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 쌍계사의 가을은 이미 절정에 이르러 있었다. 깊은 산 내음이 바스락거리는 낙엽에서 스며나왔다.
한 학인이 운문 선사에게 물었다. “나무가 시들고 낙엽이 질 때는 어찌합니까?(樹凋葉落時如何)” 운문이 답했다. “가을 바람에 진면목이 드러나겠지.(體露金風)”
1738년에 지어진 쌍계사의 대웅전은 이상하리만치 기단만 남겨진 폐사지廢寺址처럼 보였다. 있으되 실로 있는 것은 아니라는 공空의 법문이 대웅전 앞 수조에 떨어지는 물소리보다 확연하게 들려왔다. 쌍계사는 황지우의 시구를 빌리자면 완전히 늙어서 편안해진 가죽부대를 걸치고, 등 뒤로 시끄러운 잡담을 담담하게 들어주는 아름다운 폐인의 모습이었다. 쓸쓸해서 아름답고, 아름답기에 다시 쓸쓸해지는 풍광은 지난 어리석음과 앞으로 짓게 될 죄업을 양지바른 절 마당에 죄 묻어버리라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차마 단풍나무 숲으로 향해 난 작은 길로 사라지지 못하고 죄인처럼 어둑한 대웅전 안으로 몸을 숨겼다.
만약 모든 것을 떨치고 산그늘로 걸어들어갔다면 가장 상심했을 이는 한국장학재단(이라 쓰고 학자금대출재단이라 읽는다)이었을 것이다.
찾던 벽화는 대웅전 내부 오른편 구석에 있었다. 19세기 무렵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그림에는 세 명의 여인이 등장한다. 화면 왼편에는 오색구름을 탄채 고개를 돌린 여인과 선扇을 쥔 자그마한 시녀가 있고, 오른편에는 방금 딴 듯 잎사귀가 싱그러운 복숭아를 받쳐 든 여인이 그들을 쫓고 있다. 나부끼는 옷자락으로 보아 조금 늦게 출발해 급히 일행을 따라잡은 모양이다. 앞에 선 여인이 눈빛으로 시녀에게 묻는다. ‘복숭아는?’ ‘잘 오고 있습니다.’
이 벽화의 주인공은 왼편 가장자리 에 가장 크게 그려진 여인이다.
당신은 이 여인을 아는가? 어쩌면 이미 이 여인과 마주쳤을지도 모른다. 고분古墳이나 옛 그림 에서 흘깃 보았거나 혹은 『서유기』나 『구운몽』에 서 그 이름을 듣기도 했을 것이다. 관심이 없어 지나쳤겠지만, 생면부지의 인물은 아니란 이야기다. 그림 속 여인은 낯선 번호로 걸려온 전화기 너머 에서 당신의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는 미지의 목소리다. 물론 보험판매나 보이스피싱은 아니다. 당신은 식은땀을 흘리며 기억의 장부를 열심히 뒤적거리겠지만 그리 간단히 떠오르진 않을 것이다. 그래서 기억을 도와줄 이야기를 가지고 왔다.
서왕모西王母는 중간에 앉아 그 옆에 반도蟠桃 를 쌓아두고 연회에 온 이들에게 하나씩만 나눠주었다. 옥황상제와 노자老子에게는 두 개, 오직 석가여래에게만 세 개를 주었다. 여래는 반도를 들어 게송을 읊었다.
천년 된 반도는 있어도
백년을 사는 사람은 없구나.
가련타, 텅 빈 뗏목이여,
잊어버린 나루를 건너게 하소서.
그뒤에 쪼개어 먹으니 가섭은 침을 흘리고,
아난은 그 모습을 흘기며 웃었다.
여래가 가섭과 아난에게 복숭아 한 개씩을 주었다. (중략)
투전승불鬪戰勝佛이 옆에 있다가 큰 소리로 말했다.
“왕모는 어찌하여 나에게 하나를 더 주지 않는가?”
여래가 오공悟空을 꾸짖었다.
“너는 이미 부처가 되었음에도 어이하여 성정이 옛날처럼 거친 것이냐?”
이에 노자가 말했다.
“저 이가 지난번 반도연蟠桃宴에서 복숭아를 다 훔쳐먹었는데,오늘 겨우 한 개 받았으니 마음에 차겠소? 빼앗아 먹지 않은 게 이상한 일이지.”
투전승불이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이미 성불成佛했는데, 어찌 도둑질을 하겠소? 부처와 도둑이 함께 있다는 말은 모순이구려.”
이말에 연회에 참석한 모두가 한바탕 크게 웃었다.
한문으로 필사된 고소설 『구운기九雲記』의 한 대목이다. 『구운기』는 『구운몽』을 익명의 저자가 증보增補한것으로 그장회章回가 원본의 두 배를 넘는다. 그래서 원본에는 없는 위와 같은 재미난 장면도 등장한다. 옥황상제와 노자, 석가여래와 관음보살, 신선과 선재동자, 심지어 손오공까지 모인 대규모 연회의 주최자는 서왕모西王母, 즉 벽화 속 여인이다. 우리는 비로소 벽화가 이 연회를 위해 시녀를 대동하고 자신의 반도원蟠桃園에서 복숭아를 가져오는 장면을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서왕모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저 천상天上 사교계의 여왕 정도로 대충 이해하고 넘어가도 살아가는 데 별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에게 글은 여기서 끝이 난다. <끝>.
