 천 번 이지러져도 본디 그대로이고
月到千虧餘本質 
버드나무는 백 번 부러져도 새 가지를 낸다
柳莖百別又新枝

어디서 들어보셨습니까? 들어 본 듯도 하지요? 김구 선생? 서산 대사? 느낌이 비슷하게 오지만 아닙니다. 조선 중기 인물인 상촌象村 신흠申欽이라는 분의 7언절구節句 시입니다. 

처음 이 글을 접했을 때는 “매화는 평생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으며 거문고는 천 살을 먹어도 곡조를 머금는다(梅一生寒不賣香 桐千年老恒藏曲)”는 내용만을 읽었고 누가 썼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아주 좋았습니다. 특히 세상에 나왔거나 세상을 벗어나 출가했거나 가리지 않고 벼슬이나 재산이나 명예를 대할 때 평소 입버릇처럼 말하는 초월한 삶을 곁에서 보기는 참으로 어려웠습니다. 스스로도 좋아하지만 그런 것들을 가진 이들을 만났을 때 보이는 태도는 참으로 실망스러운 것이었습니다. 대통령은 말할 것도 없고 국회의원이나 군수, 경찰서장, 구청장을 만나면 고개를 90도로 숙이고 그냥 절에 오는 신도를 만나면 고개를 뻣뻣이 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혹시 저만 그렇게 잘못 본 것입니까? 

‘저것은 아니다’라는 생각으로 바로잡는 노력을 기울여왔습니다. 그래서 연수교육 때 스님들에게 그런 유명하고 높은 사람을 만나면 고개를 반듯이 하고 악수하기만을 권했습니다. 물론 상대방이 합장하고 공경하게 인사하면 또 그렇게 받아주라고 했습니다. 『법화경法華經』에 나오는 인물인 상불경보살常不輕菩薩은 누구에게나 존경하는 예경을 하였으므로 비록 높은 이라고 하나 고개를 숙이지 않는 것은 잘못입니다. 불교인은 무조건 겸손한 모습을 보여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매스미디어 시대에 그것은 필요한 방편方便이라고 생각하여 그리 한 것입니다. 그것을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나의 기개를 보여주고 실현하는 것이라 믿었습니다. 

또 수행할 때 나의 자세는 누구에게도 굽히지 않는 것을 기본으로 삼았습니다. 설봉雪峰이라는 중국 스님의 어록에 “천지에 나와 짝할 이가 누구인가?”라는 글귀가 내 맘에 쏙 들었음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비록 부처님이나 큰스님이라 할지라도 예절로 높이는 것은 할지라도 공부의 경계만큼은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다는 자긍심으로 똘똘 뭉쳐 있었습니다.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였습니다. 

오동나무로 만든 거문고는 오래 가더라도 그 맑고 고운 음질이 변하지 않아 우아한 인품의 상징입니다. 최후의 한 사람까지, 최후의 한 순간까지 적국 일본에 대항해 싸우겠다는 독립선언문 마지막 구절처럼 혹독한 추위 속에 피어 향기가 흐드러지기보다는 은은한 매화의 매력을 담고 있는 멋진 내용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달의 모습은 초승달에서 보름달로 그리고 그믐달로 크기와 모양이 달라지는 듯 보이지만 사실 지구의 그림자에 가려 다르게 보일 뿐 제 모양은 그대로라는 것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압니다. 냇가의 버드나무는 초동樵童에게도 꺾이고 소에게도 꺾이는 힘없는 존재이지만 그때마다 새 가지를 내서 푸른빛을 자랑하고 초동의 입술로 다가가면 아름다운 피리 소리마저 냅니다. 요즘 보니까 풀피리 동호회라고 있는데 어떤 풀잎이든 손에 잡혀서 입술에 대면 아름다운 노래, 연주가 되더군요.

참 멋이 있고 맛이 있는 표현입니다. 이런 멋있는 표현을 보고 이 말을 한 이는 분명 스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내 좁은 생각이었습니다. 본디 세상 모든 것은 주인이 따로 없고 쓰는 이가 임자인 것입니다. 그런데 제 논에 물대는 사람처럼 멋있다고 스님의 것으로 생각한 것이지요. 알고 보니 조선 중기의 유림儒林인 상촌象村 신흠(申欽:1566-1628)선생의 시였습니다. 

선조宣祖를 섬기다가 광해군光海君의 핍박을 받으면서 고생을 하였던 이라 아마도 그 때쯤의 절개를 읊은 것이 아닌가도 생각되는 시입니다. 김구 선생 등이 애송하면서 절개를 강조하느라 뒤의 2행이 더 알려져 있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에게는 앞의 2행이 애송되고 있지만 나에게는 4행이 모두 같은 의미와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초승에는 초승달, 초승부터 보름 전까지는 상현上弦달, 보름에는 보름달, 열엿새부터 그믐 전까지는 하현下弦달, 그믐에는 그믐달이라 불리며 그 모습이 변해가는 달. 달은 스스로 모습을 변하는 것일까요? 대답은 ‘아닙니다, 틀렸습니다’ 입니다. 지구의 그림자에 가려 달의 크기가 다르게 보일 뿐 달의 크기가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에 천 번을 이지러진다한들 그 본디 크기가 달라질 리 있겠습니까? 어쩌면 권력이나 명예, 재산의 변동을 따라가는 이들에게 또는 그것을 강요하는 이들에게 에둘러 표현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편으로는 00보존의 법칙을 나타내는 말인 것 같기도 합니다. ‘에너지, 운동량 보존법칙’ 등 잘 아시지요? 그러니 아직까지 언제적 계수나무아래 토끼가 방아 찧고 있겠습니까? 

물가에 심어진 나무들은 물이 가까이 있어서 뿌리가 깊지 않고 줄기나 가지의 껍질이 조금만 비틀어도 비틀어집니다. 그래서 껍질만을 따로 벗겨내서 활용하는 일이 있습니다. 버드나무 같은 경우가 특히 그렇습니다. 어렸을 적 누구나 해봤음직한 악기놀이가 바로 버들피리 불기 아닙니까? 그런데 백 번을 꺾이더라도 새 가지를 낸다는 것은 참으로 신축성이 뛰어나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물론 백골이 진토 되더라도 일편단심이라는 뜻도 있겠지요.

그런데 한 해 두해 지내면서 생각하니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나이 먹어서, 수행을 많이 해서, 공부를 많이 해서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었나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명상법을 통해 자세히 살폈을 때 모든 것은 실체實體가 없고 시간에 따라 변해감을 제대로 앎으로써 마음의 고요(寂) 즉 평화(安=滅)를 느끼고 체험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되었을 때 너니 나니 하는 구별이나 차별 의식이 어디 개입하겠습니까? 그럴 때 바로 공자孔子가 강조한 ‘모든 공부의 마무리가 바로 노래요, 음악이다’하는 말이 마음에 닿았습니다. 그 경계가 거문고는 비록 천 살을 먹었을 지라도 곡조를 지닌다는 말입니다. 

세상의 절반인 여성들에게 그리고 그들을 사랑하다가 나이가 들어버린 남성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여성호르몬이 많은 분들은 말을 많이 해야 건강하게 산다고 합니다. 어떤 말이든 상관없지만 될 수 있으면 아름다운 말을 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천년 묵은 오동나무라도 거문고로 거듭나서 곡조를 지닌 삶의 주인공이 되시는 것은 어떤지요? 고맙습니다.                                                 

 

법문. 법현 스님

열린선원 원장, 나가노 금강사 주지, 서울 은평구 갈현동 전통시장 상가를 세내어 저잣거리 수행전법도량으로 가꾸고 있다. 불교청년회,대불련 활동 뒤 출가하여 동국대 대학원에 진학해 불교학을 연찬하고 태고종과 불교종단협의회,한국종교인평화회의에서 종무행정과 템플스테이 기획, 이웃종교와의 대화에 참여한 이력을 바탕으로 세상속에서 함께하는 불교를 추구한다.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대표, 생명존중헌장 제정위원, 4차산업혁명과 윤리분과 민관위원회, 은평구 초대 인권위원, 협치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쉽고, 재미있고 유익한 불교를 지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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