문제는 살아가는 일에만 치중하다 보니 삶이 뻔해진다는 점이다. 아파트 시세와 자동차 배기량 외에는 흥미가 없는 이들을 꼰대라 부르고, 맛집 탐방과 인터넷쇼핑이 유일한 낙인 이들을 속물이 라 부른다. 꼰대와 속물이 점령한 세상에서 서왕모의 정체를 궁금해하는 것은 지적허영일지라도, 그 허영으로 인해 인간다운 무늬(人文)가 생긴다고 믿기에 글을 잇는다.
서왕모와 관련된 기록 가운데 가장 오래된 중국의 『산해경山海經』에 따르면 서왕모는 서쪽 옥산玉山에 거주하며 사람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표범의 꼬리에 호랑이 이빨을 지녔고 봉두난발에 머리꾸미개(勝)를 꽂고 휘파람을 잘 부는 반인반수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여기서 서왕모는 하늘의 재앙과 다섯 가지 형벌을 주관하는 능력을 지닌 신으로 소략하게 언급될 뿐이다. 서왕모가 여신으로서 격을 갖추게된 것은 전한前漢 시대를 전후로 한 기록들에서 거처가 곤륜산으로 바뀌고 장생불사長生不死의 능력과 결합되면서부터이다. 또한 이 무렵 무덤에서 출토된 화상석畫像石의 서왕모는 단순히 신화적 인물이 아닌 죽음을 이겨내고 사후세계를 관장하는 종교적 절대자로 삼족오三足烏나 구미호, 옥토끼와 두꺼비 등을 거느린 모습으로 그려진다. 중국역사 속에서 서왕모는 전승에서 출발해 불교의 내세관과 도교의 신선술에 두루 관련을 맺으며 뭇 선녀와 신선을 통할하는 여신으로서 위상을 갖추게 되는데, 오늘날 전해지는 문학과 그림에 등장하는 서왕모의 모습은 위진魏晉 시대의 지괴志怪 소설인 『한무내전漢武內傳』의 영향이다.
서왕모는 두 시녀와 함께 궁전에 올랐는데, 시녀의 나이는16~17세 정도로 푸른 상의를 입은 미녀들이다. 서왕모는 동쪽을 향해 앉았는데 나이는 30세 정도이다. 황금색 비단치마에 영비靈飛의 끈 을 두르고, 허리에는 분두分頭의 검을 차고, 태화太華의 머리 모양에 보배 관冠을 썼으며, 검은 옥으로 장식한 봉황 문양의 신을 신고 있다. 자태는 온화하고 얼굴은 절세미인으로 신령한 존재의 모습이다.
쌍계사 벽에 그려진 서왕모는 사나운 세 마리 청조靑鳥를 거느린 반인반수가 아니라 후기에 확립된 미인의 모습이 반영된 것이다. 삼천 년마다 열매를 맺는다는 장생불사의 복숭아를 나눠먹는 서왕모의 연회를 반도회蟠桃會라고 부르는데, 연회가 곤륜산의 연못인 요지瑤池에서 펼쳐졌기에 요지연 瑤池宴이라고도 한다. 중국의 문헌과 그림에서 다 루어진 반도회는 주로 신선들이 모여 연회에 참석 하러 가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김홍도의 「군선도 群仙圖」에는 도교의 교조인 노자와 서왕모의 복숭아 덕분에 오랫동안 산 동방삭을 비롯한 여러 신선들이 어디론가 가고 있는데, 다름 아닌 서왕모의 반도연에 참석하는 모습이다. 여덟 신선이 바다를 건너는 모습을 담은 「팔선과해도八仙過海圖」 역시 반도연이란 맥락 속에서 이해해야 하는 작품 이다.
조선 후기에 많이 그려진 요지연도瑤池宴圖에는 중국과는 다르게 서왕모의 연회가 중심이 되고 『구운기』에서 보듯 불보살도 함께 초대된다는 점에서 서왕모를 주축으로 한 도교와 불교의 융합적 성격이 강해짐을 읽을 수 있다. 독특한 한국의 정
서가 가미된 요지연도는 장생불사와 잔치라는 두 가지 성격으로 인해 탄생, 혼인, 회갑 등의 축하연에서 사용되는 병풍그림으로 민간에 널리 퍼졌다. 우리가 어떤 민족인가 하면, 잔치의 민족 아니겠는가. 그래서 쌍계사 서왕모도는 잔치의 흥겨움과 장생불사의 축원을 담은 민중적 의미로 읽어내야 한다. 복잡한 연회를 작은 화면 안에 다 담을 수 없 었던 화사는 복숭아를 들고 어디론가 향하는 서왕모와 시녀를 통해 곧 이루어질 성대한 연회를 간접적으로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 복숭아는 여래에게 바칠 공양 물이니 불전에 어울리는 공양도供養圖로서도 그만이었을 것이다. 모르는 이가 보면 흔한 천녀天女의 공양도에 그치고, 아는 눈으로 읽으면 도석道釋의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고 축제의 설렘까지 은밀하게 배어있는 다층적 작품이 된다. 아는 것의 즐거움이 만들어내는 인간의 무늬란 바로 이런 것 아 니겠는가. 그런데 여래에게는 복숭아 세 개를 공 양해야 하는데 하나는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혹시 당신....
강호진
한양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에서 불교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중학생 때 어머니를 따라 해인사 백련암에 올라가 삼천 배를 하고 성철 스님에게 일각一角이란 불명을 받았다. ‘오직 일체중생을 위해서 살라’는 성철 스님의 가르침에 깊은 감명을 받았지만 지금껏 별달리 일체중생을 위해 살아본 적이 없다. 좋은 스승을 만나고도 그 가르침대로 살지 못한 마음의 빚을 조금이나마 갚는다는 심정으로 『10대와 통하는 불교』, 『10대와 통하는 사찰벽화이야기』를 썼다.